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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피난민
강원도 철원의 최북단 마을 생창리에 ‘DMZ생태평화공원’이 들어서 있다. 남방한계선 철책까지 이어지는 탐방로이다. ‘DMZ평화의 길’은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안인데, 유엔사와 협의가 늦어지고 안전 문제가 있어 강원 고성 DMZ의 걷기 코스만 먼저 공개됐다. ‘DMZ평화의 길’ 출발지점은 고성의 통일전망대다. 철원 구간은 백마고지 전적지를 관통해 철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66년만에 처음으로 민간에게 공개되는 길이다.
봉의산성은 강원도 기념물 제26호로 춘천의 진산인 해발 301m의 봉의산에 있는 고대산성이다. 춘천은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역인데 봉의산에 오르면 동·서·남·북 4면을 모두 조망할 수 있어 전략적·지리적으로 요충지에 봉의산성이 있다. 봉의산성에서는 여러 차례의 피의 항전이 있었는데, 거란의 침입 때에는 안찰사 노주한과 많은 관속이 해를 입었고, 또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한국전쟁 등 국가의 전란이 있을 때마다 봉의산성은 중요 격전장이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1951년 2월 지금의 거제시 수양동과 고현동을 중심으로 거제도 일대에 설치되어 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 1953년 7월까지 운영되었다. 거제군은 현재 거제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거제포로수용소는 1983년 12월 20일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동네사람들이 마당가에 토롱을 해 놓았다. 구교리에서는 우리만 피난 가고 다른 사람들은 장질부사에 걸려 죽은 사람도 많았다. 집집마다 굴이 있어 굴속에 습기가 많아 살이 빠져 꼿꼿했다. 피란에서 돌아와 보니 할머니가 혼자서 사망하이 동네사람들이 마당가에 토롱[임시로 만든 묘]을 해 놓았다. 다른 마을은 서로 고자질하여 인명 피해가 났는데 구교리는 그런 일 없이 양쪽이 인명 피해가 없었다. 피난에서 돌아와 인공 때 5학년을 졸업한 전력으로 중 2학년으로 한 학년 내려서 학교로 들어갔다. 군당 사무실에 가마니를 깔고 배웠다. 책이 달라 선생님이 책을 구해다 배웠다. 북에시 피난을 나와 1군단 군속으로 있던 권문수 교감, 문관으로 있었던 김덕겸 선생이 교사가 되었다. 김덕겸 신생은 이북 고성에서 배구 선수였는데 배구코치를 해 주어서 체육 교사가 되었다. 1951년 봄부터 9인조 배구 선수로 활동하여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오가며 전쟁 소식을 전했지만, 박용구 씨 마을에도 인민군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이가 많거나 적어도 또 비슷해도 ‘동무’라고 했다. 비속어 섞인 거친 말들도 많이 썼다. 마을에 인민군이 와서 지내자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집이 불에 타고 마을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많이 죽었다. 죽은 사람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가마니에 말아서 산에 묻어 두었다. 더운 여름이라 마을 사람들은 여느 때와 같이 입구의 정자나무에서 쉬고 있을 때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정자나무가 있어 마을 사람들은 겨우 피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항상 마을을 지키던 정자나무가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지킨 것이다. 아직도 정 자나무에는 폭격을 맞은 자국이 남아 있다. 인민군들은 전투 중인 군인들을 위해 식량을 만들었다. 소를 잡아서 장조림을 했다. 어린 박용구 씨는 그 틈에 끼어 몰래 몇 점 먹기도 했다. 또 밤 되면 마을 사람들을 모아 김일성 장군의 노래, 북한 애국가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내가 겪은 6.25전쟁은 한마디로 비참했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어느 날 한 전우가 중대장이 전선을 파악하고 오겠다고 하여 나와 임무를 교대하였는데, 몇 시간 후 아군 진지에 적의 포탄이 날아들어 전우 3명이 전사했다. 이후 휴전협정이 되어서야 1956년에 군 생활을 마치고 만기 전역 특명을 받아 그리운 어머님이 계시는 고향 집으로 무사 귀환했다. 그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아파온다. 6.25전쟁에서의 피난생활과 군대생활, 6.25 한국전쟁 그 자체는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이 참혹했다.
약 6개월간 대구 제3사단 사령부 의병 근무를 마치고 원대 복귀하게 되었는데 3사단 사령부에서 병사 10명을 별도 차출하여 사단사령부로 전속시켰다. 나는 차출되어 동료와 함께 사단장관사 근무병으로서 근무하는 도중 사단장 가족을 보호하는 겸 본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과 사단장 가족이 우리 몰래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도 이렇게 있으면 인민군에게 포로가 될지 모르니 한강 쪽으로 가자고 마음먹곤 피난민 대열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의 인기만큼 드라마 촬영지였던 포항 구룡포마을도 화제가 되었다. 사실 이 드라마의 촬영지는 구룡포 마을 외에도 여러 곳이다.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신흥시장도 중요한 촬영 장소 중 하나이다. 동백의 아들인 필구가 엄마와 만나고, 용식 아저씨를 만나는 오락실이 신흥시장에 있다. 지금은 찾기 어려워진 오락실이 있는 신흥시장은 과거와 현재가 함께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의정부제일시장은 경기도 북부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이다. 의정부제일시장은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맛있는 먹거리도 많다. 드라마 <초콜릿>의 여주인공이 잃어버린 미각을 찾으러 간 곳이 의정부제일시장이었다는 것은 그저 드라마의 설정이었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의정부제일시장을 찾아 맛있는 먹거리를 즐기고 있다. 의정부제일시장은 전통시장의 위기를 극복하고 손님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중이다.
한국전쟁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을 빼앗았다.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떠나서 새롭게 정착해서 살 수밖에 없었다. 대구광역시에 위치한 교동시장은 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대구에서 정착한 사람들이 세운 시장이다. 이들은 한국전쟁 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사고팔았다. 이 덕에 양키시장이라고도 불렸다. 대구광역시의 교동시장은 한국전쟁으로 만들어진 시장이다.
바다와 시장은 예술작품에 단골로 나오는 소재였다. 대한민국 어시장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부산광역시에 위치한 자갈치 시장 역시 작가들이 즐겨 그렸던 소재였다. 아마도 바다와 시장이 주는 생동감과 매대 위에 올려 있는 살아있는 생선과 바삐 움직이는 상인들 속에서 보이는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피난시절 부산에서 거주했고, 이후에도 부산을 사랑했던 장욱진의 ‘자갈치 시장’, 자갈치 시장에 작업실을 둘 정도로 자갈치 시장을 사랑했던 현재호의 ‘자갈치’, 부산이 고향인 박병제의 ‘자갈치의 오후’와 ‘행상’을 통해 자갈치 시장을 만나보자.
「지옥의 49일」은 1950년대 동해의 작은 섬인 얼룩섬에 침공하는 북한군 일개 중대에 맞서 싸운 섬주민의 항쟁과정을 그린 반공영화이다. 1979년 합동영화 주식회사에서 제작한 전쟁액션영화로 이두용 감독이 연출했다. 이문웅의 각본으로 현길수, 조혜진, 한태일, 신우철 등이 출연한 작품으로 상영시간을 105분이다.
자연과 지리 / 향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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