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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로 구성한 지역문화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

여름철 원기회복 장어로 해결

높은 습도에 기온이 올라가는 찜통 무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더위에 지쳐가고 있을 듯합니다. 폭염은 몸의 수분을 빼앗아 일사병과 열사병을 발생시키고 실내에선 오랜 시간 냉방기에 노출되어 냉방병까지 일으켜 건강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데요. 여름철 대표 보양식, 장어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기력도 회복하고 든든한 한 끼도 채우시는 거 어떠세요? 장어는 불포화지방산과 DHA, EPA 등을 함유하고 있으며 철분, 칼슘, 단백질 등이 풍부해 기력 보충에 좋은 건강 음식입니다. 몸에 좋은 요소가 가득한 장어는 신선하게 먹고 싶을 땐 '회'로, 고소한 맛을 느끼고 싶을 땐 '구이'로, 칼칼함을 맛보고 싶을 땐 '탕'으로 즐길 수 있답니다. 또한 먹장어, 붕장어, 갯장어 등 그 종류도 다양하여 입맛과 취향에 따라 누구나 쉽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땀도 많이 나고 더운 여름, 기력이 쇠해지셨다면 오늘 저녁은 장어 한 마리 몰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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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고흥군

    “붕장어는 통통하니 놀자근한 것, 입이 짤막한 것이 담백하고 맛있지”
    장어의 종류는 민물장어, 먹장어(곰장어), 붕장어, 갯장어 등이다. 도시의 포장마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물장어, 먹장어와 달리 붕장어는 남해안 지역에서 볼 수 있다. 붕장어는 비늘이 없고 입이 둥글고 이빨이 약하다. 옆으로 흰점이 줄줄이 나 있고, 가시가 적고 살이 부드러워 먹기에 좋다. 예전에는 장어회로 많이 먹었으나 기름이 많아 구이로 먹어도 맛있다.
  • 전북 >고창군

    보양강장식품의 대명사, 고창 풍천장어구이
    풍천장어구이는 전라북도 고창군의 인천강(仁川江)의 하구에서 잡은 뱀장어에 고추장소스를 발라 구운 고창군의 향토음식이다. 인천강 하구에서 잡은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하는데, 일반 뱀장어에 비해 육질이 단단하고 영양가가 높아서 맛도 휠씬 고소하다.
  • 부산 >중구

    전국의 포장마차를 제패했던 부산 자갈치시장 꼼장어구이
    자갈치 꼼장어구이는 먹장어를 매운 양념에 채소와 버무려서 구워 먹는 부산광역시 자갈치시장의 향토음식이다. 꼼장어는 먹장어의 경상도 방언으로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대표적인 수산물이다. 해방이후 일본에서 돌아와 부산에 정착한 귀국동포들이 충무동 바닷가에 좌판을 벌여 판매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 부산 >사상구

    부산 양산도집, 민물장어의 맛있는 변신
    1956년 김우영·강행림 부부가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 516번지에 민물 장어구이 전문 식당을 열었다. 식당을 하면서 민물장어 도·소매업도 겸업하였다. 양산도집이라는 상호는 주인이 지은 것이 아니라 단골손님이 지은 이름이다. 양산도집은 처음 가게를 연 이후 지금까지 건물을 증축,개축을 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우영이 사망하면서 딸인 김말숙이 가게를 이었고, 2019년부터는 김말숙의 며느리인 문현아가 가게를 이어가고 있다.
  • 전남 >여수시

    일본으로 수출되는 장어
    장어는 조선시대에 주로 보신용으로 먹었다. 일제 강점기 들어 일반 요리로 정착되었는데 일본인들이 장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조선사람들도 그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으로 수출되던 장어는 갯장어와 붕장어였는데 이 두 장어는 모두 바다에 산다. 두 장어 모두 남해안에서 많이 잡혔다. 붕장어는 통영, 갯장어는 여수가 유명하다. 뱀장어는 민물에서 살다 산란하러 바다에 가고 알에서 깨어난 어린 장어가 다시 강으로 돌아와 산다. 뱀장어는 풍천장어라고도 부르는데 전라북도 고창이 유명하다.
  • 전남 >강진군

    장어를 잡기 위해 만든 함정, 강진 탐진강의 ‘독다믈’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만과 장흥 탐진강 일대에서는 돌무더기를 쌓아 풍천장어를 잡는다. 서해의 야트막한 개펄 지역이나 강 하구에서 장어를 잡는 전통 어로방식으로, 장흥군 탐진강 하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리때 드러나는 갯벌에 1m 높이로 돌무더기를 쌓아두는데 남도에서는 ‘독다믈’이라 한다. 돌무더기 주변에는 대나무나 쇠말뚝을 박은 후 사각 그물을 쳐두고, 물이 깊은 곳에 고기가 모이는 임통을 만들어둔다. 물이 빠진 후 그물 안으로 들어가 돌을 그물 밖으로 던지면 장어가 임통 안으로 들어간 것을 잡는다. 인위적으로 함정을 만들어 장어를 낚는 함정어법이다.
  • 울산 >중구

    울산 곰장어골목의 터줏대감, ‘대왕곰장어’
    '대왕곰장어'는 감포 출신의 이상길이 울산광역시 역전시장에서 1973년에 개업한 곰장어 전문점이다. 곰장어는 꼼장어·먹장어·묵장어·꾀장어·푸장어 등으로도 불린다. 지금은 아들인 이정훈이 가게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의 대로가 뚫리기 전, 울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동해남부선이 운행되었는데, 역전시장에서 시작된 곰장어가게들은 철로변과 가판으로 중앙시장까지 늘어섰다.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곰장어가게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곰장어 골목을 형성하였다.
  • 전북 >고창군

    양식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고창 풍천장어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만돌리 일대의 갯벌에서는 풍천장어를 양식한다. 장어는 바다에서 부화한 후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올라와 자라다가 산란기가 되면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선운사 앞의 줄포만으로 흘러드는 주진천 일대는 장어가 회귀하기 위해 머무는 공간이다. 강 하구인 풍천에서 잡은 장어라는 뜻에서 ‘풍천장어’라 부른다. 주진천 하구는 담수와 해수가 만나 장어 먹이인 플랑크톤이 풍부하고, 강한 물살을 뚫고 성장하므로 육질이 좋다. 하구를 막는 개발로 인해 양식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68년에 장어 새끼인 ‘실뱀장어’를 잡아 수출했으나 1971년부터는 양식을 시작했고, 1980년대에 양식센터를 건립해 풍천장어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충남 >당진시

    여름 보양식으로 유명한 실뱀장어잡이
    실뱀장어는 뱀장어의 치어를 말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식 표현인 ‘시라시’라고 부른다. 실뱀장어는 사람의 눈으로 겨우 보일 정도로 아주 작지만 양식장으로 옮겨져 다양한 사료를 먹으면 일반인들이 먹을 수 있는 정도까지 자라게 된다. 충남 당진의 실뱀장어잡이는 봄철에 행해지는데 주로 그물을 이용한다. 잡은 실뱀장어는 크기별로 구분을 한 다음에 상인에게 팔려나가 양식장에서 일정한 크기로 자라면 사람들의 식단에 올라간다.
  • 부산 >기장군

    부산의 명물로 거듭난 기장 짚불구이 곰장어
    기장 곰장어 짚불구이는 기장 앞바다에서 잡은 먹장어를 짚불에 통째로 구워 먹는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향토음식이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는 곰장어 짚불구이의 원조가 되는 지역으로 곰장어 음식점 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뉴트로 감성이 스며든 다방에서 커피 한 잔

줄줄이 우거진 빌딩들 사이로 오래된 다방 하나가 있습니다. 좁은 계단 끝의 나무문을 열면 종업원이 "어서 오세요!"하며 반갑게 맞아주곤 하는데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황토색 쇼파와 낡은 테이블, 손때 묻은 카운터, 훈훈한 석유난로의 냄새까지. 시간이 멈춘 이 공간에서 잠시, 정겨운 그 시절을 회상하곤 합니다. 검은 빛 쌍화차 사이로 탱글탱글한 노른자가 고소하게 입안에 퍼질 때쯤, 변하지 않은 맛과 향기에 황홀함을 감추지 못한답니다.

"한국전쟁 이후 그 시절이 어렵긴 했어도 예술인들이 모여 시대를 이야기하고 문화를 꽃피운 곳이 다방이였어요." - 을지다방 내용 中
"그땐 단순하게 차를 파는 게 아니라, 약속을 하고 만나는 장소, 전화 연락을 기다리는 장소, 선을 보는 장소로 소통의 공간이었지요." - 봉다방 내용 中

지금의 다방은 세월의 변화 속에서 옛 손님들에게는 추억을 마실 수 있는 공간, 주인은 그러한 추억을 전해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요즘 뉴트로 열풍이 불자 MZ세대들도 하나 둘씩 다방문화를 즐기곤 하는데요. 한 번이라도 다녀간 이들이라면 감성 충만한 이곳의 분위기를 잊지 못해 다시 찾을 수밖에 없게 하는 매력의 공간, 다방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가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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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심지역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생들의 아지트였던 학림다방
    학림다방은 1956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에 이양숙이 개업했고, 1975년에는 강준혁·신선희가 운영하였다. 그리고 1987년 이충렬이 학림다방을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학림다방은 가업으로 이어져 오지는 않았지만, 처음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면서 학림을 기억하는 이를 기다리고 있다. 학림다방은 대학 문화의 산실이며, 저항문화와 대중문화의 산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학림다방은 2013년 서울특별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 인천 >부평구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만남의 장소, 봉다방
    봉다방은 1974년 최정숙이 개업했고,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다방이다. 최정숙은 처음부터 다방을 개업했던 것은 아니고 세탁소를 15년 동안 운영하였다. 오산 출신의 최정숙은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생계의 기반을 다지기는 했지만 직업병으로 손목이 안 좋아지면서 현재의 자리에 다방을 개업하였다. 산곡동은 백마장으로 더 알려져 있는데 ‘제2의 명동’이라 불릴 정도로 유행에 민감했고, 주변에는 군부대와 산곡시장 등이 있는 번화한 거리였다.
  • 인천 >중구

    지식인들의 쉼터였던 레트로 다방, 인천 국제다방
    국제다방은 1972년에 처음 '마음다방'이라는 상호로 윤석례가 신포시장 입구에서 시작하였다. 1979년, 현재 자리의 국제다방을 인수하고 현재까지 영업중이다. 국제다방은 인천 문화예술인들에게는 안식처였고, 그 시대의 다방문화를 간직하며 원래 위치와 간판을 지키고 있는 가게이다. 1980년대 당시 신포동은 40군데가 넘는 다방이 있었다. 지금은 이 국제다방이 유일하다.
  • 대구 >중구

    대구 약전골목의 미도다방
    대구 진골목의 명소 미도다방은 ‘아름다운 도시(美都)’ 속의 다방(美都)이라는 뜻이다. ‘정 여사’로 불리는 정인숙 대표가 지인의 다방을 넘겨받아 1982년부터 30년이 넘도록 운영 중이고, 두 번의 이사 후 지금의 위치인 진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것은 2013년이었다. 미도다방은 대구·경북 지역 출신의 대통령부터 정치인과 유림, 문인, 화가들이 다녀가는 명소였고, 지금도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단골들이 많다. 커피값 2500원, 대구 약령시의 좋은 약재로 직접 달인 약차와 쌍화차도 3~4천원에 마실 수 있다.
  • 서울 >서대문구

