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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로 구성한 지역문화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

당신이 몰랐던 제주의 이야기

자연이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떠올리는 제주도. 하지만, 제주도 곳곳에는 일제강점기부터 근대까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도 있습니다. 제주도의 푸른 자연과 함께 우리의 소중한 역사도 한 번 들여다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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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서귀포시

    “동해의 솟은 해를 가슴에 안고”, 제주 구 해병훈련시설
    ‘제주 구 해병훈련시설’은 1950년 8월 5일 한국전쟁 시기에 제주도에서 모병된 해병대 3기가 훈련을 받은 곳이다. 돌과 시멘트로 지은 막사와 세면장이 남아 있다. 세면장은 출입구 동선과 목욕 시설 등이 매우 효율적으로 공간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설치됐다. 훈련시설에서 ‘지옥훈련’을 받은 해병대 3기 1,500명은 1950년 8월 30일 입대한 4기 1,500명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한국군 해병대는 인천과 서울 수복에 이어 1951년 강원도 양구군 ‘도솔산지구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려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 제주 >서귀포시

    평화로 덮어야 할 일제 군사 요새, 제주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일제 지하벙커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는 미군의 공습 시 지휘소 겸 통신시설로 건설되었다. 알뜨르비행장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바다 건너 상하이, 난징 등을 폭격하기 위해 비행기들이 출격하던 장소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제주도 전역을 요새화하여 미군의 제주도 점령을 결사적으로 막는다는 작전을 세웠다. 알뜨르비행장과 인접한 송악산 해안에 ‘인간 어뢰’ 공격을 위한 동굴 진지를 만드는 등 제주도 곳곳을 요새화했다.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를 비롯한 일제의 군사 시설 건립에는 제주도민들이 강제 동원되었다.
  • 제주 >서귀포시

    서귀포시 대정읍의 역사자료전시관, 기억의 눌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은 알뜨르 비행장, 선알오름 학살터 등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 기억들을 모아놓은 대정현 역사자료전시관의 이름이 기억의 눌이다. 눌은 제주 방언으로 '차곡차곡 쌓아놓은 더미'이다. 기억의 눌이 있는 건물은 1955년 지어진 대정면사무소 건물로, 2005년 등록문화재 157호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기억의 눌은 대정읍의 주민들이 직접 지역 공간의 기억과 기록을 모아 만든 전시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제주 >서귀포시

    항쟁과 학살 사이에 서있는 돌담 – 제주 4‧3 수악주둔소
    국내외 관광객이 즐겨 찾는 제주도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는 제주 4‧3항쟁의 비극이 숨어있다. 4‧3항쟁을 생생히 증언하는 문화재가 소화산인 물오름(수악)에 있다. ‘제주 4‧3 수악주둔소’다. 수악주둔소가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존재한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의 기록에 따르면 수악주둔소는 무장 세력이 궤멸 직전이던 1949년 가을경에 만들어졌다. 한편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수악주둔소는 한국전쟁 이후 축조되었다. 경찰이 얼마 남지 않은 무장대 토벌작전을 위해 1952년 4월 제주에 32개의 주둔소를 설치하였는데, 수악주둔소 역시 그 가운데 하나이다. 1952년 창설된 100전투경찰사령부가 수막주둔소를 확장, 수리하여 본격적인 소탕작전을 펼쳤다. 수악주둔소는 제주 4․3사건 유적 중에서도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문화재청은 제주 4‧3 수악주둔소를 등록문화재 제716호로 지정했다.
  • 제주 >서귀포시

    절경에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 - 남제주 구 대정면사무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구 대정면사무소는 1955년에 완공된 2층 건물이다. 벽체의 재질이 제주 현무암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이 쌓는 방식을 사용하는 등 1950년대 제주도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건축 모델은 1952년 지어진 옛 제주도 도청 청사다. 상모리는 1933년 면사무소가 이전해 오면서 대정면의 행정중심이었다. 상모리는 1930년대부터 계속 진행된 ‘알뜨르 비행장’ 건설과 확장공사, 송악산 해안 동굴진지 조성 등 일제강점기의 수난을 직접 겪어낸 현장이다. 해방 후에도 ‘4·3사건’과 ‘섯알오름 학살’을 겪어냈다. 면사무소가 준공된 다음해(1956년) 대정면은 읍으로 승격했다. 읍사무소가 1980년 하모리로 옮겨간 후에는 보건지소로 쓰이다가 2014년부터 향토문화 자료 전시관(대정현 역사자료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5년 등록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됐다.

천의 얼굴 고창

우리나라 고인돌 최대 밀집지역인 고창의 역사는 청동기 시대인 2천 년 전부터 시작됩니다. 삼국시대·조선·근대 유물까지 모두 보유한 고창을 둘러보면서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을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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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고창군

    술에 취하면 잠드는 바위, 고창 취석정
    취석정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노동로 191-9(화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3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경희(金景熹:1515~1575)가 사화(士禍)를 피해 고향으로 낙향하여 1546년(명종 1)에 건립하였다. 파괴되어 빈터로 남아 있다가 후손들이 1871년(고종 8)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취석정이라는 정자명은 도연명이 한가로이 세상을 살 때 술에 취하면 집 앞 바위 위에 잠들기도 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으며, 사람이 욕심 없이 한가롭게 생활한다는 도가적 뜻이 담겨 있다.
  • 전북 >고창군

    성을 밟으면 병에 안걸리는 고창읍성
    1453년(단종 1)에 반등산을 바라보며 남쪽에서 뻗어 내린 산 위에 완만한 곡선으로 두른 원형이며 돌로 쌓은 평산성형이다. 총 길이 1,680m, 높이 4m, 면적은 50,172평에 이른다. 고창의 읍성으로 세워진 것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데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왜적으로부터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이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읍성이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석축 성곽이다.
  • 전북 >고창군

    조선시대 개설된 고창읍내장을 계승한 고창상설시장
    '고창상설시장'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개설된 '고창읍내장'을 계승한 시장으로 상설시장과 오일장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 주로 고창의 특산품을 비롯하여 다양한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 전북 >고창군

    고창읍성을 밟고 무병장수하세! '고창 모양성제'
    고창모양성제는 애국심을 고취하고 향토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며 고창군민의 긍지와 애향심을 높이기 위해 1973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지역축제이다. 왜구를 막기 위해 전라도민들이 축성한 모양성(고창읍성)을 밟는 답성놀이와 강강술래 재연이 주효 행사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9월 9일(중양절)에 축제를 개최하여 답성놀이를 한다.
  • 전북 >고창군

    “북 오산, 남 고창”의 민족 교육 – 고창 구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
    “북 오산, 남 고창”은 일제강점기 초기 대표적인 민족교육 학교 두 곳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와 전라남도 고창의 고창고보다. 흥미롭게도 고창고보의 전신은 일본인 마스도미가 1919년 세운 오산학교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교육자였던 마스도미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사죄하는 심정으로 학교를 설립했다. 재정난으로 오산고보가 폐쇄 위기에 몰리자 고창군민들이 나섰다. 천석꾼 지주들을 중심으로 5,500명의 기부금을 모아 오산고보를 잇는 고창고보가 1922년 설립되었다. 고창고보는 새로운 교육을 실천했으며, 1937년 전주 신흥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자 고등과 전체 학생을 받아들였다. 고창고보 강당은 1939년 지어졌으며,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고창고보 건물 가운데 당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 전북 >고창군

    책을 읽고 책을 만드는 고창 책마을해리
    전라북도 고창 해리면 월봉마을의 '고창 책마을해리'는 출판계에 몸 담았던 이대건 촌장이 나성초등학교를 개조하여 만든 곳이다. 나성초등학교는 1933년 광승 간이학교로 문을 열어 2001년에 폐교가 된 이후 2006년에 '고창 책마을 해리'로 다시 문을 열었다. 바람언덕(야외강연장), 암벽타기벽이 있는 동학평화도서관, 책숲 시간숲(마을신문과 지역책 도서관), 버들눈 도서관(어린이청소년 도서관), 직접 책을 찍어낼 수 있는 누리책공방 등 볼거리와 할거리가 넘치는 곳이다.
  • 전북 >고창군

    요정의 시대는 갔어도 - 고창 조양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조양관’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여관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한국전쟁 후 전라북도 전주의 요정 ‘행원’에서 주방 일을 하던 사람이 ‘국일여관’을 인수해 ‘조양관’이라는 음식점을 열었다. ‘조양관’은 일반 음식점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유행했던 요정으로 영업을 했다. 요정은 요리가 주목적이 아니라 술과 여흥을 파는 업태로서, 기생제도의 변화와 함께 전국적으로 곳곳에 생겨났던 업태다. 조양관은 1970년대까지 고창의 손꼽아주는 요정이었으나, 이후 고급 한정식 음식점으로 전환했다. 조양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주거시설의 특징을 간직한 건물로 평가받아 2007년 등록문화재 제325호로 지정되었다.
  • 전북 >고창군

