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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로 구성한 지역문화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

옛적에 신던 여름 신발, 나막신

'딸깍딸깍'

어? 무슨 소리죠? 아하, 나막신이 바닥과 부딪혀 나는 소리인 것 같아요! 여러분은 나막신을 신어본 적이 있나요? 요즘 신발은 대부분 천과 가죽으로 만들어져서 나막신처럼 나무로 만든 신발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1910년 이후 등장한 고무신의 영향으로 나막신은 차츰 설 자리를 잃어버리다 1940년대 전후로 사라졌거든요. 나막신은 원래 조선시대 말기에 짚신과 함께 대중적으로 신는 신발이었다고 해요. 가죽신이 비싸서, 비오는 날 진흙이 되어버린 땅에서 신기 위해 쓰였다고도 합니다.

나막신에 대해 알아보니 과거에 또 어떤 신발들을 신었는지 궁금해지지 않나요? 삼국시대 이전에는 풀과 가죽으로 만든 이(履)와 화(靴)라는 신발을 신었다고 해요. 조선시대 양반가 부녀자들은 앞코와 뒤축이 장식된 낮은 높이의 신발인 당혜를 신었다고 합니다. 또 미투리라는 질 좋은 짚신이 있었는데요. 이는 삼이나 모시, 노끈을 엮어서 만들었다고 해요. 정말 다양한 신발들이 있었죠?

주룩주룩 비가 오는 날, 혹은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 여러분은 어떤 신발을 신으시나요? 신발 젖을 걱정 없는 장화나 통풍이 잘되는 샌들을 많이 신으실 텐데요. 장화와 샌들을 신을 때 과거 조상님들이 신었던 나막신도 한번 떠올려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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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비오는 날 신는 나막신
    나막신은 비 오는 날 진흙땅에서 신기 위해 한 덩어리의 목재를 깎아 만든, 굽이 높은 신발이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의 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비가 올 때는 물론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에도 신었다. 1910년 이후 고무신이 등장하자 경쟁에서 밀려 1940년대를 전후하여 거의 사라졌다. 
  • 전국

    삼 ·모시 ·노 등으로 삼은 신, 미투리
    미투리는 짚신 중에서도 질이 좋은 것으로, 삼(麻)이나 모시, 노끈 등을 엮어 만든다. 미투리는 선비들이 나들이할 때 신던 것으로 미투리 중 섬세한 제품은 사대부들이 주로 신었다. 미투리는 형태로 보면 신목이 낮은 신발의 총칭인 이(履)의 일종이다. 미투리는 흔히 날이 여섯 개나 여덟 개였으며, 아주 정교한 총(미투리의 앞과 옆을 이루고 있는 올) 50~60개로 이루어졌다. 원래 미투리는 삼으로 만들었는데 점차 모시, 노끈, 닥나무 껍질, 칡넝쿨이나 종이와 무명실 등의 좋은 재료로 섬세하게 엮기도 하였으며 왕골이나 부들로 만든 미투리는 염색하여 무늬를 넣어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투리는 짚신보다 튼튼하여 양반층과 서민들이 고급 신발로 취급하였다.
  • 전국

    비 오는날 또는 진 땅에서 신는 신발, 나막신
    나막신은 비오는 날 진 땅에서 신기 위하여 통나무를 파서 깎아 만든 굽이 높은 신이다. 나막신은 나무로 신발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두껍고 큰 목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은행나무·오동나무·피나무·소나무·오리나무처럼 제작이 쉬운 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들었다. 목재의 겉이 마르지 않도록 기름을 칠하기도 했다. 나막신은 신분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신었다. 굽이 높아 비에 젖어 질어진 땅을 걸어다니 좋았으나, 무겁고 활동성이 떨어져 먼 길을 가거나 말을 탈 때는 착용하지 않았다. 맑은 날에도 많이 신었으며, 굽이 닳으면 새 굽을 바꿔 달았다고 한다. 나막신은 이처럼 널리 신겨지다가 1910년 이후 등장한 고무신으로 인해 차츰 설 자리를 잃어버려 1940년대를 전후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 전국

    구름무늬가 새겨진 신발, 운혜(雲鞋)
    운혜(雲鞋)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부녀자가 신는 신으로 신코[신발 앞쪽의 뾰족한 곳]와 뒤축[발 뒤쪽의 둥그런 부분 중 두둑한 맨 뒤쪽의 가운데]에 다른 색의 무늬를 장식한 신발이다. 신발 바닥에 짐승 털로 만든 조각인 담(毯)을 깔아 따뜻하다는 의미에서 ‘온혜(溫鞋)’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신발의 앞쪽 모양이 제비의 부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제비부리 신’이라고도 불린다. 운혜는 앞코에 죽엽문(竹葉紋)을, 뒤축에는 굼벵이 형태의 장식을 붙여서 마무리한다. 이러한 형태는 개화기 개발된 고무신에 그대로 반영되어 최근까지 그 형태를 유지해왔다. 운혜는 화려하고 조화로운 색감과 날렵한 곡선 형태가 어우러져 한국적 미의 아름다운 외양을 나타내고 있다.
  • 전국

    조선시대 양반가 부녀자들의 신발, 당혜
    당혜(唐鞋)는 조선시대 부녀자가 신던 가죽신으로, 당초문(唐草文)으로 앞코와 뒤축을 장식한 낮은 높이의 신발이다. 조선시대 여자의 신으로는 당혜⸱온혜(溫鞋) 등이 있었는데, 당혜는 좋은 집안인 양갓집 부녀자가 신었고 온혜는 일반 백성 집안의 부녀자가 신었다. 중국 당나라에서 통일신라시대 무렵 들어와 조선시대 말엽까지 신었으며 ‘당혜’라는 명칭은 당초문(唐草紋) 장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혜의 일반적인 형태는 남자용 신발보다 앞코가 더 뾰족하게 올라가 있다. 또한 현대의 고무신처럼 신울의 간격이 좁아 오랫동안 신고 걷기는 불편하였다. 그리고 신발의 오른쪽, 왼쪽의 구별이 없었다. 당혜의 신코에서 뒤축으로 이어지는 곡선의 아름다움은 당혜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다른 나라의 신발과는 구별되는 조선시대 특유의 형태적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 서울 >송파구

    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화혜장
    화혜장은 전통 신발을 만드는 장인이다. 조선시대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갖신’을 신었다. 이러한 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이 ‘화혜장’이다. 전통 신발 제작은 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수십 번의 제작공정을 거쳐 이루어질 만큼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가 요구된다.
  • 전국

    남방계와 북방계의 신발, 이(履)와 화(靴)
    이(履)는 신목이 짧은 신의 총칭으로 신발의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며, 남방족계의 신이며, 화(靴)는 장화와 같이 신목이 높이 달린 신으로 방한, 방침에 적당하여 무풍적인 북방계의 신이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두 종류의 신을 혼용하여 착용했기 때문에 먼저 생긴 신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고유 복식이 북방호복 계통이므로 고유의 신은 목이 긴 화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삼국 이전에는 이미 풀과 가죽을 이용한 신을 신었으며, 부여의 초탑, 마한의 초갹, 초갹답, 초리 같은 다양한 신의 종류를 바탕으로 삼국시대의 신발이 발달하였다.

