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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장미산성
질현성은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8호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산31-1의 칠현산에 축성된 테뫼식산성이다. 질현성은 백제부흥군인 복신의 중요거점이었던 지라성(支羅城)으로 백제시대에 축성되어 백제 멸망뒤 부흥군의 항전 거점으로서 활용되었던 곳이다. 질현성의 특징은 산성에서부터 북쪽으로 능선을 따라 질현성을 보완하는 보루(堡壘)가 6곳에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산성 남쪽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대전시사지가 조망되고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산성은 고령읍 배후의 해발 311m 주산 정상부와 동쪽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산 정상 9부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으며 평면 형태는 긴 타원형에 둘레는 약 711m이다. 외성은 내성의 남북 양끝에서 시작하여 산 아래쪽으로 대략 해발 160m 정도의 6부 능선을 따라 성벽을 둘렀다. 둘레는 약 1,035m이며 평면 형태는 5각형에 가깝다.
신라시대에 주장성(晝長城)으로 불린 남한산성은 672년(문무왕 12)에 쌓았으며 주위가 4천 3백 60보였다. 4,360보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8km 정도 된다. 7세기 후반 신라의 발달된 축성기술이 총동원되었을 것이다. 주장성을 쌓는데 사용된 석재는 현지에서 조달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운반하여 왔다. 성문은 여타의 신라 산성처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는 발달된 축성기술에 걸맞는 병영과 창고 등 각종 건물이 건설되었다. 그중 하나가 행궁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의 대형건물지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1624년(인조 2년) 수어사 이서(李曙)는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서 남한산성을 전면 수축하는 공사를 단행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1638년(인조16)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을 단행한다. 이후 숙종과 정조대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진다.
경주 남산 북쪽에 있는 해발 281m의 해목령을 중심으로 골짜기를 둘러싼 석성이다. 길이는 약 3.7km이다. 591년(신라 진평왕 13)에 ‘남산성’을 쌓으니 주위가 2,854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679년(신라 문무왕 19)에 성을 크게 증축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동안 ‘남산성’으로 불렸다.
함안읍 가야읍 소재지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약 2.5km 떨어진 해발 139.4m의 조남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둘레 1.4km 정도의 삼국시대의 석축성이다. 조남산성(造南山城)이라고도 한다. 내․외벽은 모두 돌로 쌓은 협축식이고 신라산성의 특징을 보이는 외벽보강 구조물, 연화문막새 등의 기와류, 6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명문목간, 목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산성은 아라가야가 멸망한 직후 신라에 의해서 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때 고언백(高彦伯, ~1608년)이 왜적을 맞아 싸운 불암산(509m)의 산성은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경기도 기념물 제221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지정이 2010년 12월에 된 것으로 봐서 좀 늦은 감이 있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추축이 되는데, 『대동지지』에는 선조 임진년에 의병장 고언백이 쌓은 것이라고 양주조에 전한다.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부에 테뫼식으로 쌓은 석축산성이다. 백제 때 쌓았고 둘레는 약 550m 정도이며 체성의 너비는 5.5m이고 양면을 쌓은 협축식 산성이다. 남쪽으로는 광양만과 순천 지역이, 북서쪽으로는 광양읍이 남동쪽으로는 진주로 가는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 후기에 축성되어 통일신라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7세기와 9세기 경에 활발히 사용되었다.
자연과 지리 / 향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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