    긴 토담길을 따라 들어가는 고창의 김정회 가옥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는 안동 김씨와 청도 김씨의 세거지로 여러 채의 고가가 있지만 김정회 가옥은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가이다. 1862년에 건립한 전형적인 상류가옥으로, 서예가이자 학자인 보정 김정회(1903~1970)가 태어난 집이다. 고가로 이어지는 긴 토담길은 소박하지만 전통한옥의 멋스러움도 갖추고 있다. 대문을 통해 들어서면 넓게 트인 사랑마당과 사랑채가 있는데, 최근에 초가를 기와로 바꾸었다. 안채와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남녀가 유별한 조선시대의 유교적 이념이 잘 투영되어 있다.
  • 전북 >고창군

    판소리 명창들을 교육했다는 고창 신재효 고택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고창읍성 입구에 있는 신재효 고택은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가 1850년 경에 지은 집이다. 이 집에서 판소리 명창을 모아 이론을 강론하고 판소리 사설을 편술하였다. 그러나 수리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1899년에 건축했다고 되어 있어, 신재효 사후에 그 아들이 중수한 것으로 추정한다. 중요민속자료를 지정되기 이전까지는 고창경찰서 관사로 이용되었다. 대지 3천평 규모에 사랑채로 보이는 건물 한 동과 연못, 우물만이 남아 있다. 「동리가」에는 집안에 정자가 있고, 그 아래로 시냇물이 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연못은 과거의 화려했던 신재효 가옥의 영광을 보여주며, 초가를 얹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 전북 >고창군

    걷고 밟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고창 답성놀이
    고창 답성놀이는 윤년 윤달에 부녀자들이 돌을 머리위에 이고 모양성(고창읍성) 성곽 위로 올라가 성 줄기를 따라 열을 지어 도는 민속놀이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성곽을 3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무병장수하고, 극락왕생 한다고 믿었다. 답성놀이는 원래 오래된 성이 있는 곳에서 두루 행해졌지만 현재는 고창지역에서만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

응답하라 1883, 인천

1883년 '개항'을 받아들이며 폭풍우처럼 쏟아진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인천. 조선 최초의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조선의 비버리힐즈로 엄청난 발전이 잇따랐지만 그와 동반되었던 보이지 않는 수탈과 침탈의 현장이기도 하였습니다. 개항의 두 얼굴을 간직한 인천의 역사를 따라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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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중구

    민주주의가 자라다,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강당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강당은 1935년 인천 공립중학교의 강당으로 세워졌다. 화강석 기단 위에 적벽돌을 쌓아 지은 건물이다. 지하 1층, 지상 1층인 외관은 간결하며 기능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내부는 너비가 15m에 이르지만, 중간 기둥 없이 하나의 공간을 이루도록 했다. 일본인 학교였던 인천 공립학교는 해방 후 학제 변경으로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 강당이 되었다. 제물포고등학교 설립을 주도했고 초대 교장이었던 교육자 길영희 선생은 ‘성덕당’이라고 불리는 강당에서 전교생에게 양심적인 나라의 일꾼이 되라고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성덕당은 당대 인사들의 특강 장소이자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1930년대 세워졌던 옛 학교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성덕당은 남아 제물포고등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꼽힌다.
  • 인천 >중구

    바다보다 역동적인 제물포의 근대 - 인천 개항장 근대역사문화지구
    제물포는 1883년 개항 직후부터 일본과 청나라,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각국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각축을 벌인 지역이다. 일본이 가장 먼저 조계를 설정하자, 청과 다른 나라들이 뒤따랐다. 초기 모습은 청 조계지가 일본 쪽보다 나았다. 상권에서도 청 상인들이 우세한 편이었으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로는 일본이 앞서기 시작했고, 1904년 러일전쟁을 거친 뒤에는 일본의 절대 우세가 확정되었다. 일본은 금융기관을 앞세워 해운업과 화물운송업을 장악했고, 인천은 일본 주도 아래 식민지 근대의 대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자유공원(만국공원)은 일본 조계지와 청국 조계지(훗날 인천 차이나타운)를 비롯해 개항 이후 인천 근현대사의 역동성을 답사하기 적당한 출발점이다.
  • 인천 >동구

    인천 배다리 마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인천 동구 배다리마을은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와 배와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광복 이후 40여 개의 헌책방이 성업한 헌책방 골목이기도 하다. 이곳에 산업도로가 마을 중간을 관통해 지나가려는 국책사업이 시작되었고, 마을주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동네 주민에 지역 문화예술단체와 활동가들이 합세해 도시재생이 시작되었고, 결국 산업도로는 지하로 지나가게 되었고, 배다리마을은 큰 위기를 넘겼다.
  • 인천 >중구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구 인천부 청사
    1933년 지어진 인천부 청사는 당시 러시를 이루던 도 청사, 부 청사 건축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근대 모더니즘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증기난방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최신 건물이라고 선전되었다. 신축 논의 과정에서 인천의 도시화가 진전된 만큼 시가지 중심 쪽에 지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지만, 옛 인천조계지의 끝자락 자리를 고수했다. 인천부 청사는 1980년대 중반까지 인천 행정의 중심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 인천 >중구

    한반도 해운업을 장악하라, 구 일본 우선(郵船) 주식회사 인천지점
    1888년 건립된 구 일본 우선 주식회사 인천지점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이다. 일본 우선 주식회사는 당시 일본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한반도 근대 해운업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었다. 절충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일본 우선 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110여 년 동안 9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지만, 해운업 관련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2004년 인천광역시가 매입하여 미술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 인천 >중구

    관세 자주권을 잃었던 아픈 역사 – 인천세관 구 창고와 부속동
    인천세관은 1883년 개항하던 해에 설치된, 한반도 최초의 세관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7년간 일본이 농간을 부리고 위협한 탓에 조선은 근대 관세 제도를 도입할 수 없었다. 청나라의 도움으로 세관을 설치하고도 해방이 될 때까지 한국은 관세 자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일본은 1911년 식민지 인천에 화려한 세관 건물을 지었다. 이때 창고들도 들어섰다. 해방 후 관세 주권은 되찾았으나 일제가 세운 인천세관은 한국전쟁 때 불탔다. 창고 3동과 일부 부속동은 남았는데, 건립 100년쯤 된 시점에서 수인선 공사와 맞물려 철거 위기에 몰렸다. 창고 2개 동은 결국 철거되었고, 1개 동만 반대 여론에 밀려 40m 정도 옮겨 되살렸다. 인천세관 구 창고와 부속동은 2013년 등록문화재 569호로 지정되어, 개항장 인천의 곡절을 되새겨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 인천 >중구

    개항 이후 부두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인천 구 대화조 사무소
    인천광역시 중구 관동1가 구 대화조 사무소는 개항 이래 인천항 조선인 부두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장소다. 1883년 개항 직후부터 인천항을 통해 쌀이 수출되고, 면직물 등 소비재가 대량 수입되면서 화물을 싣고 내리는 노동자가 필요했다. 대화조는 1892년 하역업체로 출발했다. 항구 가까이에 사무소 겸 노동자 숙소로 건물을 지었다. 일본식 상가 겸 점포인 마치야 양식으로 지어진 대화조 건물은 3층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은 1890년 두량꾼 파업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 동안 여러 차례 파업을 일으켰다. 임금이 낮고 노동조건이 열악한데다, 민족 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대화조 건물은 해방 후 일반 주택이었다가, 2011년 매입한 소유주가 고증을 거쳐 옛 모습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고쳐지었다. 인천의 근대와 노동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장소다.
  • 인천 >중구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
    대불호텔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지금 인천광역시 중앙동 1가 22번지 일대에 있는데 2018년 4월 기존 빈 터였던 곳에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다. 복원된 대불호텔은 중국 생활사 전시관의 1관과 2관중 1관이다. 대불호텔은 1887년경 일본인 해운업자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 ?~ 1898)에 의해 건립되고 운영되었다. 경인선이 개통되기 전 인천과 서울은 우마차로 1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가야하는 외국인은 인천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고, 인천을 떠나 외국으로 가는 사람도 미리 인천에 와서 배편을 기다려야 했다. 덕분에 인천의 숙박업은 호황을 누렸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어 인천과 서울이 1시간 거리가 되면서 인천지역 숙박업은 쇠퇴하였다. 대불호텔은 1907년 무렵까지 영엽하다가 폐업한다. 그 후 1918년 대불호텔은 뢰소정(賴紹晶)을 비롯한 40여 명의 중국인들에게 인수되어 중국음식점인 ‘중화루(中華樓)’가 되었다.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화성