철도의 역사와 문화

6월 28일은 철도의 날로 교통수단인 철도의 가치를 높이고 철도 종사자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제정된 날입니다. 철도의 날은 본래 1899년 9월 18일 한국에서 최초로 개통한 경인선을 기념하기 위해 1937년부터 지정하여 유래했는데요. 그러나 1937년은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 아픔을 겪은 시기로, 철도 노동자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일본 황제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강요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겪게 됩니다. 그러한 연유로 2018년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국(의정부 공무아문 철도국) 창설 날짜(1894년 6월 28일)에 맞추어 이날을 철도의 날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2024년 철도의 날은 1894년 6월 26일 이래 130주년이 되었습니다. 1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철도 역사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데요. 철도의 날을 맞아 낭만적인 감성과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기차를 타고 우리 지역에 남아있는 철도를 따라 역사와 문화를 엿보러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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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고양시

    구 역사(驛舍) 일산역. 사람의 길이 열린다
    고양일산역(高陽一山驛)은 2006년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국가 등록문화재 제294호 지정되어 한국철도공사에서 관리·보호되는 장소이다. 1933년에 지어진 것으로 ―자형 평면 구조에 십자형 박공지붕(배 집 양편에 八자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을 얹었다. 일산역은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철도 경의선의 중심역이며 경의선 역사 중 유일하게 남겨진 곳으로 일제강점기 철도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 전남 >곡성군

    섬진강을 따라 흐르는 철로 - 구 곡성역사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구 곡성역은 1933년 전라선 철도 남원~곡성 구간이 개통되면서 역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섬진강 모래를 실어 전국으로 보내는 역할이 주된 임무였다. 1937년 전라선이 호남선 익산역에서 전라남도 여수역까지 전 구간 개통되면서 여객 수송도 늘어났다. 호남지방 동부의 유명한 명승지를 거쳐 가는 노선이었고, 이용 인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라선은 1980년대 말부터 복선화가 진행되었다. 곡성군을 지나가는 부분은 섬진강 흐름을 따라 구불구불했으나, 직선으로 철로를 이설하면서 1999년 곡성읍에 새로운 역이 생겨 이전 곡성역은 구 곡성역이 되었다. 곡성군과 코레일은 2004년 구 곡성역이 등록문화재가 되면서 적극적인 활용 사업을 진행해 2005년 ‘섬진강 기차마을’을 개장했다. ‘섬진강 기차마을’은 폐선로를 이용한 레일바이크와 증기기관차 운행을 비롯해 국내 최다 장미 품종을 갖춘 장미원 조성까지 성공적인 철도 테마파크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 대구 >동구

    한국 근대철도의 달빛, 대구 구 반야월역사
    대구광역시에서 경상북도 영천과 경상북도 포항으로 가는 길목에 반야월이라 불리는 지역이 있다. 반야월은 공식 지명이 아니지만 후삼국 시대부터 전해지는 전설로 유명한 지명이다. 1917년 대구~하양 간 협궤 선로가 놓이면서 기차가 반야월을 지나가게 되었다. 반야월역사는 1938년 협궤가 광궤로 확장 개통될 때 건립되었다. 대구선 반야월역은 반야월 주민들의 통근과 통학로인 동시에 화물을 수송하는 중요한 역이었다. 1960년 화물전용 홈이 개설되었고, 1971년부터는 안심 지역의 석탄저장소이자 수송 역이 되었다.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박공이 돋보이는 반야월역사는 일제강점기 후반 남부지방의 표준 역사로 꼽힌다. 대구선이 이설되면서 반야월역은 2008년 폐쇄되었으나, 2010년 인근 대구선 반야월 공원 내로 이전 복원되었다.
  • 강원 >원주시

    레일바이크가 들어선 간현역과 간현유원지
    강원도 원주 간현유원지는 1970~90년대 대학생들의 MT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서울 청량리 역에서 중앙선 기차를 타고 올 수 있었다. 2011년 중앙선 간현역이 폐쇄되면서 2013년 간현역에서 판대역까지의 6.5Km에 레일바이크가 운영되고 있다. 또한 간현관광지 내 소금산 등산로 입구에서는 소금산 출렁다리를 건널 수 있다. 섬강 위 100m 상공에 설치되어 하늘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다리는 한국인이 꼭 가봐야할 한국관광명소 100선에 선정되었다.
  • 강원 >철원군

    금강산으로 이어주던 길, 철원 금강산 전기철도 교량
    상류계층의 전유물과 같았던 관광은 대량운송을 가능하게 한 철도의 등장으로 보다 넓은 계층에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관광은 특정 계층만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였는데 본디 아름다운 것을 듣고 보고 싶은 것은 사람으로서 가지는 본성이었다. 특히 금강산은 평민들도 꼭 가보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관광지였다.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철원과 금강산 내금강을 잇는 금강산 철도와 금강산 전기철도 교량이 만들어지면서 기차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금강산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금강산 관광은 보다 활성화되었다. 금강산 전기철도 교량은 1950년대 남북이 분단되면서 사용을 멈췄지만 기차를 타고 금강산 가던 시절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 관심지역 경기 >수원시

    근대 철도의 역사를 간직한, 수원역 급수탑
    수원역에서 남쪽방향으로 내려가다보면, 일제강점기 시절 옛 증기기관차의 급수를 하던 급수탑 두 개를 만날 수 있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급수하던 시설물을 말하는데, 수원은 주요 간선의 중심이자 수원천이 흐르는 지역으로, 급수탑을 설치하기에 적합한 도시였다. 현재, 급수탑은 준철도 기념물 제 15, 16호로 등록 보존되고 있으며, 그 주변 산책길이 조성돼 시민들에게 근대 철도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 대전 >동구

    ‘대전발 0시50분’의 추억, 구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보급창고 3호
    구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보급창고 3호는 전후복구 시기인 1956년 지어졌다. 대전역은 1905년 개통된 경부선, 1914년 전 구간 운행을 시작한 호남선이 분기하는 철도의 중요 거점이다. 대전역에는 기차를 수리하고 정비하는 큰 열차 검수 차고가 있었다. 대전역 동광장 쪽에 세워졌던 창고들은 잇따라 철거되었지만, 보급창고 3호는 여전히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서 있다. 목조 트러스 구조에 목재 비늘판벽을 두른 보급창고 3호는 산업화 시대를 지킨 철도 시설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 경기 >연천군

    연천의 랜드 마크, 연천역 급수탑
    연천역 급수탑은 1914년 경원선 전 구간이 완공되면서 경원선의 유일한 급수탑으로 건립되었다. 처음 세워진 급수탑은 상자형이었고, 1930년대 들어 높이가 3배인 원통형 급수탑이 더 만들어졌다. 2기의 연천역 급수탑은 일제 강점기 이래 연천의 명물이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하얀색 급수탑이 폭격 좌표를 잡는 지상의 ‘랜드 마크’ 구실을 하기도 했다.
  • 강원 >삼척시

    도계역 급수탑
    도계역 급수탑은 강원도 삼척시 도계역 구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1940년 영동선이 개통하면서부터 도계역을 경유하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해주던 시설물이다. 1940년 영동선이 개통된 이후 증기기관차는 30년 동안 도계역에 들어서면 10~30분 정도 정차해서 이 급수탑을 이용해 물을 보충했다. 문화재청은 도계역 급수탑을 2003년 1월 28일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46호)으로 지정하였다.
  • 강원 >태백시