    ‘독방’·‘수방’·‘리방’으로 거듭난 독다방
    독수리다방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에 김정희가 1971년 음악다방으로 개업한 찻집이다. 2004년 경영상 어려움으로 폐업을 했다가 2013년 김정희의 손자인 손영득이 재개업하였다. 독다방은 재개업을 하면서 두 가지의 컨셉을 설정하였다. 독다방이 독수리다방으로 개업했을 때부터 들렀던 세대들을 위해서는 그 시절 향수와 추억을 재생할 수 있는 공간으로, 1970·80년대 문화를 알지 못하는 20대들에게는 그 시절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독수리다방이 독다방으로 상호를 바꾸어 재개업하자 언론에서 개업소식을 알릴 정도로 의미가 있는 다방이다.
  • 서울 >중구

    “쌍화차의 노른자는 터뜨리면 안 돼”
    근대의 다방은 예술인들이 모여 시대를 이야기하고 문화를 꽃피웠던 장소였다. 지금은 자판기가 골목마다 서 있고 입맛에 따른 다양한 커피믹스를 쉽게 살 수 있다. 게다가 정수기가 사무실마다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은 다방을 찾지 않고, 커피 배달문화가 사라졌다. 이런 시대에 을지로에서 35년간 쌍화차를 끓이는 집이 있다. 끓인 쌍화액 위에 달걀 노른자를 띄우고 잣과 대추를 쏭쏭 썰어 올리는 쌍화차는 하루 치의 건강이다.
  • 경남 >창원시

    창원(진해) 흑백다방,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한 노포(老鋪)
    진해 흑백다방은 1955년 서양화가 유택렬 화백이 친구가 운영하던 칼멘다방을 인수하여 ‘흑백’이라는 상호로 영업을 시작한 다방이다. 흑백다방은 화가와 문인, 시인 등 수많은 예술인이 출입하는 사랑방 역할을 하면서 문화의 불모지였던 진해의 문화예술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흑백다방은 1999년 유택렬 화백이 작고하면서 피아니스트로 유학 중이었던 둘째 딸 유경아 씨가 2대 주인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2011년에는 지역의 예술가들과 시민단체가 ‘흑백운영협의회’를 결성하면서 흑백다방은 ‘시민 문화공간 흑백’으로 재탄생하였다. 2013년에는 1912년에 건축된 흑백다방 건물이 ‘창원시 근대건조물 4호 흑백다방’으로 지정되었다. 2020년 유경아 씨가 지병으로 별세하면서 흑백다방의 운영은 부녀 2대에서 그치게 되었으나 흑백다방을 사랑하는 시민과 예술가들이 3대 대표로 ‘문화공간 흑백’으로 거듭난 흑백다방을 지키고 있다.

무더운 여름, 서점으로 북캉스 떠나자!

'북캉스'는 북(Book)과 바캉스(Vacance)가 합하여진 단어로, 책을 읽으며 휴가를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북캉스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조용하고 안정적인 휴가를 선호하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코스로 꼽히는데요. 집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곳이나 또는 여행지에 방문하여 서점에서 색다른 북캉스를 즐겨 보는 건 어떠세요? 잠시나마 스마트폰은 내려놓고, 책을 통해 나만의 색다른 감상 시간을 가져보세요. 그리고 어떤 책을 읽어야 좋을지 고민하는 여러분! 지역N문화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서점 이야기를 통해 어떤 책이 좋을지 한 번 살펴보는 걸 추천해 드려요. 이번 여름은 북캉스로 느긋하게 쉬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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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 >중구

    음악과 추억이 깃든 대구 헌책방거리의 ‘월계서점’
    월계서점은 차석규가 1954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개점한 서점이다. 차석규로부터 3대를 지나 현재 서점은 김기철이 운영하고 있다. 월계서점은 헌책뿐 아니라 새책도 구비하고 있다. 대구 헌책방골목에는 월계서점을 비롯한 4개의 서점만 남아 헌책방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 인천 >서구

    평범한 동네서점의 평범한 오늘 - 인천 서구 ‘동아서점’
    동아서점은 인천 서구 마전동에 위치한 작은 서점으로, 2001년 4월 개점한 이래 인근 주민들의 독서 생활과 공부를 책임져왔다. 지금도 주요 품목은 중고등학생들의 학습지와 문제집이지만, 동네서점 에디션이나 노벨문학상 수상작도 발 빠르게 갖추고 있는 서점이다. 온라인 및 대형서점에 밀려 한동안 멀어졌던 동아서점에 오랜만에 방문한 기록이다.
  • 광주 >동구

    골목 끝의 변방과 현장, 광주 동네책방 ‘소년의 서’
    광주광역시 충장로 광주극장 옆골목으로 들어와 굽이굽이 여행하듯 걸어가면 '소년의 서'라는 작은 책방이 나타난다. 인문사회화학예술서점으로 광주 오월 관련 책들, 형제복지원 책, 여성 관련 책들, 연극에 관한 책 등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책들도 진열되어 있다. 2016년에 문을 열었지만 주인장 임인자 씨가 서울변방연극제 예술감독, 형제복지원 생존자 모임 총무 등으로 거리에 나가 있느라 문이 자주 닫혀 있다. 가기 전에 인스타그램으로 확인해보는 게 좋겠다.
  • 충남 >부여군

    이야기가 물든 곳, 부여 송정그림책마을
    충청남도 부여군 송정그림책마을은 2010년에 한국전통문화학교 학생들의 도움으로 부여군 최초의 벽화마을이 되었다. 그러다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그림책 읽는 마을 찻집 조성 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의 컨설팅으로 마을에서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23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엿한 작가로 그림책을 세상에 선보였다. 송정그림책마을의 언덕 위에는 오래된 야학당이 있다. 지금은 비어있지만, 광복 전후로 글을 모르는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친 곳이고, 이 덕분에 지금의 송정그림책마을이 있게 되었다는 상징 같은 곳이다.
  • 서울 >서대문구

    홍익문고, 소중한 것은 시간을 넘어 이어진다
    홍익문고는 박인철이 1957년 노점책방으로 시작하여 1960년 가게를 얻어 개업하였고, 1978년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2번지에 자리를 잡은 가게이다. 2009년 박인철의 아들인 박세진이 암투병 끝에 사망한 아버지의 가게를 이었다. 2012년 신촌일대 재개발로 홍익문고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신촌일대의 주민, 연세대 학생과 동문, 책 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홍익문고 지키기 주민모임’이 결성되면서 홍익문고 자리는 재개발 지정 대상에서 제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대전 >동구

    바다를 건너온 책이 모이는 곳, 해풍사
    대전역전지하상가에 있는 해풍사는 20여년 전부터 오래된 외국 잡지와 만화책, 외국서적 등을 파는 곳이다. 과거에는 무역업자를 통해 책을 수입하고 배달해주는 식으로 운영했다. 그래서 따로 점포 없이 집에서 운영하다, 대전 은행동, 대흥동에서 서점을 운영했고, 20년 전 역전지하상가에 자리를 잡았다. 다양한 서적과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90년대 외국 잡지, 애니메이션 포스터, CD, 비디오테이프, 드로잉북, 연예인 사진, 캐릭터 문구까지 옛 물건들 구경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 인천 >연수구

    25년 2대째 운영 중인 우리 동네 대중서점, 세종 문고
    연수동 상가 골목을 25년 지켜온 우리 동네 서점 세종문고는 2대째 젊은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1층에는 학생들의 참고서가 가득한 가운데 지하 1층으로 내려가야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 단행본들이 놓인 코너가 있다.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과 온라인 서점 그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독립서점 사이에서, 대중 서점으로써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며 운영 중인 우리 동네 대중서점이다.
  • 관심지역 서울 >종로구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고서점, 통문관
    통문관은 1934년 서울특별시 관훈동 37번지에 이겸노가 ‘금항당’으로 개업한 후 1945년 관훈동 18번지에 ‘통문관’으로 상호를 바꾸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통문관은 1963년 관훈동 147번지로 이사하였고, 1969년 옛 건물을 헐고 신축하였다. 1970년 이겸노의 아들 이동호가 가게를 이어받았고, 1982년 이동호의 아들 이종운이 가게를 이어가며 3대에 걸쳐 운영되고 있는 고서점으로 지금은 출판업까지 겸하고 있다.
  • 울산 >울주군

    울산 지역의 첫 서점, 언양 하나서점
    울산광역시 언양읍 농협 옆의 적산가옥에는 울산에서 가장 처음 문을 연 하나서점이 지금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방앗간 자리에 문을 연 이 서점은 이제 언양읍에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동네서점이다. 하루도 문을 닫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위해 자녀의 결혼식날에도 오후에 문을 열었다는 이 서점의 주인장 김충열 씨는 학생들의 참고서를 팔며 학생들의 선도부 역할도 했다. 지금도 명절이면 찾아와 용돈을 건네주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 경북 >영주시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책방, 영주 스쿨서점
    경상북도 영주시의 스쿨서점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자, 여러 개의 ‘최초’ 기록을 가진 서점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김휘용 씨가 영주 읍내에 문을 연 스쿨서점은 2021년 현재 67년의 역사를 지닌 노포이다. 1972년에는 무역사업을 하던 아들 김시태 씨가 가업을 물려받아 2대 대표로 스쿨서점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는 지방 군소도시 단위로는 최초의 복층 서점을 열었고, 서점 최초로 에어컨 설치와 도서 전산화를 추진하였다. 2009년에는 이웃에서 서점을 하던 송태근 씨가 3대 대표로 가게를 물려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다시 여름 바닷가♬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흐르고, 나의 마음은 괜히 조급하기만 하고, 이 여름의 끝에서 잠시 쉬어갈 곳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지금 여기, 바닷가에 오게 되었습니다.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그늘진 바닷가 모래밭에 털썩 앉아 가만히 바다 멍을 해보는데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살랑이며 다가오는 바람, 그리고 탁 트인 바다까지. 화려하진 않아도 자연이 주는 힐링에 괜스레 가슴이 벅차곤 합니다. 바다에 수놓아진 푸른 물결과 잔잔한 파도 소리로 쉼 없이 달려온 우리를 다독여 주는 바다! 멍하니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에도 좋은 바다는 사계절 우리와 함께하지만 여름의 바다가 줄 수 있는 낭만과 힐링은 또 다른 것 같네요. 여름의 마무리는 푸른 윤슬이 아름다운 이곳 바닷가에서 즐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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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강릉시