"혼란을 잠재우고, 왕권을 드높여라." 정조가 신도시 수원화성을 설계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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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수원시

    수원화성, 화성의 도시 기반시설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제2 도시로 조성하고자 여러 가지 행정적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는데 수원부사 조심태는 새 고을에 점포를 설치하는 일에 대해 본고장 백성들 중 살림밑천이 있고 장사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읍 부근에 자리 잡고 살게 하면서 이자 없는 돈 6만 냥을 빌려주자는 상업진흥책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이제는 수원을 ‘상왕의 도시’, ‘조선조 제2의 도시’를 건설하려는 준비작업을 착착 진행하게 된다. 1793년 1월에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좌의정을 역임한 채제공을 초대 화성유수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 사이 행궁을 둘러싸는 5.7km에 달하는 성곽이 건설되고 도시기반 시설도 새롭게 조성되었다. 먼저 성안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남북대로와 행궁을 중심으로 동쪽을 향하여 사거리를 만들고 이를 ‘십자로’라 불렀다. 이곳에는 상가가 들어서고 민가들이 주변에 조성되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관청, 도로, 다리, 상가 등의 도시기반 시설은 물론 저수지와 둔전을 만들어 생산기반 시설도 완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조경도 중요시 여겨 도로변에 수많은 나무를 심었다.
  • 경기 >화성시

    아버지 사도세자를 찾아 정조가 다니던 화성효행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로 옮기고 매년 능을 찾았다. 도성에서 무덤이 있는 현륭원까지 이르는 길은 정조효행길 또는 화성효행길이라는 이름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배다리를 이용해 한강을 건넌 후 과천에서 수원으로 이동했지만, 1795년부터는 한강을 건넌 후 시흥(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을 지나 수원으로 향했다. 과천길을 버리고 시흥길을 택한 것이다. 시흥행궁에서 머무른 뒤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화성에 도착했으며, 화성행궁을 출발해 대황교를 지나 현륭원으로 이동했다.
  • 경기 >수원시

    정조대왕 능행차를 시연하는 '수원화성문화제'
    수원화성문화제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수원화성에서 개최되는 종합축제 성격의 향토문화제이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그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옮긴 이후 축조한 성곽이다. 정조대왕의 지극했던 효심을 기리는 뜻도 담겨 있다. 수원화성문화제의 대표 행사는 ‘정조대왕 능행차 시연’으로 수 천명이 참가하여 장관을 이룬다.
  • 경기 >수원시

    화성의 생산과 유통 기반시설
    정조는 화성을 자급자족적인 도시로 성장시키고자 농업생산기반 시설을 건설하였다. 제일 먼저 1795년에는 만석거를 조성하고 이 저수지를 활용하여 대유둔을 조성하였다. 1798년 4월에는 현륭원 남쪽에 만년제를 완성하였고 1799년에는 만석거보다 규모가 3배 정도 더 큰 축만제를 건설하였다. 정조는 상업발전을 위해 종로를 중심으로 한 북수동 일대에 상설 점포인 시전상가를 조성하였고 이후 이를 바탕으로 ‘성내 시장’과 팔달문 밖에 성외 시장’이 형성되었다.더 나아가 화성은 삼남으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정조는 1796년 화성 성역이 마무리되는 즈음에 양재역을 영화역으로 고치고 역참(郵治)을 화성 북문 밖에 옮겨 설치하였다. 이는 수백 년 이상 삼남지방으로 물자와 사람들이 오가던 ‘길’에 대한 혁명적 변화였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 ‘1번 국도’로 불리는 도로의 원형이 탄생된 것이다. 이에 따라 수원은 삼남은 물론 서울, 광주, 용인, 안산, 남양, 안성 등으로 사방팔방 뻗어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물산이 모여드는 상업의 구심점이 되었다.
  • 경기 >수원시

    화성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는?
    정조는 1793년 12월 6일에 영의정을 역임한 채제공(蔡濟恭)을 총리대신으로, 훈련대장을 역임한 조심태(趙心泰)를 감동당상으로 임명하면서 화성건설을 본격화하였다. 이어 12월 8일에 화성성역소를 설치하고 낭관(郎官)의 우두머리인 도청에 이유경(李儒敬)을 임명하였다. 그 하위 단위는 작업관리 및 현장감독 분야와 사무관리 및 지원부서로 나누었다.화성 성역에 동원된 기술자는 석수, 목수, 미장이, 와벽장이, 대장장이, 개와장이, 수레장이, 화공, 가칠장이, 큰끌톱장이, 작은끌톱장이, 기거장이, 걸톱장이, 조각장이, 마조장이, 선장, 나막신장이, 안자장이, 병풍장이, 박배장이, 부계장이, 회장이 등 549명이었다.기술자를 제외한 모군(품팔이)은 화성 성역 현장에서는 자재를 운반하는 담군과 허드렛일을 하는 모군으로 분류된다.
  • 경기 >수원시

    화성 축조를 위한 재료는 어디서 왔을까?
    화성 건설에서 돌은 숙지산과 여기산 두 산에 각각 2곳, 권동에 1곳 그리고 팔달산 등 모두 여섯 군데에서 채취하였다. 모두 28만 7,600여 덩이가 축성에 소요되었다. 목재는 국가에서 관리하던 재목을 베어 오거나 사오는 두 가지 방식으로 조달하였다. 먼저 국가에서 관리하던 안면도 · 장산곶 · 강원도 지역에서의 조달은 직접 베어내어 운반하였다. 화성 성역에서 기와와 벽돌은 왕륜면 백운동 성역소에서 땔나무를 마련하여 조달하였다. 기와가마는 왕륜과 서봉동에 설치하였다. 화성 성역에서 철물은 그 사용 용도가 다양하였다. 철물은 해서(황해도), 호서(전라도), 관동(강원도), 서울, 수원부 등 각처에서 사왔다. 다산 정약용의 발명품인 거중기는 왕실에서 1부를 내려주었다. 유형거는 왕실에서 1량을 내려주고 10량을 새로 만들었다. 이 외에도 숯, 석회, 장기산 뇌록, 종이, 붓, 먹, 벼룻돌, 숙마, 느릅나무 껍질인 유피, 쇠가죽, 빈 가마니, 숫돌 등이 조달되었다.
  • 경기 >수원시

    화성건설 비용
    정조는 1789년 7월 11일 장헌세자의 원침을 이전하기로 하고, 4일 만인 15일에 수원의 읍(邑) 소재지를 전격적으로 팔달산 동쪽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구읍치에 있던 주민들의 주택과 전답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졌다. 보상과 원침 조성 비용은 모두 돈으로 환산하면 총 24만 5,500냥이 지출되었다.그리하여 총체적인 화성 건설에는 1789년 원침 이전과 구읍치 보상비용에 약 24만 5,500냥 이외에도 1790년 용주사 창건에 8만 7,505냥 1전,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위한 1795년(을묘)의 원행에 지출된 10만 38냥 6전 8푼, 화성 건설에 약 93만 4,028냥 등 총 136만 7,071냥 7전 8푼이 지출되었다. 이러한 공사비는 호조 1년 수입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 경기 >수원시

    정약용의 화성 기본설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인재양성과 연구사업의 기초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특히 즉위 1년 후인 1777년 2월에 백과전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중 5,020권을 은 2,150냥을 지급하고 사 오도록 명하였다.다산 정약용은 1789년(정조 13) 배다리〔舟橋〕를 만드는데 그 규모와 제도를 올려 성공한 바가 있어 주상께서 성제(城制)에 대해 조목조목 올릴 것을 명하여 본인이 화성을 기본 설계하였다고 회고하였다.그리하여 정약용은 여러 책들을 참고하여 8가지 원칙을 담은 『성설』을 지어 정조에게 올렸다. 위의 8가지 원칙이 임금이 지은 『어제성화주략』으로 채택되었다. 성역(城役)을 마친 뒤에 정조는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며 다산을 칭찬하였다.
  • 경기 >수원시

    일한만큼 받는 화성건설의 성과급제
    화성 건설에서 특별히 강조해야 할 사항은 임금 지불 방식에서 날품팔이들에게 짐을 옮긴 거리와 크기 그리고 회수에 따라 차등 지급한 성과급제를 시행한 것이다.그러나 대부분 하루에 2전 5푼 정도 일당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불하였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는 사람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조선 초기 강제로 동원되어 일을 하던 방식에서 화성 건설 시 돈을 주는 방식으로 변화된 것은 보다 세상이 발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본주의적’인 사회로 변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경기 >수원시

    수원 화성을 거쳐 안성까지 가던 영화도(迎華道)
    영화도는 조선 시대에 경기도에 있던 역도 가운데 하나이며, 경기도 수원의 영화역(迎華驛)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본래 양재도에 속해 있었던 것이 수원 화성 축조 이후 개편되어 영화도가 되었다. 영화도의 전신인 양재도는 고려 시대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던 광주도(廣州道)에 속한 역들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1796년 충청도 정역찰방이 관할하던 역과 동화도가 영화도로 개편되면서 과천역과 영화역이 새롭게 설치되었으며, 중심역은 양재역에서 영화역으로 바뀌었다.