    철도는 탄광도시 발전의 은인
    태백선과 영암선의 철도 개설은 석탄산업을 발전시키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이 철도망을 통해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탄광도시인 태백과 도계지역의 본격적인 발전이 가능했다. 태백시에 기차역이 8개나 있었고, 삼척시에 기차역이 13개나 있었던 것은 석탄수송과 관련이 있다. 철도는 석탄산업 발전을, 석탄은 우리나라 모든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도자기의 역사 속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옛 역사를 공부하고 알아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조상님들이 귀중하게 생각하며 지켜온 유물이 있기에 알 수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세계에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린 문화재로는 고려청자가 있답니다. 고려청자는 빼어난 색감과 음각, 양각 등 화려함이 돋보여 우리나라의 도예 문화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고려청자가 만들어지기까지 시대를 거쳐오면서 도예 기술도 발전했을 텐데요. 이번 지역N 문화에서는 역사에 따라 형태와 용도가 달라진 도자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자기로서 최초로 만들어졌던 것은 토기로 그 기원은 문명이 시작되기 전이라네요! 문명이 시작된 이후에는 빗살무늬 토기, 민무늬 토기 등이 등장했으며 역사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정교하고도 복잡한 형태의 도자기인 고려청자도 등장하게 됩니다. 고려청자는 중국에서 도자기를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자체적으로도 생산하게 되었으며 송나라의 다양한 제조기법을 바탕으로 고려 도공들은 특유의 색, 상감기법, 문양 표현 등으로 세계 도자기사에 한 획을 남겼답니다~ 우수한 도자기 기술을 보여주는 고려청자에 대해 알고 나니 그 자태가 더욱 뛰어나 보이는데요. 귀중한 유물을 남겨준 조상님들에 감사한 마음을 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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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강진군

    흙을 빚고 불을 피우는 체험 '강진청자축제'
    청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자예술품으로, 한국문화예술사의 자랑이다. 강진청자축제는 약 500년간 청자문화를 꽃피운 강진군민의 자긍심을 널리 알리고 강진지역의 문화관광자원과 연계하여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목적의 축제이다. 청자축제에서는 가마에 불 지피기와 물레체험, 청자 빚기 등 청자를 제작하는 과정을 몸소 체험해 볼 수 있으며, 30% 할인판매를 통해 고려청자의 대중화를 꾀한다.
  • 충남 >공주시

    충남 공주 출신으로 일본의 도자기의 신이 된 이삼평(李參平)
    신들의 나라로 알려진 일본에서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되는 대한민국 출신의 이삼평이다. 이삼평이 태어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1655년에 사망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고향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이다. 일본은 전쟁 과정에서 이삼평을 포함한 조선시대의 도공을 일본으로 데려 갔다. 그 전까지 일본은 도자기 생산 기술이 그리 좋지 못하였는데 그들로 인해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발전하여 이들을 영웅 이상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삼평은 이 지역에서 도자기의 시조라는 의미에서 도조(陶祖)로 모셔지고 있다.
  • 울산 >울주군

    옹기마을에서 흙을 빚고 구워봐요! '울산옹기축제'
    울산옹기축제는 국내 유일의 ‘옹기’를 특화된 주제로 부각시킨 차별화된 축제이다. 옹기를 전통제작기술 방식으로 제작하고 있는 울주군 외고산 옹기마을에서 축제가 개최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지역 대표 특산물인 ‘옹기’를 홍보하고 생활옹기의 보급과 전통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장인들의 옹기만들기 시연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접 흙을 밟고, 흙장난을 치며 옹기를 만들고 구워볼 수 있다. 옹기마을의 현장성이 뛰어나 축제 방문객이 재방문하는 비율이 높은 축제이다.
  • 서울 >용산구

    기법을 달리한 학무늬가 새겨진 철화 청자 매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여러 철화청자 중 덕수 4459번 청자 철화 구름 학 무늬 매병은 상감청자에 많이 등장하는 학 무늬(雲鶴文)도 기법을 달리하면 이렇게 새로운 느낌을 주는구나 싶은 유물이다. 철분 안료로 바탕을 칠하고 무늬 부분을 긁어낸 다음 붓으로 백토를 발라 표현했다. 상감기법과 퇴화기법에서 보이는 맛이 동시에 나타나 한층 활달한 느낌이며 운동감이 있다. 형태도 일반 청자매병과 달리 풍만한 몸통 윗부분에 비해 아랫부분이 길어지면서 좁아들었다.
  • 경기 >광주시

    왕실 백자를 만들던 분원리에서 펼쳐지는 ‘광주왕실도자기축제’
    경기도 광주시의 분원리는 조선시대 전 시기동안 왕실 도자기를 굽던 사옹원분원(司饔院分院·관영 사기제조장)이 있던 곳이다. 사옹원은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던 백자와 달리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는 수준높은 백자만을 생산하던 중앙 관요(官窯)이다. 왕실 도자기 생산지라는 특별한 전통을 계승하고자 1998년부터 도자기축제를 개최하고 있어, 분원리 백자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도자기 만드는 체험도 할 수 있다.
  • 경기 >이천시

    세계도자비엔날레와 함께 하는 이천도자기축제
    이천도자기축제는 1987년 설봉문화제의 단위행사로 처음 시작하였다. 지역이 특산물(쌀, 복숭아 등)과 연계하고 문화상품으로서의 도자기를 개발하여 우수한 이천 도자기를 알리고자 하였다. 그러다 독립적인 축제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2001년부터는 2년에 한번씩 세계도자비엔날레도 같이 개최하고 있다. 이천은 2010년 공예와 민속예술분야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선정되었고, 2018년에는 유네스코 공예분야 창의도시 의장도시로 선정되었다.
  • 경기 >여주시

    1990년부터 열린 여주도자기 축제
    여주는 고려시대부터 백자 가마터가 있던 곳이다. 양질의 고령토와 가마불을 땔 소나무, 깨끗한 물이 있기에 도자기 생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전국에 유통되는 생활도자기의 60%가 여주에서 생산되고 있다. 여주도자기 축제는 1990년 시작된 도자기를 주제로 한 축제이다. 매년 4~5월에 개최되는 여주도자기 축제에서는 흙을 만지며 직접 도자기를 빚을 수도 있고, 도자접시 깨기 대회도 개최된다. 여주도자기 축제를 통해 도자기 문화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꾀하고 있다.
  • 경남 >김해시

    국내 유일의 분청사기 축제, 김해분청도자기축제
    김해분청도자기축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분청사기를 주제로 열리는 축제이다. 분청사기라는 명칭은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만든 명칭으로, 백토로 분장하여 회청색을 띤 분청사기는 14세기 중엽~16세기 중엽에 활발하게 생산되었다. 김해는 가야토기의 명맥을 이어온 곳으로 조선시대 토산공물로 도자기를 생산하였고, 일본 분청사기의 원류도 김해로 본다. 1996년 시작된 김해분청도자기 축제는 김해군과 김해도예협회가 주최하고 있다.
  • 전남 >강진군

    고려청자의 고장 강진에서 만나는 '고려청자박물관'
    청자는 신비로운 색, 아름다운 선과 형태, 다양한 장식, 높은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우리 문화의 최고 자랑 중 하나다. 청자는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중국에서도 고려청자를 최고로 여겼다. 중국 남송(南宋) 태평노인(太平老人)이 쓴 《수중금》에서 고려청자에 대해 ‘고려비색(高麗秘色)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고 쓰고 있다. 강진은 청자요지와 고려청자에 대한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1997년에 고려청자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고려청자박물관은 상설전시와 기획전시를 볼 수 있으며, 직접 손으로 그릇을 빚는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 전남 >강진군

    고려청자의 맑은 빛을 만들어낸 강진의 정수사 약수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정수사(淨水寺)에 가면 맑은 샘이 물줄기를 강력하게 뿜어내고 있다. 이 물줄기는 자연약수라 일컫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러 오고, 이 물을 마시면 건강해진다는 믿음까지 가지고 있다. 약수 주변은 돌담으로 잘 정비해 두었으며, 흘러내린 물이 고여서 흐르고 있을 정도다. 절 이름도 맑은 물을 뜻하는 정수사이고, 이 맑은 물이 고려청자를 구워냈던 물이라 한다. 바로 청자의 맑고 고운 빛깔을 만들어내던 물이다.

가볍게 즐기는 청주 여행

여름이 시작된 6월의 어느 날, 갑자기 홀가분히 떠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럴 때 가기 딱 좋은 곳이 있죠!