    주문진 오징어로 유명한 강릉 주문진항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주문진리에 있는 주문진항은 1927년에 개항한 항구이다. 약 350여 척의 어선과 화물선이 드나드는 큰 항구로 6·25 전쟁 당시 미 해군과 북한군이 여기에서 해전을 벌였는데 북한의 군수품을 실은 군함과 어뢰정을 격침시킨 곳이기도 하다. 동해북부선상의 역을 만들려 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터가 소실되어 공사가 중단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동해안에서 갓 잡은 오징어 어판장이 있어 오징어잡이 어선이 찾는 주요 항구이다. 오징어잡이 대형어선은 화물선이 드나드는 주문진항이나 속초항으로만 입항할 수 있어 이들 항구가 주요 오징어 위판장이었다. 주문진 오징어의 명성은 위판장과 연관 깊다. 오징어 이외에 명태, 꽁치, 고등어, 게 등 많은 어물을 잡은 수백 척의 어선이 드나드는 주요 항구이다.
  • 전남 >신안군

    신안 임자도, 아름다운 모래의 섬
    임자도는 오랜 간척의 역사를 갖고 있는 사질토의 섬이다. 임자대교가 완성되어 다리를 통해서 섬에 들어갈 수 있다. 들깨가 많이 나서 임자도라고 불렸지만 현재는 대파가 대표 특산물이며, 젓새우와 민어도 유명하다. 대광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넓은 해변을 갖고 있는 임자도 대표 관광지이다. 어머리해안의 용난굴 설화가 있으며 섬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자전거길과 걷기코스가 있다.
  • 제주 >서귀포시

    토기와 농산물을 육지로 운송하던 제주 사계포
    사계항은 제주특별자치도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 어항으로, 깨끗한 모래와 푸른 바닷물이 어우러져 명사벽계(明沙壁溪)라 하여 사계리라 부른다. 사계리의 작은 포구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인근 도요지에서 생산한 토기와 농산물을 테우에 실어 육지로 운반하던 포구였다. 사계포구 앞쪽 마을은 토기동 또한 토끼동이라 부르며, 토기와 연관된 사계포구도 토기포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1702년(숙종 28)에 그린 『탐라순력도 』에는 흑로포(黑路浦)라 묘사되어 있으며, 흑로포는 ‘검은질개’라는 명칭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인근에는 영주 십경(瀛州十景) 중 하나인 산방굴사(山房窟寺)와 용머리 해안과 낚시터, 바다 건너 형제섬 등이 있다.
  • 경남 >거제시

    자연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거제 장승포항
    경상남도 거제시 장승포동에는 국제 개항장인 장승포항이 있다. 장승포는 거제도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날이 맑으면 바다 건너 일본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 1889년(고종 26년)에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으로 일본 어민이 대거 이주해와 마을을 형성했다. 1930년에 방파제를 쌓으면서 어항과 무역항으로 발전했다. 1965년 6월 개항장이 된 후 인근에 대우조선공업의 옥포조선소가 만들어지면서 크게 발전했다. 부산과 장승포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장승포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연륙되면서 지금은 여객선이 한려수도 해상 관광 유람선을 운행하여 해상 관광 도시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 경북 >울진군

    울진 죽변항, 대게로 유명한 울진 북단의 대표 포구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리에 있는 죽변항은 대나무가 많다 하여 ‘대숲 끄트머리 마을’이라는 뜻으로 ‘죽빈’이라 불렀다. 죽변항구는 1938년에 축항시설을 만들었다. 풍부한 수산자원 덕에 일찍이 시설을 완비한 항구로, 대게와 오징어, 고등어·꽁치·대게·도루묵·가자미 등도 많이 잡히고, 미역의 생산량도 많다. 죽변항에 있는 높이 15.6m 울진 등대도 유명하지만 더 특별한 것은 대게의 생산지라는 점이다. 울진과 삼척 경계의 왕돌짬에서 잡은 울진대게는 영덕대게와 달리 크고, 잘 생기고, 단단해 ‘박달게’라 부른다. 항구 주변에는 10㎞ 정도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 충남 >보령시

    보령 오천항, 잠수부가 키조개를 캐는 유일한 항구
    오천항은 백제와 신라시대에 회이포라는 항구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 고려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어지자 군선을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충청수영을 설치했다. 천수만의 깊숙한 곳에 있어 피항시설이 없어도 안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도 방파제 없이 선착장에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오천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령시의 중심 장시인 광천장이 위치해 있다. 광천장을 오가는 배들이 물때가 맞지 않으면 이 곳에 배를 두고, 걸어가야 했던 마지막 기항지이기도 했다.
  • 전남 >신안군

    자산어보와 홍어로 유명한 신안 흑산도
    검은 섬, 흑산도는 최서남단에 있는 섬이지만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어선들 뿐 아니라 흑산도의 자연환경을 보고 즐기기 위해 오는 사람들도 많고 다른 섬으로 가기 위해서도 온다. 해산물은 풍부하고 그 맛도 좋은데 그 중 제일 유명한 어종은 홍어이다. 예로부터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온 흑산도는 마을마다 당집이 있고, 제를 지냈지만 현재는 거의 사라졌다. 조선시대 유배지로도 유명한 이 섬은 정약용이 자산어보를 쓴 곳이기도 하다.
  • 전남 >여수시

    여수 거문도, 다도해 최남단의 섬
    거문도는 천혜의 자연 항만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탐을 냈던 섬이다. 그래서 아픈 역사도 함께 갖고 있는 섬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도해 남단의 동백이 아름답게 피고 해풍 쑥이 많이 나는 섬으로 더 유명하다. 뱃길로 가야 해서 하늘이 도와야 들어갈 수 있지만 곳곳에 이야기들이 있고 아직은 번화한 관광지 같지 않은 거문도는 조용한 트래킹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섬이다. 낚시를 하기에도 좋은 섬이다.
  • 경기 >화성시

    어촌마을에서 즐기는 바다 체험, 화성 국화도
    국화도는 경기도 소속이지만 충청남도 당진 장고항에 더 가까운 서해의 작은 섬이다. 국화도에는 두 개의 부속 섬이 있는데 이들 섬은 물때에 따라 국화도와 연결된다. 작은 섬이라 많은 주민들이 살지 않고 분교로 있던 학교도 폐교된 지 오래되었다. 선착장 주변과 완만한 경사의 국화도 해수욕장 주변에 펜션과 같은 숙박시설이 여럿 있다. 접근성이 좋고 조용한 섬으로 간단한 트래킹을 즐기러 오거나 낚시를 하러 오는 섬이다.
  • 경북 >울릉군

    동해안 끝자락의 화산섬, 울릉도
    경상북도에 속한 울릉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큰 섬이다. 독도와 함께 동해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이유도 있지만, 워낙 어족 자원이 풍부한 부분도 배제할 수 없다. 정확히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알기 어려우나 중국 측 문헌이나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그 역사만큼은 오래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곳 주민들의 생업은 농업과 어업, 그리고 축산업과 임업도 빼놓을 수가 없다. 오늘날에는 비교적 다양한 방법으로 울릉도를 찾을 수 있는데 한 해 1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울릉도를 찾고 있다.

삼복(三伏)더위 물렀거라~

삼복은 7월에서 8월 사이의 절기로 초복, 중복, 말복을 가리키며 1년 중 가장 더운 기간이라고 합니다. 이때 현대인들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든든한 보양식 한그릇을 하곤 하는데요. 에어컨이 없던 과거에는 삼복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먼저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높은 벼슬을 가진 관직자들에게 빙표를 주며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타가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지냈을까요? 여름 과일을 즐기기도 하고 술과 음식을 가지고 계곡으로 가 발을 담그면서 하루를 즐겼다고 해요. 바닷가 근처 백성들은 이열치열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며 더위를 이겨내기도 했답니다.

복날에 관련한 미신도 있는데요. 바로 '복날에 시내나 강에서 목욕을 하면 몸이 여윈다.' 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복날에는 아무리 더워도 목욕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반대로 초복에 목욕을 했다면 중복과 말복에도 반드시 목욕을 해야한다는 미신도 있었다고 합니다! 복날마다 목욕을 해야 몸이 여위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덥다고 하니 삼복 모두 반드시 목욕을 하며 몸이 여위지 않도록 해보는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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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여름을 즐겁게 해 주는 빙수
    빙수는 얼음을 갈아 설탕, 시럽, 단팥 등을 넣고 먹는 음식으로 더운 여름철에 인기있다. 빙수는 일제강점기에 판매음식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천연빙으로 만들다가 위생적인 문제로 제빙공장의 얼음을 사용하게 되면서 대중화되었다. 당시 빙수가게는 여름 한철 장사로 천막을 쳐 임시가게를 열었다. 밖에는 ‘빙설(氷雪)’이라고 쓴 긴 깃발을 높이 달고 붉은색으로 외면을 장식한 후 실내에는 만국기를 달았다. 빙수가게에 여점원이 많았는데 풍기문란으로 신문에서 지적받기도 하였다.
  • 전국

    독을 품고 있는 고급 어종, 복어
    복어는 독을 품고 있는 어류로 알려져 있긴 하나 고기의 맛이 좋고 풍부한 영양소를 지니고 있으며, 해장으로 최고로 손꼽히는 탓에 복어를 찾는 사람이 많다. 무엇보다 쉽게 맛보기 어려운 탓에 고급 어종으로 대접을 받는 어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복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황복으로, 황색을 띠는 복어인데 까치복과 검복 등과 함께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는 어류 중에 하나다. 복어는 강한 독을 지니고 있을수록 그 맛이 좋다. 어촌 지역에서는 복어를 복날에 즐겨먹는 보양식으로 이용한다.
  • 전남 >완도군

    뱃사람의 해장국, 완도 전복물회
    강원도의 속초물회, 제주도의 자리물회, 포항물회 등 바다를 끼고 있는 전국의 해안 도시에는 저마다의 물회가 있다. 지역에서 잘 나는 횟감을 초장을 푼 육수에 말아 먹는 물회 한 접시는 곧 그 지역의 얼굴마담인 셈이다. 전복의 고장 완도에는 전복을 횟감으로 썰어내 말아 먹는 전복물회가 있다. ‘뱃사람의 해장국’이라는 별명을 가진 물회, 시원하면서 달콤새콤한 맛이 무더위를 싹 날려준다.
  • 전북 >고창군

    보양강장식품의 대명사, 고창 풍천장어구이
    풍천장어구이는 전라북도 고창군의 인천강(仁川江)의 하구에서 잡은 뱀장어에 고추장소스를 발라 구운 고창군의 향토음식이다. 인천강 하구에서 잡은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하는데, 일반 뱀장어에 비해 육질이 단단하고 영양가가 높아서 맛도 휠씬 고소하다.
  • 광주 >광산구

    용과 봉황의 기운으로 더위를 물리친다, 광산 용봉탕
    용봉탕은 상상의 동물인 용(龍)을 상징하는 자라와 봉황(鳳凰)을 상징하는 닭을 재료로 하여 끓여낸 여름철 보양식으로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향토 음식이다. 용봉탕은 이름 자체만으로 길하고 복된 음식이며 궁중음식에서 유래되었다.
  • 경남 >양산시

    경상남도 양산 지방의 여름철 보양식, 애호박죽
    애호박죽은 물에 불린 멥쌀에 애호박과 바지락살을 넣고 장국에 끓인 죽으로 경상남도 양산시의 향토음식이다. 양산의 애호박죽은 바지락조개의 조갯살을 이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경상남도 양산시가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조개나 멸치 등 해산물을 구하기 쉬웠던 지리적 조건이 작용한 것이다.
  • 전남 >목포시