을지로-동대문의 뉴트로 바이브

과거의 것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새로운 변화를 이어가는 새로운 복고를 뜻하는 '뉴트로'. 을지로와 동대문이 21C 트렌드를 장식하는 이유를 찾아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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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중구

    을지로의 소울푸드, 을지로골뱅이
    여름철 시원한 안주가 생각날 때, 고된 하루 끝에 매콤한 것이 당길 때면 골뱅이무침만한 것이 없다. 매콤, 새콤 입맛을 돌게 하는 골뱅이무침은 서울 청계천 남쪽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는 을지로 거리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왜 수많은 지역 중에서도 하필 서울 을지로였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을지로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 공구, 타일, 인쇄 상인과 노동자들부터 지금의 사무직 직원들에게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지역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은 을지로 골뱅이의 정체성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서울 >동대문구

    한약재의 집산지 경동시장
    서울특별시 제기동과 용두동 일대에는 한약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설시장인 '경동시장'이 있다. 원래 농산물과 임산물을 판매했지만, 1960년대 후반 을지로와 종로에 있던 상인들이 이주하면 한국을 대표하는 약재시장이 되었다. 또한 경동시장은 '서울약령시 한방축제 개최'를 통해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2017년 10월 서울한방진흥센터를 개관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 서울 >동대문구

    서울 미래유산에 등재된 서울풍물시장
    '서울풍물시장'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원래는황학동에 있었던 ‘벼룩시장’에서 유래한 시장이다. 2004년에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했다가 동대문운동장이 공원화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공식 명칭을 서울풍물시장으로 변경하였다. 주로 옛 풍물과 일생생활용품, 관광, 토속상품, 민속 먹거리 등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서울풍물시장은 2013년에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서울 >종로구

    23년된 와인바 겸 카페 대학로 나무요일
    나무요일은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카페 겸 펍(pub)으로, 2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명륜동을 포함한 대학로 일대는 단순하게 한가지 색깔로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역사·문화적으로 많은 가치를 지닌 곳이다. 많은 예술가가 대학로 일대의 다방, 술집 등을 아지트 삼아 작품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나무요일도 단골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숨은 진주 같은 가게이다.
  • 서울 >을지로3가

    “생맥주 집은 생맥주가 맛있어야 하고 노가리는 천 원에 파는 게 예의”
    우리나라에 최초의 맥주공장이 들어선 것은 1933년이다. 일본의 자본으로 조선맥주회사와 소화기린맥주회사가 설립된다. 광복이 되고 미 군정이 관리했을 때에는 미군이 마실 맥주를 판매했다. 맥주회사의 민간 경영은 1952년부터 시작됐다. 을지로 3가 인쇄골목의 또다른 이름은 노가리골목인데, 노가리골목을 만든 가게가 을지오비베어다. 1980년 12월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영업했고, 지금은 2대째 딸이 물려받아 영업하고 있다.
  • 서울 >을지로3가

    “쌍화차의 노른자는 터뜨리면 안 돼”
    근대의 다방은 예술인들이 모여 시대를 이야기하고 문화를 꽃피웠던 장소였다. 지금은 자판기가 골목마다 서 있고 입맛에 따른 다양한 커피믹스를 쉽게 살 수 있다. 게다가 정수기가 사무실마다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은 다방을 찾지 않고, 커피 배달문화가 사라졌다. 이런 시대에 을지로에서 35년간 쌍화차를 끓이는 집이 있다. 끓인 쌍화액 위에 달걀 노른자를 띄우고 잣과 대추를 쏭쏭 썰어 올리는 쌍화차는 하루 치의 건강이다. 
  •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배오개장을 계승한 광장시장
    '광장시장'은 1905년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상설시장으로 조선후기 종로 지역에 있던 배오개장의 전통을 계승한 시장이다. 주요품목은 직물과 한복 등이며, 먹거리와 구제 상품 등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어 하루에 6만 5천여 명이 방문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 종합 시장이다.

자유와 평화를 지킨 참전용사를 기리다

11월 11일은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입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2010년부터 매년 유엔참전용사의 유가족을 초청하여 추모식을 진행했고, 2020년 처음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은 유엔묘지가 있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추모식이 열립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외에도 전국에는 유엔참전용사를 기리고 위한 기념비과 공원 그리고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 세워진 전적비가 있는데요, 이와 관련된 역사를 살펴보며 유엔참전용사를 비롯해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한 모든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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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가평군

    가평지구 전투전적비
    가평지구 전투전적비는 1958년 3월 15일에 건립되었는데, 이는 국군 제5·6사단 및 미 제9군단이 중공군과 북한군을 맞아 가평지구를 끝까지 사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제1군단 사령부와 가평군이 주관하여 건립하였다. 가평 용문산전투 (1951.5.17~28)는 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전면방어로 격퇴함은 물론, 그 여세를 몰아 화천발전소를 탈환한 전투이다. 6·25전쟁사에서 최고의 전과를 올린 전투 중 하나이다.
  • 경기 >오산시

    유엔군 초전기념비
    유엔군 초전기념비는 유엔군이 6・25전쟁 당시 북한군을 상대로 벌인 최초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기념비이다. 6・25전쟁 발발 10일만에 유엔군 선봉대인 미 제24사단 540명이 격전을 벌인 곳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매년 7월 5일이면 스미스부대 전몰장병 추도식이 거행된다.
  • 광주 >남구

    블레이즈델 대령 동상
    블레이즈델 대령은 6·25전쟁 당시 서울에 남겨진 고아 1,059명을 제주도로 피신시켜 소위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으로 불린다. 1950년 미 제5공군 군목이었던 블레이즈델 대령은 전쟁 중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사회복지시설과 임시숙소로 데려와 보살폈다.
  • 부산 >남구

    6·25전쟁에 참가한 유엔군과 한국 청년의 넋을 기리는 ‘오륙도평화축제’
    부산광역시 남구에서는 세계평화특구인 남구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축제를 연다. 대표 명승지인 6·25 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과 한국 청년의 넋을 위무하는 행사이다. 전쟁의 참상을 알려 평화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1997년에 10월에 첫 행사를 거행해 오늘에 이른다. 남구의 명물인 명승지 오륙도의 풍광도 보고, 평화수호거리에서 세계평화의 중요성과 평화수호자로서의 명분을 찾아보는 다양한 볼거리, 체험행사로 꾸며진다.
  • 강원 >횡성군

    네덜란드군 오우덴 중령 현충비
    자유와 평화를 위해 횡성전투에서 산화한 오우덴(M.P.A. den Ouden) 중령과 장병들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6년 10월, 당시 제1군 사령관이던 백선엽 대장이 현충비를 세웠다. 오우덴 대대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견된 네달란드 군으로, 국군으로 가장한 중공군이 밤에 기습공격한 횡성전투에서 큰 희생을 치렀다.  
  • 경기 >여주시

    남한강 도하작전과 무어 장군 추모전적비
    무어 장군은 제9군단장으로 취임한 직후인 1951년 2월 24일 남한강에서 도하작전을 지휘하다가 헬리콥터가 고압전선에 부딪히면서 추락사했다
  • 인천 >남구

    인천지구 전적비
    인천지구전투에서 산화한 유엔군 및 국군 장병들의 영령을 추모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각종 전투에서 거둔 혁혁한 무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비이다.
  • 인천 >연수구

    인천상륙작전기념관
    1984년 9월 인천시와 국방부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세운 기념관이다. ‘크로마이트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는 암호명으로 전개된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주도하였으며, 전쟁 전반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부산 >남구

    부산 재한 유엔 기념공원
    부산 재한 유엔기념공원은 유엔군 전몰장병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이들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다가  희생당하였다. 이 기념묘지는 1959년 대한민국과 유엔 간에 체결한 ‘재 한국 국제연합 기념묘지의 설치 및 유지를 위한 대한민국과 국제연합 간의 협정’에 의거 6・25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전몰 장병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 인천 >중구

    맥아더 장군 동상
    1957년 9월 15일 인천광역시 중구 중앙동 자유공원에 국민들의 성금을 기반으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크게 바꾸어 놓은 맥아더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북한군을 격퇴하고 인천 탈환의 표징으로 한・미 연합군이 동시에 태극기를 꽂은 자리에 동상을 세웠다.