바로 충청북도의 청주입니다!

청주는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도시로 당일치기부터 1박 2일 코스까지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답니다! 그럼 가볍게 당일치기 코스로 한번 떠나볼까요?

먼저 대청호에 들러서 드라이브를 즐겨보세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드라이브를 하다 보면 문의문화재단지에 도착할 거예요. 문의문화재단지는 청주 시내의 유형, 무형 문화재 등을 수집 및 전시한 역사 교육장이랍니다. 역사를 배웠으니 이제 전시회를 즐기러 가볼까요? 전시회는 마동 창작마을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서양화가 이홍원 작가가 폐교를 개조하여 작업실 개인 공간을 개방한 곳으로, 전시관과 셀프카페를 운영하는 곳이에요. 전시를 보고 차 한 잔의 여유를 부리다 마지막으로 가덕 말미 장터 마을에 들러 고추장 담그기, 고추 따기 체험 등 농촌 체험을 즐겨봐요. 이렇게 당일치기를 즐기고 나면 재밌는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가볍게 즐기는 청주 여행으로 힐링과 재미를 동시에 만끽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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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청주시

    청주의 옛이름을 단 상당산성
    상당산성은 청주에서 동쪽으로 7.5km에 청주와 청원군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491.2m 상당산 위에 쌓은 포곡식 석성이다. 둘레가 4.2km, 높이 3~4m, 내부면적 220,000평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충북 >청주시

    선비의 정신을 갖춘 상업 인재를, 청주 대성고등학교 본관
    청주상업학교는 1930년대 청주 지역 학부모들의 염원과 청주 유지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 특히 청암 김원근과 석정 김영근 형제가 거금을 내놓아 학교 설립이 결실을 보았다. 붉은 벽돌 2층으로 지어진 학교 본관은 상업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해방 후 청주상업 고등학교가 되었으나 시대의 추세에 따라 2002년 인문계로 전환해 청주 대성고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우암산 자락 인가 드문 뽕나무밭에 들어선 학교는 해방 후 청주대학교를 비롯해 학교 건물들이 잇따라 지어지고, 청주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현재는 번화한 거리로 변했다.
  • 충북 >청주시

    수도권과 삼남지방의 물건을 교류하던 청주 육거리종합시장
    청주시의 시장은 조선시대부터 활발하게 개설되었다. 청주시의 대표적 시장인 ‘육거리종합시장’은 청주장을 잇는 상설시장이다. 육거리종합시장은 9개의 상인회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정도로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다. 육거리종합시장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시장’의 역할이 컸으며, 요즘에도 새벽시장(도깨비시장)이 열린다. 
  • 충북 >청주시

    등고강변의 지극히 선한 경지를 실천하고자 했던, 청주 지선정
    지선정은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중척리 산25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11호이다. 조선후기의 학자 오명립(1563~1633)이 1614년(광해군 6)에 등고강변의 언덕 위에 세운 정자이다. 등고강은 오늘날의 청주시 현도면 중척리 앞으로 흐르는 금강의 별칭으로, 이 일대를 가리키는 ‘등고’라는 지명에서 유래하였다. 현재의 청주시 현도면과 문의면 일대는 보성오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아온 지역이다. 지선정이라는 정자명은 『대학』의 지어지선(止於至善)에서 취한 것으로,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이후 피폐하고 어지러운 정사 속에서 풍속을 교화하고 향촌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오명립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 충북 >청주시

    청주 육거리종합시장에서의 의미 있는 답교놀이
    다리밟기는 정월 대보름에 다리를 밟는 민속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석교동에는 조선시대 이전에 놓인 다리 가운데 제일 긴 다리인 남석교(南石橋)가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청주 시내를 흐르는 무심천(無心川)의 물길이 변경되면서 매립되어 시장으로 변모하고, 남석교 또한 매몰되어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청주시의 대표적인 시장인 ‘육거리종합시장’은 1950년 이후에 형성되었다. 이곳 육거종합시장에 바로 남석교가 묻혀 있다. 그래서 청주문화원 등의 공공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시장 입구에 남석교 모형을 만들어 놓고 ‘남석교 다리밟기’ 놀이를 재현한다.
  • 충북 >청주시

    반란군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청주성 3인의 청주 표충사
    청주의 표충사는 이인좌의 반란군이 청주성을 함락할 때 성을 지키던 이봉상, 남연년, 홍림을 배향하는 사우이다. 청주성은 영남과 호남의 중간지점으로 군대가 무기를 갖춘 병영이 설치되어 있어 반란군이 가장 먼저 점령한 곳이었다. 청주성을 지키던 무신들은 반란군의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았고 오히려 반란군을 꾸짖고 죽임을 당했다.
  • 충북 >청주시

    미국 선교사 주택으로 쓰인 여섯채의 건물, 청주 탑동 양관
    충청북도 청주시 탑동에는 청주 탑동 양관이라는 6동의 서양식 건물이 있다. 미국의 선교사와 관련된 건물로 1906년에서 1932년 사이에 지어졌다. 모든 건물은 2층 이상이며 지하실을 갖추고 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건축의 변화를 보인다. 벽돌로 쌓은 벽체에 지붕에는 기와가 올려져 있어 한식과 양식의 절충식 형태를 띠고 있다. 제3호부터 제6호는 일신여자고등학교 내부에, 제1호와 제2호는 외부에 자리하고 있다.
  • 충북 >청주시

    호랑이 숲에서 박생원 딸의 병을 낫게 해준 충북 청주시의 명암약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에 있던 명암약수는 1920년대 무렵 발견한 탄산약수로 약수에 철분 성분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청주 시내에서 상당산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접근성이 좋기에 청주시민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명암약수는 청주에 살던 박생원 딸의 병을 치료해주었다는 설화가 함께 전승한다. 청주시에서는 명암약수터가 있던 곳을 유원지로 조성하였다. 명암약수터는 청주시민들의 소풍 장소이자, 나들이 장소였다. 2015년 청주시에서 생태공원으로 조성하였으며, 2021년에는 ‘명암밸리파크’라는 종합 유원지로 만들어 갈 계획이다.
  • 충북 >청주시

    보살사에 열린 청주 유림의 풍류,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에 있는 고인쇄박물관에는 을축갑회도(乙丑甲繪圖) 및 죽림갑계문서(竹林甲稧文書)가 소장되어 있다.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는 청주 일원에 거주하였던 을축년생(1625년) 사대부가 1682년에 갑계를 개최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와 그림이다. 특히 을축갑회도의 경우는 갑계가 열린 보살사 경내를 배경으로 당시의 정황을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7세기 청주 지역 갑계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충북 >청주시

    주성교육박물관으로 재탄생한 청주 구 청주공립보통학교 강당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영동에는 구 청주공립보통학교의 강당이었던 ‘주성교육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청주공립소학교로 개교하여 청주공립보통학교, 주성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다가 현재 주성초등학교로 불린다. 구 청주공립보통학교 강당은 2001년 주성교육박물관으로 개관하여 학습자료 및 민속용품 등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 건물은 충청북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 건물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국가등록문화재 제350호에 지정되었다.

미식을 원한다면 정답은 부산

어느덧 6월의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들 슬슬 여름 바캉스를 준비할 시기가 되었죠? 여러분들은 바캉스하면 어느 곳이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저는 부산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시원한 바다와 먹거리가 가득한 도시 부산! 오늘은 맛난 음식들이 가득한 부산의 매력에 빠져볼까요?