    최고의 여름 보양식, 민어탕
    민어탕은 맑은장국에 민어 토막을 넣고 끓인 국이다. 여름에 가장 맛이 오르는 민어로 끓인 민어탕은 복날 보신탕 대신 먹었던 보양식으로도 유명한 향토 음식이다. 옛날에는 인천 앞바다가 민어의 주요 산지였지만 현재 민어는 북상하는 어군이 많지 않아 대부분 전남 해안에 머물고 있다.
  • 서울 >중구

    서울 최초의 전문 삼계탕집, 고려삼계탕
    고려삼계탕은 1960년 이상림이 명동에 개업한 삼계탕 가게이다. 삼계탕 전문의 고려삼계탕은 서울특별시 최초의 전문점으로, 2005년부터 아들인 이준희가 운영을 이어오고 있다. 고려삼계탕은 1976년 서소문으로 장소를 옮겼다가 1978년 현재의 위치로 터를 옮겼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연속으로 미쉐린가이드에 등재된 맛집인 고려삼계탕은 프리미엄 한식 HMR 브랜드 ‘진지(Jin-ji)’의 상품으로 개발되어 온라인 판매도 이루어지고 있다.
  • 관심지역 서울 >종로구

    젊음을 되찾게 해주는 흑임자죽
    흑임자죽은 검은깨(黑荏子)와 쌀을 섞어서 끓인 죽이다. 향미가 독특하고 열량이 높으며 소화가 잘되고 보양음식으로 많이 쓰인다. 검은깨를 찹쌀과 함께 갈아 만드는 흑임자죽은 신라의 화랑들이 몸과 마음을 가꾸기 위해 즐겨 먹었던 죽이라고 전해진다. 검은깨의 레시틴이라는 주성분은 몸의 신진대사를 조절하고 기억력과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 서울 >마포구

    조선시대 후기 얼음장사꾼 장빙업자
    장빙업자는 얼음을 팔아서 돈을 벌던 사람들을 말한다.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얼음에 대한 관리를 서빙고, 동빙고, 내빙고를 통해 조정에서 전면적으로 관장했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서 얼음의 민간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조정의 허가를 받은 후 얼음을 채취하여 조정에 공급하던 빙계 등이 등장했다. 이중 장빙업자는 조정과 관계없이 사적으로 얼음을 채취‧보관해서 판매해서 돈을 벌었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의 빙고는 사빙고라고 했다. 나라에서 관장했던 서‧동빙고 및 내빙고가 1898년 폐지된 반면 사빙고는 이후로 50여 년은 더 유지됐다.

조상님들의 태양 피하는 법

7월 7일은 작은 더위라 불리며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소서입니다. 에어컨, 손선풍기 등으로 더위를 식힐 때 과학기술의 발전에 감사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에는 이 더위를 어떻게 피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여름만 되면 피하기 바쁜 이 더위! 조상님들은 어떻게 여름을 지내왔을지 함께 알아볼까요?

잠깐의 외출에도 쉽게 땀이 차는 요즘, 등등거리와 등토시를 입으면 땀이 차는 걸 방지할 수 있답니다! 등등거리와 등토시는 등나무 줄기를 가늘게 쪼개서 만든 옛 여름옷으로, 속옷 안에 입어 옷이 피부에 닿지 않게 하여 쾌적한 생활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도 사용되는 죽부인은 대나무를 쪼개 얼기설기 엮어 만들었는데, 오늘날 바디필로우와 같은 물건입니다. 여름에 안고 자면 그렇게 시원하다네요!

또한, 한국 고유의 집 구조를 보면 대청마루가 있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으로 쓰인 대청마루를 보면 높은 지붕이 찬 기운은 아래로 향하게 하고 더운 공기는 위쪽으로 이동하게 하였답니다. 지금처럼 에어컨, 선풍기가 없던 그 시절에도 조상님들은 지혜롭게 태양이 내리쬐는 햇빛을 피하고 있었네요~

우리도 올여름 무사히 이 더위를 잘 이겨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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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한여름 무더위에 껴안고 자는 죽부인
    죽부인은 대나무로 엮어 만든 침구의 하나로 무더운 여름밤에 끼고 자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피서용 생활도구이다. 주로 남성들이 끼고 잤기 때문에 인격화하여 ‘죽부인’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생전 사용하셨던 죽부인도 모시고 같이 제사를 받게 하였다.
  • 전국

    여름을 즐겁게 해 주는 빙수
    빙수는 얼음을 갈아 설탕, 시럽, 단팥 등을 넣고 먹는 음식으로 더운 여름철에 인기있다. 빙수는 일제강점기에 판매음식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천연빙으로 만들다가 위생적인 문제로 제빙공장의 얼음을 사용하게 되면서 대중화되었다. 당시 빙수가게는 여름 한철 장사로 천막을 쳐 임시가게를 열었다. 밖에는 ‘빙설(氷雪)’이라고 쓴 긴 깃발을 높이 달고 붉은색으로 외면을 장식한 후 실내에는 만국기를 달았다. 빙수가게에 여점원이 많았는데 풍기문란으로 신문에서 지적받기도 하였다.
  • 전북 >전주시

    여름철 선물인 부채를 만드는 선자장
    선자장은 부채를 만드는 장인이다. 부채는 우리 조상들이 한여름을 보내는 데 필요한 필수품이었다. 여름이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단오를 맞아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우리나라 부채는 형태상으로 크게 둥근 모양의 부채와 접고 펼 수 있는 접부채로 나뉜다. 접부채 가운데 합죽선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공예품이다.
  • 제주 >제주시

    다섯 번만 먹으면 무더위 보약 필요없는 자리돔 물회
    자리라고도 부르는 자리돔은 도미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5월부터 8월까지 제주도 연안 등지에서 잡히며, 6월에서 7월 중순 사이에 많이 식용한다. 제주에서는 "자리물회 다섯 번만 먹으면 무더위 보약이 필요없다"라고 할 정도로 여름철의 주요 반찬이었으며 제주도를 대표하는 전통향토음식 중 하나이다.
  • 충남 >서천군

    여름용 전통 직물 한산 모시짜기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저마를 이용해 짠 전통 직물이다. 한산모시는 품질이 우수하고 섬세하기로 유명하였다. 모시도 여름 옷감으로 이름이 나면서 오일장에서도 판매하였다. 모시 짜기는 모시실 만들기와 베 짜기로 이루어진다. 1967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전국

    추위나 더위를 막기 위해 팔목에 끼는 토시
    토시는 팔목에 껴 추위나 더위를 막는 물건으로 ‘토수’라고도 한다. 원래는 남자들만 착용하였으나 점차 여자들도 착용하게 되어 조선시대 남녀노소 모두가 사용한 치레거리로 자리잡았다. 토시의 형태는 저고리 소매와 비슷하다. 한쪽 끝은 좁고, 다른 쪽은 넓다. 그래서 이를 봉재할 때는 버선처럼 4겹 박음질을 하고, 좌우 구분이 가능하게 만든다. 토시의 종류는 계절마다 소재와 형태가 달라 다양하였다. 토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외국에서 들어온 셔츠나 장갑과 같은 서양의복에 의해 차차 사라졌다. 1950년대 후반에는 노인들 일부만 사용하였으며 현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오늘날에도 등토시는 모시 한복에 받쳐 사용하기도 한다.
  • 전국

    치마 안에 입던 여름용 홑바지, 살창고쟁이
    살창고쟁이는 조선시대 부녀자들의 치마 안에 입던 속옷으로 여름용 홑바지인 고쟁이 중 하나이다. 살창고쟁이의 형태는 허리말기 아래, 허리둘레를 따라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구멍의 크기는 대략 6~8cm 폭에 15~20cm 길이로 직사각형 구멍을 10개 이상 내고 구멍의 개수는 바지마다 다르다. 살창 부분을 재단한 후 가장자리를 2~3cm 접어 감침질로 가장자리의 삼베 올이 풀리지 않게 정리하고 허리말기를 달았다. 살창고쟁이는 밑이 트인 바지인 개당고(開襠袴)이며 주로 뒤쪽이 트여 있었으며, 간혹 허리말기만 흰색 모시로 만들기도 하였다. 살창고쟁이는 여름에 시원하게 입을 수 있는 실용성과 신부가 갖출 수 있는 예의범절, 그리고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우리 전통 옷이다.
  • 강원 >태백시

    탄광의 선풍기
    탄광에서도 선풍기를 많이 사용하는데, 일반 가정에서처럼 단순하게 더위만을 쫓으려고 사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탄광의 갱내에는 지열로 인해 더울 뿐만 아니라 미세한 탄가루가 갱내를 혼탁케 하므로 시원하고 맑은 바람의 유입과 더불어 혼탁한 갱내 공기를 갱 바깥으로 내보내야 한다. 이렇듯 맑은 공기를 받아들이고 탁한 공기를 내보내는 데 사용하는 기계가 선풍기와 후앙(환풍기)이다.
  • 제주 >제주시

    제주의 무더위를 식혀준 철갈이 음식, 보리개역
    개역은 미숫가루의 제주방언으로 보리개역은 볶은 보리를 맷돌에 갈아 미숫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 마시거나 밥에 비벼 먹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지역의 향토음식이다. ‘개역’은 미숫가루의 제주 방언으로 볶은 보리나 콩 따위를 갈거나 빻아서 만든 가루 음식물을 말한다.
  • 경북 >영덕군

    온돌과 마루가 공존하는 영덕 농아당 고택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에 위치한 농아당 고택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무관(武官) 박홍장(朴弘長)의 집이다. 1570년(선조 3)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1720년(숙종 46)에 일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안채만이 남아 있다. 무관 박홍장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왜란을 수습하는 책무를 맡고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인물이다. 안채는 정면 세칸 반, 측면 두 칸의 겹집에 팔작지붕을 얹었고, 북부지역의 온돌형과 남부지역의 마루형이 혼합되어 있다.

옛적에 신던 여름 신발, 나막신

'딸깍딸깍'

어? 무슨 소리죠? 아하, 나막신이 바닥과 부딪혀 나는 소리인 것 같아요! 여러분은 나막신을 신어본 적이 있나요? 요즘 신발은 대부분 천과 가죽으로 만들어져서 나막신처럼 나무로 만든 신발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1910년 이후 등장한 고무신의 영향으로 나막신은 차츰 설 자리를 잃어버리다 1940년대 전후로 사라졌거든요. 나막신은 원래 조선시대 말기에 짚신과 함께 대중적으로 신는 신발이었다고 해요. 가죽신이 비싸서, 비오는 날 진흙이 되어버린 땅에서 신기 위해 쓰였다고도 합니다.

나막신에 대해 알아보니 과거에 또 어떤 신발들을 신었는지 궁금해지지 않나요? 삼국시대 이전에는 풀과 가죽으로 만든 이(履)와 화(靴)라는 신발을 신었다고 해요. 조선시대 양반가 부녀자들은 앞코와 뒤축이 장식된 낮은 높이의 신발인 당혜를 신었다고 합니다. 또 미투리라는 질 좋은 짚신이 있었는데요. 이는 삼이나 모시, 노끈을 엮어서 만들었다고 해요. 정말 다양한 신발들이 있었죠?

