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 색
고급검색
관리번호
발행년도
시 대
연 대
선택조건
지역N문화 포털은 콘텐츠 생산자 및 연구자들을 위해 서지정보 내보내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서지관리 프로그램은 문헌 및 온라인 콘텐츠 등 자료를 관리하고 공유하는데 사용됩니다.
※ 해당 프로그램은 소속기관 또는 개인 가입이 필요할 수 있으며, 지역N문화 포털은 링크만 제공하고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관심지역 :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지역N문화 시작하기
마지막으로 로그인한 계정입니다.
지역N문화는 별도의 회원가입 없이 사용중인 SNS로로그인하여 간편하게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방문화원이 기획하고 제작한 지역문화콘텐츠 이미지, 동영상, 오디오, 전자책 제공
저고리는 상대의 기본 복식이며 남녀 상하 모두가 착용하였다. 저고리의 형태는 직령교임식(直領交衽式)으로 길이가 긴 장유와 짧은 저고리가 공존하며 착용되었다. 허리에는 띠를 매어 고정하였으며 깃과 여밈부분, 소매부리, 끝동에는 저고리와 다른 색의 천으로 선을 둘러 기능성과 함께 미적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저고리의 기본형은 남녀가 모두 같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서도 모두 같은 형태로 착용하였다.
동다리(同多里)는 조선시대 후기 전복 밑에 입던 군복의 구성 품목 중 하나로, 소매통이 좁은 구군포의 총칭이며 소매에 다른 색의 천을 덧댄 협수(夾袖)를 의미한다. 동다리의 형태는 오늘날의 두루마기와 비슷하다. 뒷길의 중심선이 있고, 무 양옆이 트인 것과 트이지 않은 것이 있고 겹에 따라 ‘홑동다리’와 ‘겹동다리’가 있다. 깃은 곧고 소매는 좁으며 색깔은 보통 길은 붉은빛이 도는 황색을 사용하고 소매는 적색으로 하였다. 이처럼 동다리는 몸판과는 다른 색의 소매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동다리와 전복 차림의 구군복(具軍服)은 1895년(고종 32) 칙령 제78호인 ‘육군복장규칙(陸軍服裝規則)’이 반포되자 서양식 군복인 신군복(新軍服)으로 대체되어 공식적으로 사라진다.
전복(戰服)이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관복과 군복 위에 입는 소매 없는 옷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전복은 홑옷 형태로 소매와 섶이 없고, 허리부터 끝까지 등 솔기와 양옆의 아랫부분이 트여있다. 겉감으로는 주로 주(紬)나 사(紗)를 사용하였으며, 안감은 붉은색으로 하였다. 구군복으로서 전복을 입을 때는 전립을 쓰고 안에 붉은색 동달이를 입었으며 전복과 같은 색의 광대(廣帶)를 메고 남색 전대를 앞에 늘어뜨리고 병부(兵符)를 찼다. 이러한 전복은 1884년(고종 21)에 시행된 의복간소화 정책에 의해 답호와 전복이 동일하게 착용되고, 이어 1888년(고종 25)에는 소매가 넓은 종류의 옷이 금지되면서 문무관리들이 평상복으로 착용하였다.
조선시대 백관의 공복(公服)은 백관이 공사(公事)시 입는 옷으로 제복(祭服)과 조복(朝服) 다음이다. 또는 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식인 사은(謝恩), 사퇴(辭退)하기 위해 왕을 찾아가 뵐 때 착용하였다. 외국에 있는 문무관(文武官)이 공사(公事)에 참여할 때 착용하기도 하였다. 공복은 복두(幞頭)에 포(袍), 대(帶), 홀(笏), 화(靴)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포의 색, 대의 장식, 홀의 재료로 품계의 상하를 구별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왕 이하 관리의 관복이 사라졌다가 복구되었다. 이 중 공복만 복구되지 못하여 공복을 착용해야 할 때는 흑단령(黑團領)으로 대신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후기부터 관모인 복두를 포함한 공복 제도가 해이해져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전립(戰笠)은 조선시대 무관의 구군복(具軍服)에 착용한 패랭이형 모자이다. 전립(氈笠)·모립(毛笠)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동물의 털인 모(毛), 동물의 가죽인 전(氈) 소재로 모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위가 높은 관리들의 ‘안올림 벙거지’에 반하여 낮은 계급 사람들이 착용한 간단하게 만든 것은 ‘벙거지’나 ‘벙테기’라는 이름의 전립이었다. 전립은 전란 이후 전립의 실용적인 군모로서 역할이 다하게 되자, 전립의 재료를 보다 가볍고 사치스러운 것으로 만들면서 등장한 죽전립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시대 말기까지 왕의 원근행행시(遠近行幸時)에 백관이 군복과 병행하였다.