우선 부산하면 해산물을 빼놓을 수 없죠. 바닷가에서도 도심에서도 싱싱한 제철 해산물을 맛볼 수 있습니다. 종류도 다양한 싱싱한 해산물의 색다른 풍미를 부산에서 즐겨 보세요! 다음 음식은 바로 돼지국밥입니다. 에피타이저로 소면 말아 호로록하고, 부추와 새우젓으로 간 맞춰 한 숟갈 뜨면 고기 반, 국물 반 믿을 수 없는 그 양에 놀라게 될 거예요. 돼지국밥을 먹어 봤다면 투박하지만 강렬한, 소박하지만 담백한 그 맛을 잊으실 수 없을 걸요? 마지막 음식은 밀면입니다! 국수보다는 쫄깃하고 냉면보다는 부드러운 면에, 취향에 맞게 물밀면과 비빔밀면 중에서 선택해 후루룩 맛보면 누구든 그 맛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렇게 부산의 음식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이 세 가지 음식 말고도 낙곱새, 씨앗호떡, 동래파전 등등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하답니다! 이번 여름 바캉스는 맛있는 부산, 미식의 도시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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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남구

    6.25에 생겨나 부산의 향토음식이 된 밀면
    함흥냉면에서 파생된 밀면은 부산의 향토음식이다. 이전 시대에 귀한 재료였던 밀가루가 1950년대 미군의 밀가루 원조로  남아돌게 되었다. 때문에 메밀 대신 그 밀가루에다가 고구마 전분이나 감자 전분 등을 추가하여 쫄깃한 면을 뽑아 만들었다. 요즘 부산시내 밀면집은 추석이나 설 등의 명절이 대목인데, 이는 외지에 나가있던 부산 사람들이 고향에 온 김에 먹고 가기 때문이다.
  • 부산 >중구

    서역의 음식에서 부산의 명물로, 부산 씨앗호떡
    매년 겨울, 노상에서 호떡을 기름에 지글지글 지지는 것을 볼 때면 이렇게 한해의 끝머리가 왔음을 실감하고는 한다. 호떡은 대표적인 길거리 간식이자 서민 음식의 상징이다. 전국적으로 다양한 호떡이 많지만, 부산에서는 호떡에 해바라기 씨와 각종 견과류, 건포도 등을 넣어 종이컵에 담아준다. 늘 우리 곁에 있어서 특별해보이지 않지만, 한 컵에 담긴 간식 속에도 기나긴 역사가 숨어있다.
  • 부산 >남구

    밀가루로 만든 냉면, 부산 밀면
    부산 밀면은 밀국수 냉면의 약칭으로 밀가루를 원료로 뽑은 면을 사용하여 만든 냉면을 말한다. 한국전쟁 시기 부산으로 내려온 이북지역의 피난민들에 의해 개발된 부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부산광역시의 고유한 향토음식이다.
  • 부산 >북구

    한국전쟁 피난민들의 허기를 달래준 구포국수
    밀국수는 돌잔치나 혼인, 회갑 등 특별한 날에 먹던 음식이었다. 밀국수가 우리의 식탁에 자주 올라오게 된 것은 한국전쟁 당시 외국 원조구호물자와 함께 대량의 밀가루가 반입되면서다. 부산 구포동에서 국수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구포동으로 모여든 피난민들은 싸고 맛있는 구포국수로 허기를 채웠다. 구포국수는 구포시장을 방문한 이들이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으로 유명해졌다. 
  • 부산 >영도구

    어묵의 새 변화, 고급 간식이 된 어묵
     ‘오뎅(おでん)’은 어묵과 우무, 무 등을 넣고 끓인 냄비 요리를 지칭하는 일본말이다. 그것이 한국에 들어와 재료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는데, 어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한국에 처음 설립된 어묵공장은 1907년 야마구치어묵제조소(山口 蒲鉾製造所)다. 이후 1940년대 말과 1950년대를 전후해서 부산 영도 봉래시장 입구에 동광식품과 삼진식품이 들어선다. 한국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어묵공장이다. 삼진어묵은 1953년 박재덕 씨가 창업하여 박종수 씨의 뒤를 이어 아들 박용준 씨가 3대째 운영하고 있다.
  • 부산 >부산진구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애환과 피로를 풀어준 범일동 조방낙지
    조방낙지는 부산 조선방직 인근에서 만들어 팔기 시작한 낙지볶음의 일종으로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의 향토음식이다. 조방낙지는 조선방직공장 노동자들이 즐겨 찾았던 음식이었던 관계로 낙지볶음 대신 조선방직의 줄임말인 ‘조방’이 붙어 조방낙지라는 고유명사로 정착한 음식이다.
  • 부산 >중구

    전국의 포장마차를 제패했던 부산 자갈치시장 꼼장어구이
    자갈치 꼼장어구이는 먹장어를 매운 양념에 채소와 버무려서 구워 먹는 부산광역시 자갈치시장의 향토음식이다. 꼼장어는 먹장어의 경상도 방언으로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대표적인 수산물이다. 해방이후 일본에서 돌아와 부산에 정착한 귀국동포들이 충무동 바닷가에 좌판을 벌여 판매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 부산 >중구

    보따리상을 통해 만들어진 유부 보따리
    요즘에는 해외직구가 간편해져 인터넷으로 클릭 한 번 하면 먼 나라의 물품이 내 집 현관문 앞까지 배송되는 시대라지만, 예전에는 국내에서 팔지 않는 물건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물품들이 꼭 필요한 경우, 해외에서 돌아오는 지인에게 부탁하거나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상인들에게 맡기고는 했는데, 국내에 정식 수입되지 않던 물품을 개인적으로 들여와 팔던 이들을 두고 보따리상이라 불렀다. 그들이 자주 오가던 항구 부산에 가면 그 시대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음식이 있으니, 바로 유부 보따리다.
  • 부산 >동래구

    달착지근한 쪽파와 해산물을 찹쌀 반죽으로 지져야 동래파전
    흔히 파전이라 하면 바삭하게 기름에 구워진 밀가루 파전을 생각하지만 부산 동래파전은 쪽파가 주인공이다. 유채씨기름 위에 쪽파를 가지런히 눕히고 찹쌀반죽을 뿌린 뒤 굴, 새우, 대합을 얹고 계란을 하나 툭 깨어 올린 후 뚜껑을 덮어 굽는다. 동래시장 난전에서 팔던 동래파전은 어느새 지역 특산 음식이 되었다. 
  • 부산 >남구

    밀면과 냉면은 목젖을 치는 그 맛이죠
    부산의 내호냉면은 2019년이면 백 년을 맞는다. 남한 함흥냉면의 역사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당시 흥남시 내호면에서 부산까지 피난 와서 낸 가게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함흥냉면은 감자나 고구마 녹말로 면을 만들어서 가자미회와 양념 등을 올려 비벼 먹는 냉면이다. 식량이 부족한 겨울철에 먹던 음식이었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에 의해 남한에도 알려지게 되는데 냉면국수의 주요 재료인 감자녹말은 고구마 녹말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미군의 구호품이었던 밀가루 보급으로 고구마 녹말과 밀가루를 섞어 면을 만들면서 밀면이 탄생했다. 