주룩주룩 비가 오는 날, 혹은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 여러분은 어떤 신발을 신으시나요? 신발 젖을 걱정 없는 장화나 통풍이 잘되는 샌들을 많이 신으실 텐데요. 장화와 샌들을 신을 때 과거 조상님들이 신었던 나막신도 한번 떠올려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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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비오는 날 신는 나막신
    나막신은 비 오는 날 진흙땅에서 신기 위해 한 덩어리의 목재를 깎아 만든, 굽이 높은 신발이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의 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비가 올 때는 물론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에도 신었다. 1910년 이후 고무신이 등장하자 경쟁에서 밀려 1940년대를 전후하여 거의 사라졌다. 
  • 전국

    삼 ·모시 ·노 등으로 삼은 신, 미투리
    미투리는 짚신 중에서도 질이 좋은 것으로, 삼(麻)이나 모시, 노끈 등을 엮어 만든다. 미투리는 선비들이 나들이할 때 신던 것으로 미투리 중 섬세한 제품은 사대부들이 주로 신었다. 미투리는 형태로 보면 신목이 낮은 신발의 총칭인 이(履)의 일종이다. 미투리는 흔히 날이 여섯 개나 여덟 개였으며, 아주 정교한 총(미투리의 앞과 옆을 이루고 있는 올) 50~60개로 이루어졌다. 원래 미투리는 삼으로 만들었는데 점차 모시, 노끈, 닥나무 껍질, 칡넝쿨이나 종이와 무명실 등의 좋은 재료로 섬세하게 엮기도 하였으며 왕골이나 부들로 만든 미투리는 염색하여 무늬를 넣어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투리는 짚신보다 튼튼하여 양반층과 서민들이 고급 신발로 취급하였다.
  • 전국

    비 오는날 또는 진 땅에서 신는 신발, 나막신
    나막신은 비오는 날 진 땅에서 신기 위하여 통나무를 파서 깎아 만든 굽이 높은 신이다. 나막신은 나무로 신발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두껍고 큰 목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은행나무·오동나무·피나무·소나무·오리나무처럼 제작이 쉬운 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들었다. 목재의 겉이 마르지 않도록 기름을 칠하기도 했다. 나막신은 신분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신었다. 굽이 높아 비에 젖어 질어진 땅을 걸어다니 좋았으나, 무겁고 활동성이 떨어져 먼 길을 가거나 말을 탈 때는 착용하지 않았다. 맑은 날에도 많이 신었으며, 굽이 닳으면 새 굽을 바꿔 달았다고 한다. 나막신은 이처럼 널리 신겨지다가 1910년 이후 등장한 고무신으로 인해 차츰 설 자리를 잃어버려 1940년대를 전후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 전국

    구름무늬가 새겨진 신발, 운혜(雲鞋)
    운혜(雲鞋)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부녀자가 신는 신으로 신코[신발 앞쪽의 뾰족한 곳]와 뒤축[발 뒤쪽의 둥그런 부분 중 두둑한 맨 뒤쪽의 가운데]에 다른 색의 무늬를 장식한 신발이다. 신발 바닥에 짐승 털로 만든 조각인 담(毯)을 깔아 따뜻하다는 의미에서 ‘온혜(溫鞋)’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신발의 앞쪽 모양이 제비의 부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제비부리 신’이라고도 불린다. 운혜는 앞코에 죽엽문(竹葉紋)을, 뒤축에는 굼벵이 형태의 장식을 붙여서 마무리한다. 이러한 형태는 개화기 개발된 고무신에 그대로 반영되어 최근까지 그 형태를 유지해왔다. 운혜는 화려하고 조화로운 색감과 날렵한 곡선 형태가 어우러져 한국적 미의 아름다운 외양을 나타내고 있다.
  • 전국

    조선시대 양반가 부녀자들의 신발, 당혜
    당혜(唐鞋)는 조선시대 부녀자가 신던 가죽신으로, 당초문(唐草文)으로 앞코와 뒤축을 장식한 낮은 높이의 신발이다. 조선시대 여자의 신으로는 당혜⸱온혜(溫鞋) 등이 있었는데, 당혜는 좋은 집안인 양갓집 부녀자가 신었고 온혜는 일반 백성 집안의 부녀자가 신었다. 중국 당나라에서 통일신라시대 무렵 들어와 조선시대 말엽까지 신었으며 ‘당혜’라는 명칭은 당초문(唐草紋) 장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혜의 일반적인 형태는 남자용 신발보다 앞코가 더 뾰족하게 올라가 있다. 또한 현대의 고무신처럼 신울의 간격이 좁아 오랫동안 신고 걷기는 불편하였다. 그리고 신발의 오른쪽, 왼쪽의 구별이 없었다. 당혜의 신코에서 뒤축으로 이어지는 곡선의 아름다움은 당혜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다른 나라의 신발과는 구별되는 조선시대 특유의 형태적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 서울 >송파구

    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화혜장
    화혜장은 전통 신발을 만드는 장인이다. 조선시대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갖신’을 신었다. 이러한 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이 ‘화혜장’이다. 전통 신발 제작은 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수십 번의 제작공정을 거쳐 이루어질 만큼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가 요구된다.
  • 전국

    남방계와 북방계의 신발, 이(履)와 화(靴)
    이(履)는 신목이 짧은 신의 총칭으로 신발의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며, 남방족계의 신이며, 화(靴)는 장화와 같이 신목이 높이 달린 신으로 방한, 방침에 적당하여 무풍적인 북방계의 신이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두 종류의 신을 혼용하여 착용했기 때문에 먼저 생긴 신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고유 복식이 북방호복 계통이므로 고유의 신은 목이 긴 화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삼국 이전에는 이미 풀과 가죽을 이용한 신을 신었으며, 부여의 초탑, 마한의 초갹, 초갹답, 초리 같은 다양한 신의 종류를 바탕으로 삼국시대의 신발이 발달하였다.

소름이 쫘악 무서운 귀신 설화

무서운 이야기들로 가득한 여름입니다. 극장가에는 공포 영화들이 개봉하고 괴담이나 귀신 목격 이야기 등이 인터넷상에서 떠도는데요. 여름의 더위를 한방에 없애고 싶은 분들에게 지역N문화에서 귀신 설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다 듣고 나면 어느새 추위에 덜덜 떨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귀신은 처녀귀신, 물귀신, 객귀 등이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몽달귀신은 장가도 들지 못한 채 죽어 사람들을 괴롭히고 병들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몽달귀신이 달라붙으면 멍석, 삼태기 같은 것을 사람의 머리에 덮어씌웠다고 합니다.

병을 일으키는 잡귀인 호구신은 천연두를 앓게 만들며 '손님'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손님이 들어오면 마을의 모든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극진히 대접하고 굿을 벌여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고 합니다.

타살령은 소, 개, 돼지 등 사람들 탓에 억울하게 죽은 동물의 원령입니다. 타살령은 원한이 강해 타살이 낀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어져 굿판을 통해 타살령을 위로하여 천도했다고 합니다.

원한으로 인해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이라니 생각만 해도 무서운데요. 귀신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찾아온다고 하니 귀신 이야기를 할 때는 소곤소곤 조용히 말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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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여러 형태의 잡귀잡신들
    마을주민들이 마을신으로 모시는 신들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신이 바로 잡귀 잡신이다. 이들 신은 일반적인 신과 달리 일정한 형식을 갖춰 모셔지는 게 아니라 그 신의 부차적인 측면에서 위하는 게 특징이다.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정상적인 조상으로 자리 잡지만, 비정상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정상적인 조상이 되지 못하고 잡귀잡신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잡귀는 신들의 서열상 최하위에 속한다. 조상과는 달리 잡귀잡신은 저승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정처 없이 저승을 떠돌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원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위험한 존재로 여겨진다. 잡귀는 대개 보통 때는 사람들에게 천대를 당하고 꺼려지는 대상이지만, 사람들이 그들의 힘을 필요로 할 때에는 잠시 대접을 받는데 그럴 때는 잡신(雜神)으로 받들어진다. 이러한 신들은 무척 다양하다. 잡귀는 일정한 성격을 독특하게 지니지 않은 온갖 잡스런 귀신 일체를 통틀어서 부르는 말이다. 잡귀 속에는 객귀와 영산, 상문 등의 귀류(鬼類) 일체를 포괄하기도 한다. 그래서 귀류와 하등신(下等神)들을 싸잡아서 잡귀잡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 울산 >남구

    춤추고 노래하며 역신을 물리친 처용
    헌강왕이 냇가에서 쉬다가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것을 보고 근처에 절을 세우라 명하니 구름과 안개가 걷히었다. 동해 용왕이 조화를 부린 것이었는데 왕의 명을 듣고 기뻐서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왕에게 감사 인사를 하였다. 그 중의 한 아들인 처용은 왕을 따라가서 보필하였는데 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처용의 아내를 사모한 역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여 밤에 몰래 동침하였다. 이를 본 처용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자 역신은 사죄하며 처용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만 보아도 그곳에 들어서지 않을 것이라며 떠났다. 이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좋은 일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 전국

    귀신아 물렀거라! 동짓날에 먹는 팥죽
    팥죽은 팥을 삶아 으깨어 거른 물에 쌀을 넣고 쑨 죽이다. 주로 겨울철 동지(冬至)에 귀신을 쫒는다는 의미로 먹는 전통음식이다.
  • 서울 >광진구

    권력도 잡고 귀신도 막는 문고리
    문고리는 문에 달려 있어서 사람 손이 가장 많이 닿는 것으로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어야 했다. 문고리의 구조는 고리와 사슬, 배목으로 되어 있다. 문고리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낙랑시대 유적에서도 청동으로 된 문고리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그 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다. 문고리는 손잡이 역할과 잠금 장치 역할을 동시에 한다. 문고리에는 무서운 형상도 있는데, 부정한 것을 쫓아냄으로써 집안의 평안과 건강을 기원했다.
  • 전남 >목포시

    기지를 발휘하여 병귀신을 무찌른 어부
    전라남도 목포에 전해지고 있는 병귀신에 얽힌 설화는 한 어부가 그물을 던져 놋쇠 병을 건져 올렸는데, 그 병에서 마왕이 나와 어부를 죽이려고 하나 이때 어부가 기지를 발휘해 다시 마왕을 병 안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설화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설화로 목포지방에는 이 설화와 관련된 ‘귀신 물리기’라는 풍속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 경기 >광명시

    처녀 귀신의 원한을 풀어주고 부부애를 깨달은 덕쇠
    경기도 광명시에는 도덕산이 있다. 이 산은 옛날 사신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도(道)와 덕(德)에 관하여 논했다고 하여 ‘도덕산’이라 불렸다고 하며, 그에 관한 다른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는 덕쇠가 죽은 처녀와 결혼하여 한을 풀어준 후 부부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 전북 >정읍시