겨울로 들어서는 날, 입동(立冬)

해마다 양력 11월 7 ~ 8일 무렵은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입니다. 입동 때의 날씨를 보며 그해 겨울 추위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입동 즈음이면 긴 겨울을 보내기 위해 김치와 같은 저장 음식을 준비하고, 추어탕과 같은 보양식을 먹으며 기력을 보충하기도 하는데 김치의 종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치미, 배추김치 외에도 지역마다 매우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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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논산시

    강경포구와 강경장의 명성을 되살린 강경젓갈시장
    우리나라 서해안 해산물이 강경포구까지 배로 올라오고, 호남평야에서 생산한 농산물이 강경포구에 모였다가 충청도와 경기도로 간다. 그곳에 강경장이 있었다. 강경장은 1930년대까지 평양장, 대구장과 함께 그 규모가 3대 오일장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와서 옛 강경장의 명성을 되찾고, 지역 특산물인 젓갈을 홍보하기 위해 ‘강경젓갈시장’ 복원에 노력하고 있다.
  • 경북 >경주시

    최부자집 며느리의 고충이 깊게 담긴 김치 사연지
    사연지는 경상도 백김치의 일종으로 경상북도 경주시와 안동시의 향토음식이다. 만드는 방법이 까다롭고 정성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안동지역에서는 제사상에도 올린다. 경주 최부자집의 내림음식으로도 유명하며 사연지라는 이름도 최부자집에서 유래한다.
  • 인천 >강화군

    강화도의 특산물 순무로 담근, 순무섞박지
    섞박지는 무, 배추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담근 김치이다. 순무섞박지는 강화도의 특산품인 순무와 새우젓, 고춧가루, 생강, 마늘, 대파 등을 넣어 담그는 섞박지이다. 순무 특유의 씁쓸하고 달큰하며 독특한 향이 각종 양념과 조화를 이루면서 시원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낸다.
  • 경기 >고양시

    "고추장 한 스푼과 채소를 탈탈 넣어 끓인 미꾸라지 털레기"
    고양의 미꾸라지 털레기는 통째로 요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미꾸라지를 넣고 끓이다가 고추장을 푼 물에 채소를 탈탈 털어 넣는다. 그래서 ‘미꾸라지 털레기’라고 부른다. 미꾸라지는 여름뿐만 아니라 봄, 가을에도 잡았다. 겨울에는 논두렁의 진흙을 파서 잠자던 미꾸라지를 꺼내 먹기도 했다.
  • 전남 >무안군

    남도의 쌉싸름한 맛, 전라남도 고들빼기김치
    고들빼기김치는 소금물에 삭혀 쓴맛을 제거한 고들빼기를 멸치젓국,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의 양념에 버무려 담근 전라남도 지방의 향토음식이다. 고들빼기는 산과 들이나 밭 근처에서 자생하는 초롱꽃목 국화과의 두해살이풀로 뿌리와 잎을 나물이나 김치로 이용한다.
  • 강원 >춘천시

    겨울철 물에 담가 먹는 김치, 동치미
    동치미는 무를 통째로 소금에 절여 배, 청각, 쪽파, 갓, 고추, 마늘, 생강 등과 함께 소금물을 부어 익힌 김치이다. 주로 김장철에 담그는 동치미는 옛 조리서에 ‘동침(凍沈, 冬沈)’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름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북부 지방에서는 동치미 국물에 면을 말아 겨울철 별미로 즐겼고 강원도 지역에서도 막국수 국물로는 동치미 국물을 기본으로 한다.
  • 전북 >부안군

    염장만큼 숙성이 중요한 젓갈
    젓갈은 어패류에 소금을 넣고 발효시킨 음식이다. 일제강점기 젓갈생산지역으로 유명한 곳 중 하나가 곰소만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간척사업으로 섬이었던 곰소가 육지가 연결되고 그 부근의 갯벌은 염전이 되었다. 염전에서 천일염이 많이 생산되어 젓갈의 재료로 쓰였다. 곰소만에서 잡히는 어패류가 다양했으므로 곰소만의 젓갈은 다양하다. 젓갈은 신선한 해산물을 잡은 즉시 바로 염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숙성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젓갈의 숙성은 곰소만의 객주들이 했는데 이들은 주로 충남의 광천굴, 폐광, 폐터널 등에서 젓갈을 숙성시켰다.
  • 충남 >홍성군

    토굴 숙성 새우젓으로 유명한 광천토굴새우젓시장
    우리나라에서 새우젓으로 유명한 곳이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이다. 광천은 고려시대 때부터 새우젓 산지로 유명했다. 조선시대에는 호남지역에서 세곡 등을 싣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조운선(漕運船)이 운행하는 길목이다. 현재 ‘광천토굴새우젓시장’은 토굴에서 숙성시킨 새우젓을 주로 판매한다. 시장의 상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새우젓을 파는 상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새우젓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 인천 >남동구

    인천에도 얼큰한 추어탕의 명소가 있다, 연락골 추어탕
    연락골 추어탕은 삶은 미꾸라지를 갈아서 얼큰한 고추장 국물에 끓여내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주민들의 향토음식이다. 본래 인천에는 ‘추탕’이 유명하였다. 특히 인천 추탕은 백여 년 전 인천 개항장의 외식(外食)으로 인기를 얻었던 인천의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근대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인천 추탕의 명맥은 잊혀졌다. 연락골 추어탕은 개항장의 화려했던 추탕과는 많이 다른 인천농민들의 소박한 음식이지만, 추탕이 인천의 대표 음식이었다는 기억을 소환하고 명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음식이다.
  • 인천 >옹진군

    김치 맛을 더욱 살려주는 옹진 까나리액젓
    까나리는 뼈째 먹을 수 있는 고칼슘, 고단백 생선이다. 구이나 찌개, 조림 볶음 등으로 요리해 먹기도 하지만 주로 젓갈을 담가 먹는다. 까나리젓은 까나리를 소금에 절여 5개월 이상 발효 숙성시킨 식품으로 숙성된 젓갈을 베보자기나 창호지에 거른 것이 액젓이다. 까나리액젓은 김치의 신선도를 높여주고 숙성을 빠르게 하고 간장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음식따라 인천 여행

우리나라 최대 무역항이 있는 인천은 1800년대 후반부터 자리잡은 화교들의 음식문화와 한국전쟁 시기 월남한 북한 실향민의 음식 등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 짜장면을 처음 시작한 중국집이 있고, 쫄면이 처음 판매된 곳이기도 합니다. 인천의 음식을 맛보며 인천의 역사를 따라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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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중구

    전국 꽃게 생산량 1위의 산지에서 맛보는 인천 꽃게탕
    인천은 전국 꽃게 생산량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최대 산지이다. 알배기 암꽃게를 맛보고 싶다면 봄철에, 살이 꽉 찬 수꽃게를 즐기고 싶다면 가을에 방문하여 싱싱한 제철꽃게를 푹 끓여낸 꽃게탕을 맛보자. 전국 최대 산지인 만큼 저마다의 손맛을 자랑하는 꽃게탕집들이 즐비하다. 인천 시내는 물론이거니와, 인천시의 수많은 섬들에서도 특별한 맛의 꽃게탕을 준비해놓고 있다. 바다건너 섬에서 맛보는 꽃게탕은 특히 더 감동스럽다.
  • 인천 >중구

    인천에서 다시 태어난 짜장면
    짜장면은 중국어로 자지앙미엔(Zhajiangmian, 炸醬麵)이라고 표기하며, 장(醬)을 볶아 면과 함께 먹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야채와 돼지고기를 넣고 식용유와 중국 된장(춘장)으로 볶은 양념을 국수와 비벼 먹는 한국식 중화요리이다.
  • 인천 >중구

    짜장면과 고향이 같은 쫄면
    쫄면은 우리나라 국수 요리 중의 하나로 차갑고 쫄깃한 면에 고추장과 채소 등을 넣어 비벼 먹는 음식이다. 쫄면은 인천에서 처음 시작된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다. 전국적으로 청소년들과 직장인 사이에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쫄면은 지금처럼 인스턴트식품이 많지 않았던 1970~1980년대에 가장 많이 찾는 음식 중 하나였으며, 지금도 떡볶이 등과 함께 분식의 대표 음식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인천 >동구

    노동자들의 마음을 배불려주었던 화평동세숫대야냉면
    화평동냉면은 1970년대부터 인천부두의 인부들과 공장근로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푸짐한 양의 냉면을 큰 그릇에 담아 제공하면서 ‘세숫대야냉면’이라는 별칭이 붙은 인천광역시 동구 화평동의 향토음식이다.
  • 인천 >중구