우리 옷의 전통 모시옷

예부터 여름철 최고의 옷으로 주목받은 모시옷. 모시는 삼국시대 때부터 삼베와 더불어 옷감의 재료로 쓰였는데요. 모시로 만든 옷은 가볍고 통풍이 잘 되어 땀도 빠르게 말라 여름에는 너도나도 입었답니다. 특히 한산모시는 고급 모시로, 임금님께 진상될 정도의 특산품이었습니다. 비단과도 같은 광택과 삼베보다 좋은 내구성을 갖춘 옷감인 모시! 이 좋은 재료로 만든 모시옷은 장점이 많은 만큼 만들어지기까지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모시의 껍질을 벗겨 물에 적시고 말리기를 반복하고, 그 이후에는 베틀로 짤 수 있도록 한올 한올 실로 만들어야 했는데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모시옷, 모시옷을 만들기 위해 베틀을 짜는 것은 필수며 현재까지도 전해져오는 한산모시짜기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직물 모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한산모시 전시관에 방문하여 모시의 역사와 가치에 대해 들어보고 미니 베틀, 모시옷 입기 체험도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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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상류사회의 여자들이 정장할 때 입던 속치마, 대슘치마
    대슘치마는 조선시대 왕실 및 양반사대부의 부녀자들이 예복(禮服)을 착용할 때 입던 속치마이다. 대슘치마는 주로 모시로 만들었는데 색깔은 모시 본래의 색깔인 소색(素色)이나 흰색으로 하였다. 대슘치마의 형태는 끌리지 않을 정도 길이의 모시 12폭으로 지었다. 치마 아랫단에는 창호지 또는 넝마 등을 두껍게 겹붙인 ‘배악비’를 높이 4cm, 길이는 치마폭 정도로 만들어 풀을 먹인 모시로 붙였다. 대슘치마 밑단에 다는 백비단과 빳빳한 창호지는 여러 겹 입은 속옷과 치마를 받쳐 주어 발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 준다. 무지기와 대슘치마를 같이 입으면 겉치마의 아랫부분이 곡선으로 자연스럽게 부풀려졌다.
  • 전국

    상류층 부녀들이 입던 속치마, 무지기치마
    무지기치마는 조선시대 상류층 부녀자들이 입었던 속치마이다. 명절이나 잔치 때에 무지기치마를 입으면 겉치마가 자연스럽게 넓게 펴져 치마가 풍성하게 보였다. 무지기치마는 서로 길이가 다른 치마를 여러 겹 한 허리에 달았으며 이때 만들어지는 층의 수에 따라 3합·5합·7합 등의 종류로 나뉘었다. 각 층의 치마는 모시 12폭을 이어 만들었고 치마 밑단 끝부분만 염색하였다. 그 색감과 모습이 마치 무지개와 같아 보였으므로 이를 토대로 치마의 명칭을 무지개라 하였다가 후에 무지기로 변화하였다. 무지기치마는 그 색감과 형태가 현대의 아름다움과 흡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오늘날의 디자이너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 충남 >서천군

    모시 생산의 전통을 잃지 않기 위한 서천 저산팔읍 길쌈놀이
    서천 저산팔읍 길쌈놀이는 세모시로 유명한 한산의 모시 생산 과정을 유희화한 놀이다. 모시는 한산의 중요한 소득원으로써, 이 지역의 여성들은 모시 만드는 일을 숙명으로 여기며 살았다. 지금은 다양한 직물의 보급과 기계화로 쇠퇴했지만, 모시 생산의 전통을 잃지 않고 놀이의 형태로 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 전국

    삼 ·모시 ·노 등으로 삼은 신, 미투리
    미투리는 짚신 중에서도 질이 좋은 것으로, 삼(麻)이나 모시, 노끈 등을 엮어 만든다. 미투리는 선비들이 나들이할 때 신던 것으로 미투리 중 섬세한 제품은 사대부들이 주로 신었다. 미투리는 형태로 보면 신목이 낮은 신발의 총칭인 이(履)의 일종이다. 미투리는 흔히 날이 여섯 개나 여덟 개였으며, 아주 정교한 총(미투리의 앞과 옆을 이루고 있는 올) 50~60개로 이루어졌다. 원래 미투리는 삼으로 만들었는데 점차 모시, 노끈, 닥나무 껍질, 칡넝쿨이나 종이와 무명실 등의 좋은 재료로 섬세하게 엮기도 하였으며 왕골이나 부들로 만든 미투리는 염색하여 무늬를 넣어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투리는 짚신보다 튼튼하여 양반층과 서민들이 고급 신발로 취급하였다.
  • 충남 >서천군

    우리나라 모시 유통의 본거지 한산장
    한산장은 모시로 유명한 서천군 한산면소재지에서 열리는 정기시장이다. 한산모시는 조선시대 후기에 오면서 유명해졌다. 한산모시를 근간으로 한 유통망 때문에 한산면 시장이 발달하게 되었다. 한산장은 조선시대부터 있었으며, ‘안장’이라고도 불렀다. 부녀자들이 물건을 가지고 와서 파는 작은 시장이라는 의미다. 한산장에는 3대째 이어오는 대장간과 40여 년 동안 문을 연 철물점, 함석집 등의 오래된 상점들이 있어서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 충남 >서천군

    여름용 전통 직물 한산 모시짜기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저마를 이용해 짠 전통 직물이다. 한산모시는 품질이 우수하고 섬세하기로 유명하였다. 모시도 여름 옷감으로 이름이 나면서 오일장에서도 판매하였다. 모시 짜기는 모시실 만들기와 베 짜기로 이루어진다. 1967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전국

    치마 안에 입던 여름용 홑바지, 살창고쟁이
    살창고쟁이는 조선시대 부녀자들의 치마 안에 입던 속옷으로 여름용 홑바지인 고쟁이 중 하나이다. 살창고쟁이의 형태는 허리말기 아래, 허리둘레를 따라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구멍의 크기는 대략 6~8cm 폭에 15~20cm 길이로 직사각형 구멍을 10개 이상 내고 구멍의 개수는 바지마다 다르다. 살창 부분을 재단한 후 가장자리를 2~3cm 접어 감침질로 가장자리의 삼베 올이 풀리지 않게 정리하고 허리말기를 달았다. 살창고쟁이는 밑이 트인 바지인 개당고(開襠袴)이며 주로 뒤쪽이 트여 있었으며, 간혹 허리말기만 흰색 모시로 만들기도 하였다. 살창고쟁이는 여름에 시원하게 입을 수 있는 실용성과 신부가 갖출 수 있는 예의범절, 그리고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우리 전통 옷이다.
  • 충남 >서천군

    『삼국사기』에 기록된 오래된 여성들의 전통놀이, 길쌈놀이
    전통사회 여성들의 중요한 생업 활동 중에 길쌈이 있다. 삼·누에·목화 등을 이용해 삼베·명주베·모시베·무명베 등의 옷감을 짜내는 노동이다. 길쌈놀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남아 있다. 왕이 여성들을 두 팀으로 나누고 한 달 동안 길쌈을 하게 하여, 그 양을 따져 승부를 겨룬 다음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는 놀이었댜. 이는 추석[가배(嘉俳)]의 유래이기도 하다. 길쌈놀이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한 달 동안 이어져 온 생업활동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서로 음식을 나눠 먹으며 그동안의 노고(勞苦)를 달랜 부분이라 생각된다.
  • 충남 >논산시

    은진미륵의 보은으로 결혼 한 모시장수
    ‘은진미륵’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관촉사(灌燭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석불로는 가장 크며, 특히 토속적인 생김새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은진미륵의 보답으로 결혼을 하게 된 서울의 모시장수를 내용으로 하는 설화가 전한다. 모시장수가 한산장에서 모시를 구입해 지게에 짊어지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그만 소나기를 만나 모시가 다 젖게 되었다. 모시장수는 비에 젖은 모시를 어떻게 말릴까 고민하다가 모시를 펴서 은진 미륵에다 입혀 놓았다. 그랬더니 은진미륵이 오랜 시간 헐벗고 있었는데 옷을 입혀주어 고맙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모시장수는 서울로 향하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
  • 전국

    베틀 노세 베틀 노세, 옷감을 짜는 길쌈
    길쌈은 부녀자들이 가정에서 삼 ·누에 ·모시 ·목화 등의 섬유 원료로 베 · 명주 · 모시 · 무명 등의 직물을 짜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만들어진 직물은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 되었고 화폐의 대용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부녀자들이 길쌈을 하면서 일의 고통을 덜고 자신들의 설움을 표현하며 달래기 위해 부르는 노래를 길쌈노래라고 한다.