    귀신 붙어 물을 퍼내지 않은 정읍시 북면의 신방죽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 용호동에 신방죽 또는 신지(神池)방죽 등으로 부르는 방죽이 소재해 있다. 신방죽이 소재해 있는 정읍시는 대부분 지역이 해발고도 50m 미만의 구릉지와 평야 지대다. 옛날 신방죽은 물고기가 많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해부턴가 물을 퍼내서 물고기를 잡으려 하면,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다. 하루는 큰 붕어에 실을 묶어서 방죽 안에 풀어 놓았다. 그리고 방죽의 물을 퍼냈는데, 다른 물고기는 물론 실로 묶어 두었던 붕어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실패에 연결된 실을 당겨보았다. 그랬더니 실이 방죽을 벗어나 앞 산골짜기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산골짜기에서 실에 묶은 붕어가 땅에 박혀 있었다. 이를 귀신이나 도깨비의 장난이라고 믿게 되었다.
  • 경기 >여주시

    저승사자 친구 덕에 아들 살린 신숭겸
    중국으로 사신을 가던 신숭겸이 저승에서 마마의 직분을 맡은 친구를 만난다. 신숭겸은 저승사자에게 자신의 외아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신숭겸은 저승사자가 자신의 외아들을 잡아가고 있음을 눈치챈다. 신숭겸은 친구 간의 의리를 내세워 저승사자에게 아들을 살릴 방법을 알아낸다. 국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집안은 외아들이 죽었다고 난리가 난다. 신숭겸은 친구가 알려준 대로 찔레나무를 구해다가 아들의 종아리를 때린다. 아들의 영혼이 육체로 돌아와 살아났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 경남 >거창군

    뱀이 된 처녀의 원한을 풀어준 경상남도 거창의 사동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월계리에 ‘학동(學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서쪽 300m되는 산에 흰 바위가 있어 ‘백암(白岩)’이라 하다가, 서당골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해서 ‘학동’으로 지명이 바뀐 것이다. 한편 예전에는 ‘배움골’을 ‘배암골’로 말하고, ‘사동(蛇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 근처에 ‘그슬린 바위’, ‘귀신바위’ 등으로 부르는 바위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바위에서 피리 소리가 나고, 피리 소리를 따라간 사람들이 시체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한 젊은이가 피리 소리가 나는 날 바위로 갔다가 뱀이 된 처녀의 원한에 대해서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원한을 마을 주민들과 함께 풀어주었다.
  • 전국

    예로부터 귀신을 쫓는 붉은 곡식 팥
    팥은 밭에서 심어 기르는 덩굴성 한해살이풀이다. 열매는 식용한다. 팥은 요리를 하면 독특한 붉은색을 띄어 제사떡이나 동지 팥죽 같이 나쁜 귀신을 물리치는 상서로운 것으로써 우리의 전래 의식 속에서 함께 지내 온 농작물로 여겨졌다.

철도의 역사와 문화

6월 28일은 철도의 날로 교통수단인 철도의 가치를 높이고 철도 종사자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제정된 날입니다. 철도의 날은 본래 1899년 9월 18일 한국에서 최초로 개통한 경인선을 기념하기 위해 1937년부터 지정하여 유래했는데요. 그러나 1937년은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 아픔을 겪은 시기로, 철도 노동자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일본 황제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강요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겪게 됩니다. 그러한 연유로 2018년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국(의정부 공무아문 철도국) 창설 날짜(1894년 6월 28일)에 맞추어 이날을 철도의 날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2024년 철도의 날은 1894년 6월 26일 이래 130주년이 되었습니다. 1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철도 역사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데요. 철도의 날을 맞아 낭만적인 감성과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기차를 타고 우리 지역에 남아있는 철도를 따라 역사와 문화를 엿보러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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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고양시

    구 역사(驛舍) 일산역. 사람의 길이 열린다
    고양일산역(高陽一山驛)은 2006년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국가 등록문화재 제294호 지정되어 한국철도공사에서 관리·보호되는 장소이다. 1933년에 지어진 것으로 ―자형 평면 구조에 십자형 박공지붕(배 집 양편에 八자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을 얹었다. 일산역은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철도 경의선의 중심역이며 경의선 역사 중 유일하게 남겨진 곳으로 일제강점기 철도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 전남 >곡성군

    섬진강을 따라 흐르는 철로 - 구 곡성역사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구 곡성역은 1933년 전라선 철도 남원~곡성 구간이 개통되면서 역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섬진강 모래를 실어 전국으로 보내는 역할이 주된 임무였다. 1937년 전라선이 호남선 익산역에서 전라남도 여수역까지 전 구간 개통되면서 여객 수송도 늘어났다. 호남지방 동부의 유명한 명승지를 거쳐 가는 노선이었고, 이용 인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라선은 1980년대 말부터 복선화가 진행되었다. 곡성군을 지나가는 부분은 섬진강 흐름을 따라 구불구불했으나, 직선으로 철로를 이설하면서 1999년 곡성읍에 새로운 역이 생겨 이전 곡성역은 구 곡성역이 되었다. 곡성군과 코레일은 2004년 구 곡성역이 등록문화재가 되면서 적극적인 활용 사업을 진행해 2005년 ‘섬진강 기차마을’을 개장했다. ‘섬진강 기차마을’은 폐선로를 이용한 레일바이크와 증기기관차 운행을 비롯해 국내 최다 장미 품종을 갖춘 장미원 조성까지 성공적인 철도 테마파크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 대구 >동구

    한국 근대철도의 달빛, 대구 구 반야월역사
    대구광역시에서 경상북도 영천과 경상북도 포항으로 가는 길목에 반야월이라 불리는 지역이 있다. 반야월은 공식 지명이 아니지만 후삼국 시대부터 전해지는 전설로 유명한 지명이다. 1917년 대구~하양 간 협궤 선로가 놓이면서 기차가 반야월을 지나가게 되었다. 반야월역사는 1938년 협궤가 광궤로 확장 개통될 때 건립되었다. 대구선 반야월역은 반야월 주민들의 통근과 통학로인 동시에 화물을 수송하는 중요한 역이었다. 1960년 화물전용 홈이 개설되었고, 1971년부터는 안심 지역의 석탄저장소이자 수송 역이 되었다.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박공이 돋보이는 반야월역사는 일제강점기 후반 남부지방의 표준 역사로 꼽힌다. 대구선이 이설되면서 반야월역은 2008년 폐쇄되었으나, 2010년 인근 대구선 반야월 공원 내로 이전 복원되었다.
  • 강원 >원주시

    레일바이크가 들어선 간현역과 간현유원지
    강원도 원주 간현유원지는 1970~90년대 대학생들의 MT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서울 청량리 역에서 중앙선 기차를 타고 올 수 있었다. 2011년 중앙선 간현역이 폐쇄되면서 2013년 간현역에서 판대역까지의 6.5Km에 레일바이크가 운영되고 있다. 또한 간현관광지 내 소금산 등산로 입구에서는 소금산 출렁다리를 건널 수 있다. 섬강 위 100m 상공에 설치되어 하늘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다리는 한국인이 꼭 가봐야할 한국관광명소 100선에 선정되었다.
  • 강원 >철원군

    금강산으로 이어주던 길, 철원 금강산 전기철도 교량
    상류계층의 전유물과 같았던 관광은 대량운송을 가능하게 한 철도의 등장으로 보다 넓은 계층에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관광은 특정 계층만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였는데 본디 아름다운 것을 듣고 보고 싶은 것은 사람으로서 가지는 본성이었다. 특히 금강산은 평민들도 꼭 가보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관광지였다.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철원과 금강산 내금강을 잇는 금강산 철도와 금강산 전기철도 교량이 만들어지면서 기차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금강산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금강산 관광은 보다 활성화되었다. 금강산 전기철도 교량은 1950년대 남북이 분단되면서 사용을 멈췄지만 기차를 타고 금강산 가던 시절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 관심지역 경기 >수원시

    근대 철도의 역사를 간직한, 수원역 급수탑
    수원역에서 남쪽방향으로 내려가다보면, 일제강점기 시절 옛 증기기관차의 급수를 하던 급수탑 두 개를 만날 수 있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급수하던 시설물을 말하는데, 수원은 주요 간선의 중심이자 수원천이 흐르는 지역으로, 급수탑을 설치하기에 적합한 도시였다. 현재, 급수탑은 준철도 기념물 제 15, 16호로 등록 보존되고 있으며, 그 주변 산책길이 조성돼 시민들에게 근대 철도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 대전 >동구

    ‘대전발 0시50분’의 추억, 구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보급창고 3호
    구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보급창고 3호는 전후복구 시기인 1956년 지어졌다. 대전역은 1905년 개통된 경부선, 1914년 전 구간 운행을 시작한 호남선이 분기하는 철도의 중요 거점이다. 대전역에는 기차를 수리하고 정비하는 큰 열차 검수 차고가 있었다. 대전역 동광장 쪽에 세워졌던 창고들은 잇따라 철거되었지만, 보급창고 3호는 여전히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서 있다. 목조 트러스 구조에 목재 비늘판벽을 두른 보급창고 3호는 산업화 시대를 지킨 철도 시설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 경기 >연천군

    연천의 랜드 마크, 연천역 급수탑
    연천역 급수탑은 1914년 경원선 전 구간이 완공되면서 경원선의 유일한 급수탑으로 건립되었다. 처음 세워진 급수탑은 상자형이었고, 1930년대 들어 높이가 3배인 원통형 급수탑이 더 만들어졌다. 2기의 연천역 급수탑은 일제 강점기 이래 연천의 명물이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하얀색 급수탑이 폭격 좌표를 잡는 지상의 ‘랜드 마크’ 구실을 하기도 했다.
  • 강원 >삼척시

    도계역 급수탑
    도계역 급수탑은 강원도 삼척시 도계역 구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1940년 영동선이 개통하면서부터 도계역을 경유하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해주던 시설물이다. 1940년 영동선이 개통된 이후 증기기관차는 30년 동안 도계역에 들어서면 10~30분 정도 정차해서 이 급수탑을 이용해 물을 보충했다. 문화재청은 도계역 급수탑을 2003년 1월 28일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46호)으로 지정하였다.
  • 강원 >태백시

    철도는 탄광도시 발전의 은인
    태백선과 영암선의 철도 개설은 석탄산업을 발전시키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이 철도망을 통해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탄광도시인 태백과 도계지역의 본격적인 발전이 가능했다. 태백시에 기차역이 8개나 있었고, 삼척시에 기차역이 13개나 있었던 것은 석탄수송과 관련이 있다. 철도는 석탄산업 발전을, 석탄은 우리나라 모든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식을 원한다면 정답은 부산

어느덧 6월의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들 슬슬 여름 바캉스를 준비할 시기가 되었죠? 여러분들은 바캉스하면 어느 곳이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저는 부산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시원한 바다와 먹거리가 가득한 도시 부산! 오늘은 맛난 음식들이 가득한 부산의 매력에 빠져볼까요?