조선시대 백관의 상복(常服)은 문무관(文武官)이 평상 집무시에 착용한 옷으로 상복의 상정은 세종(世宗) 8년(1426년) 2월에 조복, 제복, 공복과 함께 있었다. 상복의 구성은 사모(紗帽), 단령(團領), 품대(品帶), 흑화로 이루어지며, 상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포인 단령에 다는 흉배(胸背)로, 흉배의 제정은 단종(端宗)2년(1454년)에 가서 생겼다. 상복과 공복의 차이는 관모가 각각 복두와 사모로 달랐으며, 흉배와 홀의 여부에 달렸다. 상복에는 흉배는 있으나 공복에 사용하는 홀(笏)이 없었다. 또한 상복은 품계에 따라 옷의 색상이 규정되지 않아 공복과 달리 다양한 색상의 단령을 착용하였다.
조선시대 백관의 조복(朝服)은 왕이 면복(冕服)을 입고 제사 지낼 때 백관이 입는 옷이다. 정월 초하루, 동지(冬至) 같은 날이나 임금의 생일을 경축하는 성절(聖節)을 포함하는 경축일(慶祝日), 그리고 조칙을 반포할 때와 왕에게 표(表)를 올릴 때도 입으며 이는 금관조복(金冠朝服)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복의 구성은 양관(梁冠)에 적초의(赤綃衣), 적초상(赤綃裳), 백초중단(白綃中單)을 입고, 허리에는 대대(大帶), 혁대(革帶)를 맨다. 발에는 말(襪, 버선)과 혜(鞋, 신발)을 신고, 그 외에는 폐슬(蔽膝), 패옥(佩玉), 수(綏), 홀(笏)이 있다. 이러한 조복의 제도는 대한제국 마지막 시기 여러 번 의복제도를 고치려는 시도가 있었음에도 선대의 임금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도라고 하여 계승되었다.
서리복(書吏服)은 집권기구의 말단을 담당하는 서리가 입던 옷이다. 서리는 각 사(司)에 모두 있었으며, 관교와 평민계급의 중간에 위치한다. 서리는 일명 이서(吏胥)·이속(吏屬)·아전(衙前)이라고도 한다. 녹사복(錄事服)은 말단관리로 품계가 없는 녹사가 입던 옷이다. 중인 계급에 속하는 녹사는 아전으로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등 중요 관아에만 근무하였다. 향리복(鄕吏服)은 양반과 상민 중간에 위치한 향리의 복식이다.
조례복(皂隸服)은 각 관아의 말단에 속하는 사령들이 입는 옷이다. 조례(皂隸)는 하급 군관으로 조선시대 중앙관서 및 관리의 호위(護衛) 및 사역(使役)을 담당하여 경호·경비·사령 등 잡역에 종사하였다. 근무 시 이들의 복식 차림은 조건(皁巾), 청단령(靑團領), 도아(條兒)를 착용하고 납패를 찼다. 그러나 공주 또는 옹주를 호위할 때는 초록색의 단령을 입었고, 때로는 주황색 단령을 입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흑립, 철릭 외에 소속에 따라 흑립과 창옷, 전립과 더그레 창옷 등을 착용하였다.
국의(鞠衣, 菊衣)는 왕비의 상복(常服)으로 조선시대 왕비가 침잠례(親蠶禮) 행사 시 착용하는 친잠복(親蠶服)이다. 왕비의 상복은 단삼, 노의, 장삼도 포함된다. ‘친잠례’는 왕비가 직조(織造), 즉 길쌈을 장려하기 위해 직접 뽕잎 따기, 누에치기, 길쌈 시범 등의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조선의 왕비가 주도하는 유일한 행사로 조선시대 종묘와 사직의 제사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중사(中祀)였으므로 왕비의 권위와 정통성을 세우고 애민 사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 국의는 상색이었지만 복색이나 국의에 대한 제도가 일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후에는 원삼으로 대체되었다.
향리복(鄕吏服)은 조선시대 지방 관청에서 행정실무를 처리하던 향리(鄕吏)들이 입는 옷이다. 조선시대에는 향리의 신분에 따른 복식 제한이 철저하였으며, 향리의 공복은 복두를 쓰고 녹포에 흑각대, 목홀, 흑피혜를 착용하였고, 상복은 흑죽방립을 쓰고 직령을 입었으며 허리에 조아(條兒)를 매고 가죽신인 피화(皮靴)를 착용하였다. 이중 향리의 공복은 백관복에 준하는 차림으로 향리의 신분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단삼(團杉)은 조선시대 전기 왕비의 예복 가운데 하나로 중국 명나라 황후 및 명부(命婦)의 예복이다. 조선시대 전기에 명나라에서 왕비의 예복을 보내왔는데, 그중 왕비의 관복(冠服)으로 단삼을 함께 보내왔다. 단삼의 형태는 한자 뜻 그대로 둥근 깃 형태의 옷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단삼의 색상은 대홍색과 녹색이 있었으며, 옷감은 저사(紵紗)로 만든 것이 아홉 건이었다. 또한 옷감에 사계절의 꽃무늬를 직금하거나, 꿩이 수놓아진 흉배를 닿았다. 또한 통수스란(筒袖膝襴) 단삼에 대한 기록도 세 건이 있다. 단삼은 왕비의 대삼이 적의로 바뀌면서 사라지게 되고, 사대부가의 단삼 또한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며, 조선시대 중기 이후 원삼(圓衫)으로 형태와 이름이 바뀐 것으로 추정한다.
자연과 지리 / 향토지
SNS에 공유해보세요.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QR코드를 스캔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