맘 편히 충주로 훌쩍 떠나자

매일 바쁜 일상에 휩쓸려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럴 땐 맘 편히 충주로 훌쩍 떠나볼까요~? 충청북도에 위치한 충주는 경기, 강원, 경상 3개의 도와 맞닿아있어 비교적 맘 편하게 여행할 수 있는 곳입니다! 어라, 너무 지쳐서 여행 계획도 세우기 힘드시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때를 위한 충주의 풀코스가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황옥동굴 → 석종사 → 탄금대 → 중원당 → 중앙탑 사적공원 → 장미산성 → 목계솔밭 → 비내섬

코스 중간중간 충주의 대표 음식인 꿩요리, 산나물밥상, 올뱅이 해장국을 맛보시면 더욱 더 안성맞춤이겠죠?! 뚜벅이 & 운전하기 싫은 분들을 위한 코스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로 체험관광 디자이너가 함께하는 충주의 감성버스 투어입니다! 인기 있는 충주의 관광명소와 특별한 체험 그리고 맛있는 밥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답니다~ 이런 코스들 맘에 드시나요? 그렇담 맘 편히 충주 여행을 떠나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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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충주시

    700리 남한강 물길의 대표 포구, 충주 목계나루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에는 700리 남한강의 물길의 중심포구였던 목계포구가 있었다. 물길과 육로가 연결되어 내륙의 물산과 남한강을 통해 유입되는 물산이 집산되었고, 조선 후기의 5대 하항(河港)에 속해 ‘오목계(五牧溪)’로 불렸다. 1930년대에 충주와 서울을 잇는 충북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남한강 수운 기능이 소멸하기 이전까지 물류 교류의 중심지였다. 세금을 거두는 조운선 20여 척이 교차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소유하고 있어, 내륙에 있는 포구 중 가장 컸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지역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과 연계하였다. 주요 거래품은 쌀과 소금 등이었으며, 배가 들어오면 강변에 장시가 개설되었고, 전국에서 몰려온 장꾼과 놀이패가 한바탕 난장을 펼쳤다. 800여 호가 거주민이 상업에 전념할 정도로 번성했다. 2015년에 충주시는 목계나루의 옛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나루복원과 문화마을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 충북 >충주시

    철 생산지 충주에서 제작된 고려중기 철불,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단호사(丹湖寺) 철조여래좌상은 고대부터 철 생산 중심지였던 충주지역에서 조성된 고려 중기 철불좌상이다. 높이 130㎝ 규모의 비교적 소형 불상이지만 당당한 자세와 근엄한 표정 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경직된 안면과 도식화된 법의 표현 등은 나말여초 및 고려 초 철불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고려 중기 이후 철불 조성이 감소하면서 나타나는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 충북 >충주시

    계명산에서 자리를 옮긴 충북 충주의 심항산 봉수
    심항산 봉수는 충청북도 충주시 종민동에 소재한 심항산 정상부에 있다. 이 봉수는 고려 말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동쪽에 있는 제천 오현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서쪽에 있는 마산 봉수로 연결했던 내지봉수였다. 본래 심항산 봉수는 계명산에 있었는데, 당시 산이 높고 험준하여 봉수군의 고역이 크고 날이 흐리면 조망이 좋지 않아 조망이 좋은 지금의 심항산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현재 심항산 일대는 신과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충주를 대표하는 명소로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 충북 >충주시

    철 생산지에서 만든 토속화된 철불, 충주 철조여래좌상
    충주 철조여래좌상은 봉안 사찰을 알 수 없다. 최초 발견장소는 충주공업고등학교 근처였는데 1922년 충주 군청으로 옮겼다가 1937년 마하사(摩訶寺)로 이전하였다. 다시 1959년 대원사로 옮겨 봉안했으나 1994년 대원사 대웅전에 화재가 나 일부 손상을 입은 채 충주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1998년 대원사에 다시 봉안되었다. 98cm의 크기로 눈은 활모양으로 휘어졌고, 입꼬리는 양쪽이 다 쳐져서 상당히 토속화된 양식을 보여준다.
  • 충북 >충주시

    신라 가야금의 명인 우륵과 충주5현을 추모하는 ‘우륵문화제’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가야인 악성(樂聖)우륵을 비롯해 충주 출신 5현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우륵이 충주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제자들을 양성한 일은 유명하다. 우륵 외에도 임경업, 신립, 강수, 김생 등의 충주 출신 명현 다섯명을 충주오현이라 하여 명현 추모제를 드리고, 탄금대 가야금 경진대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매년 9월말에 개최되는 우륵문화제는 한국의 전통음악문화를 전승하고 널리 알리며 충주의 항토문화예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개최되고 있다.
  • 충북 >충주시

    태조 이성계가 욕창 치료를 위해 다녀간 충북 충주시의 수안보 온천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에 ‘수안보 온천’ 지대가 소재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조 이성계가 욕창을 치료하기 위해 수안보 온천을 자주 찾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권람, 권상하, 안맹담 등의 조선시대 선비는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도 수안보에서 온천욕을 즐겼다. 수안보 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조선 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1885년 소규모의 남녀 목욕탕인 ‘온천정’이 만들어지고, 1929년 온천공으로 굴착 해 온천수를 끌어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63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해서 1990년대 수안보온천 지대에는 다양한 호텔과 리조트 등이 들어섰으며, 1997년 ‘수안보온천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 충북 >충주시

    연원도의 중심 연원역
    연원역은 조선 시대 충청도 충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연원도의 중심이 되는 찰방역이었으며, 충주를 중심으로 지금의 충청북도 동북부 일대의 교통로를 관할했다. 주변에 있던 14개의 역을 관할하고 물류와 행정의 중심지로 주변 지역까지 아우르며 역참의 업무를 총괄하면서 크게 번성했다. 충주시에서는 연원역 기념조형물을 설치하여 연원역의 역사를 이해하고 마을의 유래를 알기 쉽게 해 놓았다. 연원역은 지역 주민들의 관심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 충북 >청주시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직접 조종한 전투기, F-51D 무스탕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처음으로 비행(飛行)에 성공했다. 첫 비행은 지상에서 잠시 떴다가 내려앉은 수준이었으나 이후 비행기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비행기의 성능은 급속도로 향상되었다. 우리나라 공군 조종사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직접 전투기를 조종하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 전투기가 바로 F-51D 무스탕이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전투기로 한국전쟁 초반부터 전투에 투입되었다. 133여대의 전투기가 한국전쟁 동안 8,495회 전투에 투입되었다. 프로펠러 전투기였던 F-51D 무스탕은 제트 전투기의 등장으로 공중전 투입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이후에도 우리나라에서 연습용 전투기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 충북 >충주시

    충주 어씨 시조설화
    충주 어씨 시조인 어중익(魚重翼)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득성(得姓)에 관한 이야기이다. 충주 어씨 설화는 『한국성씨대관』, 『한국인의 성씨』,『만성대동보』, 『한국의 전설』, 『충주어씨족보(忠州魚氏族譜)』, 『한국구비문학대계 8-3』에 수록되어 있다. 문헌 자료와 구전설화를 종합하면, 어씨의 본성이 지씨였다는 점과 어씨 성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사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 충북 >충주시

    택견의 고장에서 만나는 세계무술, ‘충주세계무술박물관’
    “익크 엑크 익크 엑크.......” 충주세계무술박물관이 있는 충주세계무술공원에서는 무술인들의 구령에 맞춘 움직임이 보인다. 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택견은 부드럽고 유연한 동작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우리의 전통무예이다. 택견을 중심으로 열리는 세계무술축제에 참여했던 세계 무술인들이 기증한 무기, 공예품, 도복 등 전 세계의 무술관련 유물이 수집되어 전시된 곳이 ‘충주세계무술박물관’이다. 베는 무기, 쏘는 무기, 찌르는 무기 등 세계 무술의 무기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무술체험실에서는 택견 동작을 따라해 보고, 격파와 대련게임도 체험할 수 있다.