우선 부산하면 해산물을 빼놓을 수 없죠. 바닷가에서도 도심에서도 싱싱한 제철 해산물을 맛볼 수 있습니다. 종류도 다양한 싱싱한 해산물의 색다른 풍미를 부산에서 즐겨 보세요! 다음 음식은 바로 돼지국밥입니다. 에피타이저로 소면 말아 호로록하고, 부추와 새우젓으로 간 맞춰 한 숟갈 뜨면 고기 반, 국물 반 믿을 수 없는 그 양에 놀라게 될 거예요. 돼지국밥을 먹어 봤다면 투박하지만 강렬한, 소박하지만 담백한 그 맛을 잊으실 수 없을 걸요? 마지막 음식은 밀면입니다! 국수보다는 쫄깃하고 냉면보다는 부드러운 면에, 취향에 맞게 물밀면과 비빔밀면 중에서 선택해 후루룩 맛보면 누구든 그 맛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렇게 부산의 음식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이 세 가지 음식 말고도 낙곱새, 씨앗호떡, 동래파전 등등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하답니다! 이번 여름 바캉스는 맛있는 부산, 미식의 도시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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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중구

    서역의 음식에서 부산의 명물로, 부산 씨앗호떡
    매년 겨울, 노상에서 호떡을 기름에 지글지글 지지는 것을 볼 때면 이렇게 한해의 끝머리가 왔음을 실감하고는 한다. 호떡은 대표적인 길거리 간식이자 서민 음식의 상징이다. 전국적으로 다양한 호떡이 많지만, 부산에서는 호떡에 해바라기 씨와 각종 견과류, 건포도 등을 넣어 종이컵에 담아준다. 늘 우리 곁에 있어서 특별해보이지 않지만, 한 컵에 담긴 간식 속에도 기나긴 역사가 숨어있다.
  • 부산 >남구

    밀가루로 만든 냉면, 부산 밀면
    부산 밀면은 밀국수 냉면의 약칭으로 밀가루를 원료로 뽑은 면을 사용하여 만든 냉면을 말한다. 한국전쟁 시기 부산으로 내려온 이북지역의 피난민들에 의해 개발된 부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부산광역시의 고유한 향토음식이다.
  • 부산 >남구

    6.25에 생겨나 부산의 향토음식이 된 밀면
    함흥냉면에서 파생된 밀면은 부산의 향토음식이다. 이전 시대에 귀한 재료였던 밀가루가 1950년대 미군의 밀가루 원조로  남아돌게 되었다. 때문에 메밀 대신 그 밀가루에다가 고구마 전분이나 감자 전분 등을 추가하여 쫄깃한 면을 뽑아 만들었다. 요즘 부산시내 밀면집은 추석이나 설 등의 명절이 대목인데, 이는 외지에 나가있던 부산 사람들이 고향에 온 김에 먹고 가기 때문이다.
  • 부산 >북구

    한국전쟁 피난민들의 허기를 달래준 구포국수
    밀국수는 돌잔치나 혼인, 회갑 등 특별한 날에 먹던 음식이었다. 밀국수가 우리의 식탁에 자주 올라오게 된 것은 한국전쟁 당시 외국 원조구호물자와 함께 대량의 밀가루가 반입되면서다. 부산 구포동에서 국수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구포동으로 모여든 피난민들은 싸고 맛있는 구포국수로 허기를 채웠다. 구포국수는 구포시장을 방문한 이들이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으로 유명해졌다. 
  • 부산 >영도구

    어묵의 새 변화, 고급 간식이 된 어묵
     ‘오뎅(おでん)’은 어묵과 우무, 무 등을 넣고 끓인 냄비 요리를 지칭하는 일본말이다. 그것이 한국에 들어와 재료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는데, 어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한국에 처음 설립된 어묵공장은 1907년 야마구치어묵제조소(山口 蒲鉾製造所)다. 이후 1940년대 말과 1950년대를 전후해서 부산 영도 봉래시장 입구에 동광식품과 삼진식품이 들어선다. 한국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어묵공장이다. 삼진어묵은 1953년 박재덕 씨가 창업하여 박종수 씨의 뒤를 이어 아들 박용준 씨가 3대째 운영하고 있다.
  • 부산 >부산진구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애환과 피로를 풀어준 범일동 조방낙지
    조방낙지는 부산 조선방직 인근에서 만들어 팔기 시작한 낙지볶음의 일종으로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의 향토음식이다. 조방낙지는 조선방직공장 노동자들이 즐겨 찾았던 음식이었던 관계로 낙지볶음 대신 조선방직의 줄임말인 ‘조방’이 붙어 조방낙지라는 고유명사로 정착한 음식이다.
  • 부산 >중구

    전국의 포장마차를 제패했던 부산 자갈치시장 꼼장어구이
    자갈치 꼼장어구이는 먹장어를 매운 양념에 채소와 버무려서 구워 먹는 부산광역시 자갈치시장의 향토음식이다. 꼼장어는 먹장어의 경상도 방언으로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대표적인 수산물이다. 해방이후 일본에서 돌아와 부산에 정착한 귀국동포들이 충무동 바닷가에 좌판을 벌여 판매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 부산 >중구

    보따리상을 통해 만들어진 유부 보따리
    요즘에는 해외직구가 간편해져 인터넷으로 클릭 한 번 하면 먼 나라의 물품이 내 집 현관문 앞까지 배송되는 시대라지만, 예전에는 국내에서 팔지 않는 물건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물품들이 꼭 필요한 경우, 해외에서 돌아오는 지인에게 부탁하거나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상인들에게 맡기고는 했는데, 국내에 정식 수입되지 않던 물품을 개인적으로 들여와 팔던 이들을 두고 보따리상이라 불렀다. 그들이 자주 오가던 항구 부산에 가면 그 시대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음식이 있으니, 바로 유부 보따리다.
  • 부산 >동래구

    달착지근한 쪽파와 해산물을 찹쌀 반죽으로 지져야 동래파전
    흔히 파전이라 하면 바삭하게 기름에 구워진 밀가루 파전을 생각하지만 부산 동래파전은 쪽파가 주인공이다. 유채씨기름 위에 쪽파를 가지런히 눕히고 찹쌀반죽을 뿌린 뒤 굴, 새우, 대합을 얹고 계란을 하나 툭 깨어 올린 후 뚜껑을 덮어 굽는다. 동래시장 난전에서 팔던 동래파전은 어느새 지역 특산 음식이 되었다. 
  • 부산 >남구

    밀면과 냉면은 목젖을 치는 그 맛이죠
    부산의 내호냉면은 2019년이면 백 년을 맞는다. 남한 함흥냉면의 역사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당시 흥남시 내호면에서 부산까지 피난 와서 낸 가게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함흥냉면은 감자나 고구마 녹말로 면을 만들어서 가자미회와 양념 등을 올려 비벼 먹는 냉면이다. 식량이 부족한 겨울철에 먹던 음식이었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에 의해 남한에도 알려지게 되는데 냉면국수의 주요 재료인 감자녹말은 고구마 녹말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미군의 구호품이었던 밀가루 보급으로 고구마 녹말과 밀가루를 섞어 면을 만들면서 밀면이 탄생했다. 

가볍게 즐기는 청주 여행

여름이 시작된 6월의 어느 날, 갑자기 홀가분히 떠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럴 때 가기 딱 좋은 곳이 있죠!

바로 충청북도의 청주입니다!

청주는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도시로 당일치기부터 1박 2일 코스까지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답니다! 그럼 가볍게 당일치기 코스로 한번 떠나볼까요?

먼저 대청호에 들러서 드라이브를 즐겨보세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드라이브를 하다 보면 문의문화재단지에 도착할 거예요. 문의문화재단지는 청주 시내의 유형, 무형 문화재 등을 수집 및 전시한 역사 교육장이랍니다. 역사를 배웠으니 이제 전시회를 즐기러 가볼까요? 전시회는 마동 창작마을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서양화가 이홍원 작가가 폐교를 개조하여 작업실 개인 공간을 개방한 곳으로, 전시관과 셀프카페를 운영하는 곳이에요. 전시를 보고 차 한 잔의 여유를 부리다 마지막으로 가덕 말미 장터 마을에 들러 고추장 담그기, 고추 따기 체험 등 농촌 체험을 즐겨봐요. 이렇게 당일치기를 즐기고 나면 재밌는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가볍게 즐기는 청주 여행으로 힐링과 재미를 동시에 만끽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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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청주시

    청주의 옛이름을 단 상당산성
    상당산성은 청주에서 동쪽으로 7.5km에 청주와 청원군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491.2m 상당산 위에 쌓은 포곡식 석성이다. 둘레가 4.2km, 높이 3~4m, 내부면적 220,000평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충북 >청주시

    선비의 정신을 갖춘 상업 인재를, 청주 대성고등학교 본관
    청주상업학교는 1930년대 청주 지역 학부모들의 염원과 청주 유지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 특히 청암 김원근과 석정 김영근 형제가 거금을 내놓아 학교 설립이 결실을 보았다. 붉은 벽돌 2층으로 지어진 학교 본관은 상업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해방 후 청주상업 고등학교가 되었으나 시대의 추세에 따라 2002년 인문계로 전환해 청주 대성고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우암산 자락 인가 드문 뽕나무밭에 들어선 학교는 해방 후 청주대학교를 비롯해 학교 건물들이 잇따라 지어지고, 청주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현재는 번화한 거리로 변했다.
  • 충북 >청주시

    수도권과 삼남지방의 물건을 교류하던 청주 육거리종합시장
    청주시의 시장은 조선시대부터 활발하게 개설되었다. 청주시의 대표적 시장인 ‘육거리종합시장’은 청주장을 잇는 상설시장이다. 육거리종합시장은 9개의 상인회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정도로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다. 육거리종합시장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시장’의 역할이 컸으며, 요즘에도 새벽시장(도깨비시장)이 열린다. 
  • 충북 >청주시

    등고강변의 지극히 선한 경지를 실천하고자 했던, 청주 지선정
    지선정은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중척리 산25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11호이다. 조선후기의 학자 오명립(1563~1633)이 1614년(광해군 6)에 등고강변의 언덕 위에 세운 정자이다. 등고강은 오늘날의 청주시 현도면 중척리 앞으로 흐르는 금강의 별칭으로, 이 일대를 가리키는 ‘등고’라는 지명에서 유래하였다. 현재의 청주시 현도면과 문의면 일대는 보성오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아온 지역이다. 지선정이라는 정자명은 『대학』의 지어지선(止於至善)에서 취한 것으로,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이후 피폐하고 어지러운 정사 속에서 풍속을 교화하고 향촌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오명립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 충북 >청주시

    청주 육거리종합시장에서의 의미 있는 답교놀이
    다리밟기는 정월 대보름에 다리를 밟는 민속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석교동에는 조선시대 이전에 놓인 다리 가운데 제일 긴 다리인 남석교(南石橋)가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청주 시내를 흐르는 무심천(無心川)의 물길이 변경되면서 매립되어 시장으로 변모하고, 남석교 또한 매몰되어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청주시의 대표적인 시장인 ‘육거리종합시장’은 1950년 이후에 형성되었다. 이곳 육거종합시장에 바로 남석교가 묻혀 있다. 그래서 청주문화원 등의 공공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시장 입구에 남석교 모형을 만들어 놓고 ‘남석교 다리밟기’ 놀이를 재현한다.
  • 충북 >청주시

    반란군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청주성 3인의 청주 표충사
    청주의 표충사는 이인좌의 반란군이 청주성을 함락할 때 성을 지키던 이봉상, 남연년, 홍림을 배향하는 사우이다. 청주성은 영남과 호남의 중간지점으로 군대가 무기를 갖춘 병영이 설치되어 있어 반란군이 가장 먼저 점령한 곳이었다. 청주성을 지키던 무신들은 반란군의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았고 오히려 반란군을 꾸짖고 죽임을 당했다.
  • 충북 >청주시