    중국황제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던 생선, 인천 밴댕이회무침
    밴댕이회무침은 손질한 밴댕이를 잘게 썰어서 배, 야채 등과 함께 매콤한 고추장양념에 비벼낸 인천광역시의 향토음식이다. 예로부터 밴댕이가 많이 잡혔던 인천에는 여러 곳에 밴댕이골목이 많은데, 인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구 북성동 차이나타운 옆의 밴댕이골목과 남동구 구월3동의 밴댕이골목이 유명하고, 중구 연안부두에는 ‘연안부두 밴댕이 회무침거리’가 조성되어 관광객들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 인천 >강화군

    강화도의 특산물 순무로 담근, 순무섞박지
    섞박지는 무, 배추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담근 김치이다. 순무섞박지는 강화도의 특산품인 순무와 새우젓, 고춧가루, 생강, 마늘, 대파 등을 넣어 담그는 섞박지이다. 순무 특유의 씁쓸하고 달큰하며 독특한 향이 각종 양념과 조화를 이루면서 시원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낸다.
  • 인천 >미추홀구

    바다의 천덕꾸러기가 귀하게 여겨지기까지, 인천 물텀벙이탕
    물텀벙이탕은 아귀를 미나리ㆍ쑥갓ㆍ콩나물ㆍ파와 각종 양념으로 끓여낸 탕으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시작한 인천의 향토음식이다. 물텀벙이는 예전에는 그물에 걸리면 바다에 버려질 때 ‘텀벙’소리가 났다해서 붙여진 아귀의 속칭이다. 다른 지역과는 다리 인천지역에서는 아귀라 하지 않고 물텀벙이로 칭한다. 한국전쟁이후 인천항의 부두노동자들이 값싼 아귀를 식사나 안줏거리로 즐겨먹기 시작하면서 물텀벙이탕이 등장하였고 1970년대부터 음식상품화 되었다.
  • 인천 >중구

    한국 화교들의 향수, 인천 선린동 공화춘(共和春)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 건립된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공화춘은 짜장면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공화춘은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들이 모이는 동향회관의 성격으로 출발해 1913년부터 1983년 폐업할 때까지 대표적인 중국집으로 명성을 날렸다. 공화춘은 개항 이래 한국 땅으로 새 삶을 찾아 건너온 화교들의 애환이 서린 장소이기도 하다.
  • 인천 >중구

    “이것은 치킨인가 과자인가?” 신포닭강정
    “치킨공화국” 대한민국에는 종주국 미국보다도 다양한 종류의 닭튀김 요리가 있다. 우리는 닭껍질 튀김, 닭똥집 튀김, 파닭, 마늘치킨 등 세계 각지에서 들어온 맛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해 냈고, 이제 치맥은 대표적인 한류문화로 수출되고 있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닭강정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과자인 강정의 조리법을 닭튀김에 적용시켜 탄생한 닭강정은 대한민국에서 탄생한 음식이다. 그중에서 신포닭강정을 원조로 치는데, 그 탄생배경에는 신포국제시장과 인천의 역사가 담겨있다.
  • 인천 >강화군

    알싸한 순무김치와 맛의 궁합을 이루다, 강화 순무굴밥
    굴밥은 물에 불려 둔 쌀로 밥을 짓다가 뜸을 들일 때 굴을 넣어 지은 밥이다. 굴밥은 예로부터 서해안 굴의 주산지였던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향토음식이다. 특히 강화도의 순무굴밥은 강화도의 특산물인 순무와 굴을 이용하여 만든 굴밥으로서 강화도에서만 맛 볼 수 있는 강화도식 굴밥이다.

보성의 싱그러운 녹차 향 따라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녹차의 도시 보성. 끝없이 펼쳐진 녹차밭을 거닐며 힐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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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보성군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 구 보성여관
    구 보성여관은 1935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세워진 2층짜리 고급 여관이다. 1층의 온돌방들은 객실로 꾸며졌고 2층의 4칸짜리의 넓은 다다미방은 연회장으로 이용됐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남도여관’의 실제 장소이다. 한국인 강활암(姜活岩)이 지은 건물로, 당시 벌교를 많이 찾던 일본인들을 상대로 여관을 하기 위해 업소용으로 건축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여관으로 영업을 계속하다가 1988년부터 상점으로 이용되었다. 2008년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 보성군이 17억 원을 들여 2년간의 공사 끝에 옛 모습을 복원했다. 현재는 카페, 소극장, 숙박업소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 전남 >보성군

    친족의 화합과 결속을 염원하는, 보성 열화정
    열화정은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강골길 32-17(오봉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62호이다. 1845년(헌종 11)에 조선후기의 문신 이진만(李鎭晩:1795~?)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하였다. 열화정의 ‘열화(悅話)’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시름을 달래련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친족의 화합과 결속을 염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열화정이 있는 강골마을은 영화 「서편제」의 배경으로 유명한 곳으로, 소박하고 산수가 아름다운 고장이며, 전통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 전남 >보성군

    녹차의 수도 전남 보성에서 열리는 '보성다향 대축제'
    보성은 우리나라 최대의 차 생산지이자 차 산업의 발상지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녹차의 수도이다. 이러한 자부심 속에서 1985년 ‘다향제’가 시작되었고, 2009년에 ‘보성다향대축제’로 축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보성다향대축제에서는 풍다를 기원하는 다신제와 관광객이 직접 찻잎을 딸 수 있는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 전남 >보성군

    거북머리혈의 명당지에 건립한 영광정씨 고택
    전라남도 보성군 봉당리는 영광정씨 집성촌으로, 조선 후기에 입향 후 건립한 종택이다. 도선국사가 전국의 명당터를 기록한 '도선비결'에 이 터는 영구하해(靈龜下海,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바다로 들어가는 형국)라 명기되어 있다. 안채, 사랑채, 사당, 문간채, 곳간채를 고루 갖춘 양반가옥으로, 3,000평의 넓은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는 담장을 둘러 분리하고, 일자형의 살림채들이 지형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어 남도지방 전통가옥의 특성을 보여준다. 400여년 전에 정손일이 초가로 건립하였고, 정손일의 9대손인 정각수가 1890년대 초가를 헐고 기와를 얹었다. 민족주의 운동과 교육사업에 참여한 후손 정해룡이 중건하며 사랑채 앞마당에 연못을 두고, 정원을 꾸며 사대부의 멋을 담았다.
  • 전남 >보성군

    판소리의 성지 보성에서 열리는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라남도 보성은 근대 판소리의 성지로, 서편제에서 갈라진 강산제(岡山制)를 창시한 보성 서편제의 비조인 박유전(朴裕全)과 보성소리를 만든 정응민 등의 소리를 계승하고 기념하고, 판소리를 대중화하기 위한 축제의 장이다. 1998년 제1회 축제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천하제일 명창무대, 전국판소리경연대회, 판소리 성지순례, 판소리 한대목 배우기 등의 다채로운 행사를 펼쳐왔다.
  • 전남 >보성군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진출한 우리의 전통음료, 보성 녹차
    보성 녹차는 찻잎을 발효시키지 않고 딴 채로 바로 가마솥에 넣고 가열하여 손으로 비벼 건조시킨 차로서, 우리나라 최대의 녹차 생산지인 전라남도 보성군의 특산물이다. 보성군은 전국에서 생산되는 녹차잎의 총 생산량 중 약 34%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녹차생산지이다.
  • 전남 >보성군

    보성소리의 창시자 박유전
    전주통인청대사습에서 「심청가」로 장원을 한 상으로 한양에 올라와 대원군의 총애를 받으며 운현궁에 머물며 지낸 10여 년 동안 동편제 소리를 한결 세련되게 다듬어 새로운 스타일의 판소리, 즉 섬진강을 중심으로 광주와 보성, 나주와 고창 등 전라도 서쪽지역에 전승되는 서편제의 창시자가 되었다. 말년에 전라남도 보성 강산리에서 여생을 보내며 다시 서편제와 구별되는 강산제를 창시해 이날치와 정재근에 의해 계승되었다.
  • 전남 >보성군

    머슴이 의병장, 주인이 참모 –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
    전라남도 보성군은 의병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보성군은 임진·정유재란부터 한말·일제강점기까지 777명의 의병이 활동한 곳이다. 구한말 보성 의병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집이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에 있다.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이다. 이곳은 최근까지 현지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근대역사유적지였으나 문화재청이 2017년 12월 5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99호로 지정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은 의병이었던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집이다. 안규홍은 머슴의 신분이었고 박제현은 주인이었다. 안규홍은 머슴 출신으로 의병을 조직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32세에 짧은 생을 마쳤다. 부농이었던 박제현은 안규홍 의병부대의 운량관(運糧官)으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문덕면 동산리 대지주였던 박제현의 소유였던 이 집은 1872년에 신축되고 1933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되며 구한말 의병장의 주거지가 국내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여서 그 역사적인 가치가 남다르다.

군산, 한국 근대의 타임캡슐

많은 관광객이 찾는 항구도시 군산, 그 안에는 일제 수탈의 역사가 있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한 군산항은 다른 항구와는 다르게 쌀 수출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후 경제적으로 일본에게 철저하게 수탈과 이용을 당했습니다. 여전히 남아있는 일제 강점기의 건물들은 당시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거주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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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군산시

    ‘영원한 일본의 군산’을 꿈꾸었으나 -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
    전라북도 군산시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구 히로쓰 가옥’으로 불리던 집이다. 히로쓰는 군산에서 재산을 불리고,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예전에는 1925년 저택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일본인 학자가 후손 인터뷰 등을 통해 1934년 신축을 주장해, 정확한 연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인 고급 주택가였던 치요다마치(현 월명동) 건너편 월명산 자락 신흥동에 지어진 이 집은 일본산 삼나무를 써서 일본식으로 건축되었다. 방 하나에 온돌을 설치해 한국식 주거문화를 일부 받아들인 흔적도 보인다. 넓은 터에 2층 본채와 객실체를 붙여지었고, 뒤뜰에는 별채를 두었다. 일본식 정원을 갖춘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군산의 근대역사 자취를 답사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수 코스로 꼽힌다.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에도 이 저택이 등장한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등록문화재 제183호다.
  • 전북 >군산시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의 인연과 악연-군산 동국사 대웅전
    전라북도 군산시 동국사의 뿌리는 1909년 문을 연 일본 ‘금강선사’라는 포교당이다. 금강선사는 일본 불교 조동종의 우치다 붓칸이라는 노승이 군산으로 건너와 세웠다. 일본 불교는 1877년 부산 개항 당시부터 조선 곳곳에 사찰을 세워 식민지 침략을 도왔다. 금강선사는 금강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1913년 식민지에서 농장 경영으로 부를 축적한 신도들의 시주로 절을 지었다. 후일 동국사 대웅전이 된 금강사 본당은 1932년 새로 지어졌다. 일본식 사찰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건축물이다. 금강사에는 일본인 신도의 납골당이 있었으며, 전사한 일본군의 위패도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동국사라는 이름으로 개칭했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사에서 모셔온 소조여래삼존상과 불상에서 나온 복장유물은 한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국사 종각 옆에는 2010년대 들어 평화의 소녀상과 일본 조동종의 참회의 비석이 세워졌다. 비문은 일본 조동종이 종단 차원에서 1993년 발표한 참사문(懺謝文)을 발췌해 새겼다. 동국사는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의 인연과 악연을 보여주는 희귀한 공간이다.
  • 전북 >군산시

    근대에게 말을 걸고 싶다면 - 군산의 근대 역사 문화 공간들
    전라북도 군산시는 근대 건축물이 170건 이상 남아 있어 ‘근대의 타임캡슐’로 불린다. 1900년대 군산 내항 축항 건설을 시작으로 군산은 한반도에서 중요한 항구로 부상했다. 한반도 쌀 반출량의 4분의 1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일본인들의 유입도 계속 늘어 1920년대에 이르면 군산 인구 가운데 한국인 대 일본인의 비율이 6대4로 거의 비슷한 정도에 이르렀다. 군산 내항 앞 해망로 일대에는 근대문화유산이 여러 건 있다. 1920년대부터 군산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이른바 원도심을 중심으로 다양한 건물이 지어졌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근대 군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군산 원도심 일대의 어느 골목에 들어서도 군산 근대의 면모를 보여주는 유산을 만날 수 있다. 군산은 거리와 골목을 천천히 거닐면서 근대의 의미를 찬찬히 짚어보기 적합한 도시다.
  • 전북 >군산시

    금고를 채웠던 것은……,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전라북도 군산시 구 일본 제18 은행 군산지점은 1907년 설치되었다. 군산은 1899년 개항장이 된 이래 호남평야의 미곡반출 항구로서 일제강점기 내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구 일본 제18 은행 군산지점 건물은 1911~1914년 사이에 건립되었다. 특이하게 영업장으로 쓰인 본관과 사무실용 별채, 금고 겸 창고였던 별채 등 3개 동으로 지어졌다. 본관과 별채들은 바짝 붙여지어서 짧은 통로로 연결된다. 영업장과 금고 사이에는 철제문이 설치되었다. 군산세관이나 조선은행 군산지점 등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소박한 외관을 보이지만, 일제의 ‘식민지 수탈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공간으로써 역사적 가치가 높다. 후에 대한통운 소유의 건물이 되었다가, 2013년 이후 군산 근대미술관이 되었다.
  • 전북 >군산시

    미곡집산지 군산의 카페 미곡창고
    군산의 카페 미곡창고는 1960년대에 지어진 농협 미곡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카페이다. 당시의 외관이 남아 있으면서도 인테리어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카페이다. 창을 크게 내어 창고의 갑갑한 단점을 보완했고, 전문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커피 맛도 일품이다. 유기농 밀로 직접 만든 빵도 맛있다. 군산역과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근처에 있어서 군산 근대거리를 관광한 후 마무리하기 좋은 곳이다.
  • 전북 >군산시

    쌀 수탈의 한이 어린 통로 – 전북 군산 해망굴
    구 군산시청 앞의 중앙로(구 명치정통)는 군산 원도심을 동서로 연결하는 도로이다. 중앙로의 서쪽 끝에 해망령(海望嶺)이 있는데 일제는 군산시내와 수산물의 중심지인 해망동(현 해신동), 미곡을 반출하던 군산 내항을 연결하기 위해 해망령에 터널을 만들었다. 1926년 제3차 군산항 축항공사가 벌어졌는데 이때 해망굴(海望堀)도 함께 건설되었다. 해망굴 공사는 돌산을 깨서 만드는 난공사여서 인부 10여 명이 사망했는데 일제는 희생된 조선인 인부의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않았다. 이에 군산 노동운동의 대부이자 독립운동가인 조용관 선생이 투쟁을 벌여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에는 군산에 주둔했던 인민군의 지휘본부가 연합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해망굴에 설치되기도 했다. 근대기에 만들어진 군산의 대표적 토목 구조물인 해망굴은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84호로 지정되었다.
  • 전북 >군산시

    식민지 군산을 배경으로 한 '탁류'의 작가 채만식
    채만식은 군산의 작가다. 「레디메이드 인생」,「탁류」,「태평천하」 등의 대표작이 있으며, 그 소설들은 식민지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하며 비틀어 웃음을 준다. 풍자소설이자 세태소설로 채만식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의 대표작 『탁류』에는 군산과 금강이 나오고, 군산시 장미동의 미두거리가 나온다. 그의 문학비와 소설비가 군산 시내에 있으며, 채만식 문학관도 건립되어 있다. 묘소도 군산시 옥구군 계남마을에 있다.

조선왕조, 그들의 신화

조선왕조는 유교적 이념 아래 500여년을 써내려간 역사입니다. 조선 왕이 유교적 이념아래 태어나 죽을때까지의 의무와 책임을 박물관부터 종묘까지 따라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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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종로구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샘솟던 우물, 종묘 어정
    서울특별시 종로구에는 조선 500년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있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곳으로 조선왕실의 사당이며, 종묘 앞에는 왕이 마실 물을 길었던 어정(御井)이 남아있다. 종묘 어정의 물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더운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종묘가 자리 잡고 있는 동네의 이름은 훈정동이라고 붙여졌다.
  • 서울 >종로구

    영조의 어진 정치를 보여준, 창경궁 함인정
    함인정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 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1833년(순조 33)에 중건되었다. 함인정이란 정자명은 ‘어짊에 흠뻑 젖는다’는 뜻으로, 실제 왕들이 이 함인정에 백성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애환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 서울 >종로구

    산청 수청 인청의 서울 삼청동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은 두 가지 유래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산청(山淸)․수청(水淸)․인청(人淸)에서 유래했고, 또 하나는 도교신(道敎神)인 태청(太淸)․상청(上淸)․옥청(玉淸)의 삼청성신(三淸星辰)을 모신 삼청전(三淸殿)이 있던데서 유래했다. 산이 맑고, 물이 맑고, 사람이 맑다는 좋은 뜻을 가진 지명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속세의 때를 씻기 위해 노니는 곳이었으나 군사독재와 삼청교육대의 기억이 있어 슬픈 지명이기도 하다.
  • 경기 >광주시