    미국 선교사 주택으로 쓰인 여섯채의 건물, 청주 탑동 양관
    충청북도 청주시 탑동에는 청주 탑동 양관이라는 6동의 서양식 건물이 있다. 미국의 선교사와 관련된 건물로 1906년에서 1932년 사이에 지어졌다. 모든 건물은 2층 이상이며 지하실을 갖추고 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건축의 변화를 보인다. 벽돌로 쌓은 벽체에 지붕에는 기와가 올려져 있어 한식과 양식의 절충식 형태를 띠고 있다. 제3호부터 제6호는 일신여자고등학교 내부에, 제1호와 제2호는 외부에 자리하고 있다.
  • 충북 >청주시

    호랑이 숲에서 박생원 딸의 병을 낫게 해준 충북 청주시의 명암약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에 있던 명암약수는 1920년대 무렵 발견한 탄산약수로 약수에 철분 성분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청주 시내에서 상당산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접근성이 좋기에 청주시민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명암약수는 청주에 살던 박생원 딸의 병을 치료해주었다는 설화가 함께 전승한다. 청주시에서는 명암약수터가 있던 곳을 유원지로 조성하였다. 명암약수터는 청주시민들의 소풍 장소이자, 나들이 장소였다. 2015년 청주시에서 생태공원으로 조성하였으며, 2021년에는 ‘명암밸리파크’라는 종합 유원지로 만들어 갈 계획이다.
  • 충북 >청주시

    보살사에 열린 청주 유림의 풍류,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에 있는 고인쇄박물관에는 을축갑회도(乙丑甲繪圖) 및 죽림갑계문서(竹林甲稧文書)가 소장되어 있다.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는 청주 일원에 거주하였던 을축년생(1625년) 사대부가 1682년에 갑계를 개최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와 그림이다. 특히 을축갑회도의 경우는 갑계가 열린 보살사 경내를 배경으로 당시의 정황을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7세기 청주 지역 갑계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충북 >청주시

    주성교육박물관으로 재탄생한 청주 구 청주공립보통학교 강당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영동에는 구 청주공립보통학교의 강당이었던 ‘주성교육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청주공립소학교로 개교하여 청주공립보통학교, 주성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다가 현재 주성초등학교로 불린다. 구 청주공립보통학교 강당은 2001년 주성교육박물관으로 개관하여 학습자료 및 민속용품 등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 건물은 충청북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 건물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국가등록문화재 제350호에 지정되었다.

우리 옷의 전통 모시옷

예부터 여름철 최고의 옷으로 주목받은 모시옷. 모시는 삼국시대 때부터 삼베와 더불어 옷감의 재료로 쓰였는데요. 모시로 만든 옷은 가볍고 통풍이 잘 되어 땀도 빠르게 말라 여름에는 너도나도 입었답니다. 특히 한산모시는 고급 모시로, 임금님께 진상될 정도의 특산품이었습니다. 비단과도 같은 광택과 삼베보다 좋은 내구성을 갖춘 옷감인 모시! 이 좋은 재료로 만든 모시옷은 장점이 많은 만큼 만들어지기까지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모시의 껍질을 벗겨 물에 적시고 말리기를 반복하고, 그 이후에는 베틀로 짤 수 있도록 한올 한올 실로 만들어야 했는데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모시옷, 모시옷을 만들기 위해 베틀을 짜는 것은 필수며 현재까지도 전해져오는 한산모시짜기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직물 모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한산모시 전시관에 방문하여 모시의 역사와 가치에 대해 들어보고 미니 베틀, 모시옷 입기 체험도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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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상류사회의 여자들이 정장할 때 입던 속치마, 대슘치마
    대슘치마는 조선시대 왕실 및 양반사대부의 부녀자들이 예복(禮服)을 착용할 때 입던 속치마이다. 대슘치마는 주로 모시로 만들었는데 색깔은 모시 본래의 색깔인 소색(素色)이나 흰색으로 하였다. 대슘치마의 형태는 끌리지 않을 정도 길이의 모시 12폭으로 지었다. 치마 아랫단에는 창호지 또는 넝마 등을 두껍게 겹붙인 ‘배악비’를 높이 4cm, 길이는 치마폭 정도로 만들어 풀을 먹인 모시로 붙였다. 대슘치마 밑단에 다는 백비단과 빳빳한 창호지는 여러 겹 입은 속옷과 치마를 받쳐 주어 발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 준다. 무지기와 대슘치마를 같이 입으면 겉치마의 아랫부분이 곡선으로 자연스럽게 부풀려졌다.
  • 전국

    상류층 부녀들이 입던 속치마, 무지기치마
    무지기치마는 조선시대 상류층 부녀자들이 입었던 속치마이다. 명절이나 잔치 때에 무지기치마를 입으면 겉치마가 자연스럽게 넓게 펴져 치마가 풍성하게 보였다. 무지기치마는 서로 길이가 다른 치마를 여러 겹 한 허리에 달았으며 이때 만들어지는 층의 수에 따라 3합·5합·7합 등의 종류로 나뉘었다. 각 층의 치마는 모시 12폭을 이어 만들었고 치마 밑단 끝부분만 염색하였다. 그 색감과 모습이 마치 무지개와 같아 보였으므로 이를 토대로 치마의 명칭을 무지개라 하였다가 후에 무지기로 변화하였다. 무지기치마는 그 색감과 형태가 현대의 아름다움과 흡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오늘날의 디자이너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 충남 >서천군

    모시 생산의 전통을 잃지 않기 위한 서천 저산팔읍 길쌈놀이
    서천 저산팔읍 길쌈놀이는 세모시로 유명한 한산의 모시 생산 과정을 유희화한 놀이다. 모시는 한산의 중요한 소득원으로써, 이 지역의 여성들은 모시 만드는 일을 숙명으로 여기며 살았다. 지금은 다양한 직물의 보급과 기계화로 쇠퇴했지만, 모시 생산의 전통을 잃지 않고 놀이의 형태로 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 전국

    삼 ·모시 ·노 등으로 삼은 신, 미투리
    미투리는 짚신 중에서도 질이 좋은 것으로, 삼(麻)이나 모시, 노끈 등을 엮어 만든다. 미투리는 선비들이 나들이할 때 신던 것으로 미투리 중 섬세한 제품은 사대부들이 주로 신었다. 미투리는 형태로 보면 신목이 낮은 신발의 총칭인 이(履)의 일종이다. 미투리는 흔히 날이 여섯 개나 여덟 개였으며, 아주 정교한 총(미투리의 앞과 옆을 이루고 있는 올) 50~60개로 이루어졌다. 원래 미투리는 삼으로 만들었는데 점차 모시, 노끈, 닥나무 껍질, 칡넝쿨이나 종이와 무명실 등의 좋은 재료로 섬세하게 엮기도 하였으며 왕골이나 부들로 만든 미투리는 염색하여 무늬를 넣어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투리는 짚신보다 튼튼하여 양반층과 서민들이 고급 신발로 취급하였다.
  • 충남 >서천군

    우리나라 모시 유통의 본거지 한산장
    한산장은 모시로 유명한 서천군 한산면소재지에서 열리는 정기시장이다. 한산모시는 조선시대 후기에 오면서 유명해졌다. 한산모시를 근간으로 한 유통망 때문에 한산면 시장이 발달하게 되었다. 한산장은 조선시대부터 있었으며, ‘안장’이라고도 불렀다. 부녀자들이 물건을 가지고 와서 파는 작은 시장이라는 의미다. 한산장에는 3대째 이어오는 대장간과 40여 년 동안 문을 연 철물점, 함석집 등의 오래된 상점들이 있어서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 충남 >서천군

    여름용 전통 직물 한산 모시짜기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저마를 이용해 짠 전통 직물이다. 한산모시는 품질이 우수하고 섬세하기로 유명하였다. 모시도 여름 옷감으로 이름이 나면서 오일장에서도 판매하였다. 모시 짜기는 모시실 만들기와 베 짜기로 이루어진다. 1967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전국

    치마 안에 입던 여름용 홑바지, 살창고쟁이
    살창고쟁이는 조선시대 부녀자들의 치마 안에 입던 속옷으로 여름용 홑바지인 고쟁이 중 하나이다. 살창고쟁이의 형태는 허리말기 아래, 허리둘레를 따라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구멍의 크기는 대략 6~8cm 폭에 15~20cm 길이로 직사각형 구멍을 10개 이상 내고 구멍의 개수는 바지마다 다르다. 살창 부분을 재단한 후 가장자리를 2~3cm 접어 감침질로 가장자리의 삼베 올이 풀리지 않게 정리하고 허리말기를 달았다. 살창고쟁이는 밑이 트인 바지인 개당고(開襠袴)이며 주로 뒤쪽이 트여 있었으며, 간혹 허리말기만 흰색 모시로 만들기도 하였다. 살창고쟁이는 여름에 시원하게 입을 수 있는 실용성과 신부가 갖출 수 있는 예의범절, 그리고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우리 전통 옷이다.
  • 충남 >서천군

    『삼국사기』에 기록된 오래된 여성들의 전통놀이, 길쌈놀이
    전통사회 여성들의 중요한 생업 활동 중에 길쌈이 있다. 삼·누에·목화 등을 이용해 삼베·명주베·모시베·무명베 등의 옷감을 짜내는 노동이다. 길쌈놀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남아 있다. 왕이 여성들을 두 팀으로 나누고 한 달 동안 길쌈을 하게 하여, 그 양을 따져 승부를 겨룬 다음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는 놀이었댜. 이는 추석[가배(嘉俳)]의 유래이기도 하다. 길쌈놀이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한 달 동안 이어져 온 생업활동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서로 음식을 나눠 먹으며 그동안의 노고(勞苦)를 달랜 부분이라 생각된다.
  • 충남 >논산시

    은진미륵의 보은으로 결혼 한 모시장수
    ‘은진미륵’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관촉사(灌燭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석불로는 가장 크며, 특히 토속적인 생김새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은진미륵의 보답으로 결혼을 하게 된 서울의 모시장수를 내용으로 하는 설화가 전한다. 모시장수가 한산장에서 모시를 구입해 지게에 짊어지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그만 소나기를 만나 모시가 다 젖게 되었다. 모시장수는 비에 젖은 모시를 어떻게 말릴까 고민하다가 모시를 펴서 은진 미륵에다 입혀 놓았다. 그랬더니 은진미륵이 오랜 시간 헐벗고 있었는데 옷을 입혀주어 고맙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모시장수는 서울로 향하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
  • 전국

    베틀 노세 베틀 노세, 옷감을 짜는 길쌈
    길쌈은 부녀자들이 가정에서 삼 ·누에 ·모시 ·목화 등의 섬유 원료로 베 · 명주 · 모시 · 무명 등의 직물을 짜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만들어진 직물은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 되었고 화폐의 대용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부녀자들이 길쌈을 하면서 일의 고통을 덜고 자신들의 설움을 표현하며 달래기 위해 부르는 노래를 길쌈노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