    조선왕조의 권력을 보여준 조선성곽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면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을 결정하고, 그해 10월에는 국왕과 정부관리들이 한양으로 옮겨갔다. 한양성의 전체 길이는 약 18km로, 외겹성의 평산성으로 되어있다. 남동쪽과 북쪽에는 각각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 구축되었다. 특히 수원화성에는 총포에 대비하여 숙종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큰 성돌로 쌓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학자들의 견해를 반영하여 벽돌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점이 특징이다. 조선 전기에는 산성 축성이 크게 유행하였다. 태종 10년경을 전후로 북방의 여러 거점 성곽과 경상도·전라도에 대규모 산성을 축조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약 111개의 산성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대 이후 산성은 점차 퇴조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많은 산성이 축조되었다. 읍성의 축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다.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바닷가에 읍성 축조가 계속되었으며 특히 주민들이 모여 사는 읍성이 190여 개나 되었는데 약 절반에 해당하는 읍들에 새로 성을 쌓았다.
  • 서울 >종로구

    두칸 반원형 홍예다리 창경궁 옥천교
    창경궁 옥천교(昌慶宮 玉川橋)는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앞 금천(禁川)인 옥류천을 가로 질러 놓여진 돌다리이다. 궁궐 정전(正殿)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정전 정문과 궁궐대문 사이를 흐르는 금천을 건너가게 되는데, 옥천교는 이 금천 위에 놓인 돌다리로 홍화문과 정전 대문인 명정문(明政門) 사이에 위치한다. 옥천교는 1963년 보물 제386호로 지정되었다.
  • 서울 >종로구

    조선을 떠바친 한 기둥 사직단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漢陽)에 정하로 국가 의례를 고려 제도를 따라 사직단을 경복궁 서쪽에 설치하였다. 사직단 공사는 1395년(태조 4) 착수하여 설단(設壇)을 쌓고 담장을 두었으며, 안쪽에 신실(神室), 신문(神門)을 두었다.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돌로 만들어진 제단이다. 1963년 사적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 서울 >종로구

    활을 쏘며 호연지기를 길렀던, 창경궁 관덕정
    관덕정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 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창경궁 내 춘당대 터 위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춘당대에서 벌어지는 각종 과거와 활쏘기 등 무술 연마를 왕이 신하들과 관전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잊지 말아야 할 '목포의 눈물'

1897년 개항한 목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선의 6대도시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식민지 시대의 건물이 많이 남아있는데요, 지금은 당시의 생활상과 장소성 근대문화유산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일제에 철저하게 이용당했던 증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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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목포시

    댕기머리 소녀들의 야무진 만세 함성, 목포 정명여자중학교 구 선교사 사택
    목포 정명여학교는 1903년 미 남장로교의 선교에 일환으로 세워진 학교다. 전라남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정명여학교는 1919년과 1921년 만세 시위를 벌인 학교로 유명하다. 댕기머리 소녀들은 비밀리에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겼다. 정명여학교는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 당했다가 1947년에야 재개교했다. 선교사 사택은 1905~1910년 사이 지어진 석조 건물이다. 목포 산지의 화강암으로 지어진 선교사 사택은 2채다. 현재 정명여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쓰이는 사택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전남 >목포시

    민족자본 은행의 자존심,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호남은행은 지역의 대부호들이 1920년 설립했다. 호남은행은 총독부의 통합 조처에 순응하지 않고 1929년 목포지점 건물을 신축했다.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을 의식하여 규모와 외관에서 손색없이 지었다. 개항 도시 목포의 산업자본 형성에 기여한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일제 강점기 은행의 역사와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근대문화 유산이다.
  • 전남 >해남군

    '제국의 불빛'에서 희망으로, 해남 구 목포구 등대
    해남 구 목포구등대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을 돕는 ‘제국의 불빛’으로 건립되었다. 원통형 콘크리트로 지어진 구 목포구등대는 비례 균형이 뛰어나 후대 등대 건축의 표본이 되었다. 목포항~다도해를 항해하는 선박들은 1세기가량 구 목포구등대의 안내를 받아 거센 바닷길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 전남 >목포시

    근대의 슬픔이 오롯이 남은 항구 –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1897년 개항한 전라남도 목포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선 4대 항구이자 6대 도시로 꼽히는 근대도시로 성장했다. 현재 유달동, 만호동에 해당하는 목포의 구 도심은 일본 등 외국자본에 의해서 간척된 계획도시였다. 만호동과 유달동 일대의 번영로에 근대건축 유산이 집중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2018년 8월 6일 이 일대 11만4,038㎡(602필지)를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718호로 지정했다. 기존 ‘점’(點) 단위 개별 문화재 중심의 보존에서 탈피해 문화재청이 ‘선(線)‧면(面)’ 단위 문화재 등록제도를 도입한 첫 사례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개별 건축물은 15개로, 일본식 가옥 4곳, 구 목포부립병원 관사, 구 목포 일본기독교회, 상가주택 6곳, 구 동아부인상회 목포지점, 목포 해안로 붉은 벽돌창고, 구 목포 화신연쇄점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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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류는 지키고, 공습은 피하고 - 구 목포부청 서고 및 방공호
    ‘구 목포부청 서고’는 1932년 건축된 석조 건물이다. 거칠게 다음은 돌과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21단 높이로 쌓아 올린 2층이며, 정면 상단에는 그리스 신전처럼 삼각형의 페디먼트를 설치했다. ‘구 목포부청 서고’는 유달산 노적봉 남쪽 사면에 있는 옛 목포부청 청사 뒤편에 있다. 목포부청 청사는 1900년 지어져 일본영사관이 사용하다가, 1914년 목포가 부(府)로 지정되자 목포부청으로 쓰였다. 목포부청은 붉은 벽돌건물이고 서고는 미색 석조여서 대조적이다. 목포부청 청사는 해방 후 목포시청, 목포시립 도서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목포근대역사관 1관이다. 목포부청 청사는 사적 제289호다. 목포부청 뒤에는 일제강점기 말에 판 방공호도 있다. 방공호는 미군의 조선 상륙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군 제150사단이 설치한 길이 90m의 동굴 형태다.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방공호를 팠을 것으로 보인다. ‘구 목포부청 서고 및 방공호’는 2014년 등록문화재 제58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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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에서 교회로, 그리고 문화센터로 -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
    전라남도 목포시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은 일본 불교 사찰에서 한국 사찰로, 다시 한국의 교회로, 문화센터로 운명이 바뀐 흔치 않은 사례다. 일본 정토진종의 동본원사는 목포 개항 이듬해인 1898년 목포에 지원을 설치했다. 목포지원은 곧 목포별원으로 승격했고, 1905년 현재의 위치에 목조 법당을 지었다가, 1930년대 초 석조 법당을 건립했다. 지붕이 높고, 일본 전통 사찰의 외양을 간직한 동본원사 목포별원은 해방 후 정광사라는 한국 불교의 사찰이 되었다. 정광사는 정광중학교를 탄생시키는 등 교육에 힘썼다. 목포역 인근이라 주요 법회가 열리는 공간이기도 했다. 1957년 정광사는 목포중앙교회에 넘어갔다. 불교 사찰이 기독교 예배당이 되는 희귀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목포중앙교회는 유신 시절부터 5·18,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목포 민주화 운동의 중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목포중앙교회가 2008년 이전한 뒤 2010년 지역의 문화센터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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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달산 자락 다순구미의 현대사 - 조선내화주식회사 구 목포공장
    전라남도 목포시 온금동 조선내화주식회사 옛 공장은 1938년 일제강점기 말기에 설립됐다. 내화란 불에 잘 견디는 성질을 일컫는 말로서, 조선내화에서는 무기용 철을 생산하는 용광로를 짓는데 들어가는 내화벽돌을 생산했다. 조선내화는 해방 후 한국인에게 불하되어 새 출발했다. 1953년에는 이동훈이 인수하여 목포 향토기업으로서 성장했다. 조선내화는 보해양조, 행남사와 더불어 목포 3대 기업으로 꼽혔다. 1960~198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제철, 시멘트, 유리 공업에 반드시 필요한 내화제를 생산하여 세계적인 내화제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목포 공장은 1997년 조선내화 본사가 전라남도 광양으로 옮겨감으로서 가동을 중단했다. 조선내화 노동자들은 다순구미(온금동) 일대에 마을을 이룰 정도로 모여 살았다. 조선내화는 2017년 목포 공장 내 건물 5동, 굴뚝 3기, 공장 설비 5기를 등록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조선내화 목포 공장의 설비와 건물은 내화 산업의 일관 공정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목포시 서산·온금지구 재개발과 맞물려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2019년 현재 추가로 공장 부지를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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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로 여울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트로트 가수, 천부적 목소리를 타고 난 소녀 이난영은 일제 강점기 여러 무대에서 노래하다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스타덤에 올랐고, 이 노랫가락으로 조선인들의 애간장을 녹이며 1930년대 대중가요의 전성시대를 열어 국민 여동생으로 사랑받았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 노래들은 항구도시 목포를 추억의 명소로 되살리는 마력을 발휘했으나, 눈물이 마를 날 없도록 애달팠던 사랑과 이별로 굴곡진 삶은 그녀의 애잔한 노래들만큼이나 슬프고 고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