다섯가지 덕이 담긴 막걸리 한 사발

막걸리는 전근대기 한국인들이 가장 자주 만들고 즐겨 마셨던 술입니다. 막걸리는 찐 곡식과 누룩, 그리고 물을 섞어 발효시킨 것으로, 그 특유의 맛과 향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주세령이라는 법령으로 인해 집에서의 술 만들기가 금지되었고, 이로 인해 막걸리 제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걸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변화를 겪었고, 1990년대에 들어서야 현재와 같이 100% 쌀로 만든 막걸리가 시장에 출시되었습니다.

현재는 전통주가 다시 주목받으면서 막걸리에 대한 관심도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막걸리에는 '오덕'이라는 다섯 가지 덕목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 '오덕'에 대해 더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은 막걸리 한잔과 함께 이 '오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01. 취하되 인사불성일 만큼 취하지 않음이 일덕(一德)이요,
02. 새참에 마시면 요기되는 것이 이덕(二德)이며,
03. 힘 빠졌을 때 기운 돋우는 것이 삼덕(三德)이다.
04. 안 되던 일도 마시고 넌지시 웃으면 되는 것이 사덕(四德)이며,
05. 더불어 마시면 응어리 풀리는 것이 오덕(五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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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전주시

    그때그때 달라요, 막걸리 재료의 변화
    막걸리는 전근대기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만들고 많이 먹던 술이었다. 농번기나 축성 등의 노역에는 반드시 필요한 노동주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집에서 술 빚는 것을 금지시키고 양조장에서 술을 사먹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막걸리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것은 막걸리를 마시며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추가의 세금을 걷으려는 것이었다. 해방 후 쌀이 귀해지면서 막걸리는 밀가루로 만들다가 1990년 다시 쌀로 만든 막걸리가 허용되었다.
  • 부산 >금정구

    누룩, 국가가 통제하다.
    누룩은 곡식을 발효시켜 술로 만들 때 필요한 발효제이다. 전근대 시기 누룩은 주로 밀로 만들었는데 밀 농사를 지은 농민들이 부업으로 만들어 장에서 팔았다. 일제시대 대규모로 누룩을 제조하는 공장들이 출현하였는데 농촌에서 부업으로 만드는 누룩도 공존하였다. 1930년대 일제는 누룩 제조를 특정 공장에만 허가하고 전매권을 주었다. 다양하게 만들어지던 누룩은 국가에 의해 통제되었다.
  • 경기 >양평군

    프랑스군 본부가 되었던 100년 술도가, 양평 지평양조장
    경기도 양평 지평양조장은 1925년 설립되었고, 양조장 건물은 1939년 지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환기를 위해 지붕에 높은 창을 낸 지평양조장은 1951년 2월 프랑스군의 지휘 본부의 역할을 잠시 해야 했다. 근방에서 지평양조장보다 나은 지휘소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화약 연기가 사라지고 다시 술을 빚기 시작한 지평양조장은 100년 된 옛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로, 전통방식을 이어가려 애쓰며 막걸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평양조장의 지평막걸리는 전국적으로 애주가들이 찾는 막걸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충북 >진천군

    탁배기 한 잔이 건네는 위로, 진천 덕산양조장
    덕산양조장 건물은 1930년 지어졌다. 백두산에서 목재를 가져올 만큼 정성을 기울인 건축물이다. 양조 과정을 좌우하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왕겨를 채워 넣은 두꺼운 벽체를 세웠고, 천장 판자 위에도 왕겨를 채웠다. 자연스러운 환기가 되도록 통풍 구조를 만들고, 양조장 앞 화단에는 측백나무를 여러 그루 심었다. 덕산양조장은 한국전쟁 시기 소실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고, 막걸리가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시기에는 10년간 문을 닫기도 했다. 하지만 깔끔하고 묵직한 술맛을 잃지 않으면서, 여전히 서민들에게 한 잔의 위로를 건네는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
  • 경남 >밀양시

    클래식 음악만 듣고 자란 막걸리랍니다.
    막걸리는 남녀를 불문하고 격식을 차리거나 근사한 안주가 없어도 마실 수 있는 술이다. 경상남도 밀양에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만들어진 클래식 생막걸리가 있다. 생막걸리는 살균을 한 막걸리와 달리 효모와 유산균이 살아있기에 유통기한이 짧다. 단장 양조장에서는 밀양에서 생산되는 쌀로만 술을 빚어 특산주로 면허를 받고 인터넷 판매를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 부산 >금정구

    막걸리계의 큰 형님, 부산 금정산성 막걸리
    부산의 금정산성 막걸리는 막걸리들 중 유일하게 향토 민속주로 지정된 전통 쌀 막걸리이다. 300여 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금정산성 막걸리는 자연 속에서 발효된 누룩과 청정한 물로 빚어 은은한 향과 구수한 감칠맛을 특징으로 한다.
  • 경북 >문경시

    탁배기 한잔에 목구멍 탄가루 씻고 – 문경 가은양조장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가은양조장은 은성무연탄광 개발이 시작되던 1938년 12월에 영업을 시작했다. 은성무연탄광은 1994년 폐광될 때까지 은성탄광이라는 이름으로 석탄을 채굴했다. 가은양조장은 탄광촌이 형성되고 가은읍에 50여 개로 늘어난 술집에 막걸리를 공급했다. 탄부들은 8시간 동안 막장에 들어가 일하면서 쌓인 피로와 탄가루 먼지를 가은양조장에서 빚은 막걸리로 씻어냈다. 가은양조장은 1970년대 중반 가장 번창할 때 하루 1만 리터의 막걸리를 팔았다고 한다. 은성탄광은 1994년 폐광되었다. 막걸리 소비가 소주와 맥주에 밀려 점차 줄어든 데다가, 은성탄광 폐광으로 가은양조장도 2010년 결국 문을 닫았다. 1930년대에 지어진 가은양조장 사무실과 공장 건물은 당시 양조장의 구조를 잘 보여주며, 예전 서류 등이 보관돼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다. 가은양조장은 2017년 등록문화재 제706호로 지정되어, 국내 양조장 가운데 세 번째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 전남 >고흥군

    고흥의 유자와 쌀, 청정수가 탄생시킨 고흥 유자막걸리
    탐스러운 유자가 재배되기에 최적화된 기후조건을 가진 전라남도 고흥에서는 오래전부터 유자나무를 심어왔다. 풍성하게 수확되는 유자는 특유의 산미 때문에 과육을 그대로 먹기보다는 씨를 발라내고 껍질과 과즙을 다양한 방식으로 가공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중에서도 유자 막걸리는 고흥에서 재배된 유자와 쌀 그리고 청정수가 어우러져 특유의 향긋함과 구수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 강원

    달고 부드러워 술술 넘어가는 옥수수 막걸리
    강원도하면 옥수수, 옥수수하면 강원도다. 지형이 험하고 흙이 거친 강원도에서도 잘 자라는 옥수수는 오랜 세월동안 강원도를 먹여 살렸다. 강냉이 범벅, 옥수수전, 옥수수빵 등 옥수수로 만든 수많은 음식이 있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강원도 특산품은 바로 강원도 옥수수 막걸리가 아닌가 싶다. 시금털털한 막걸리 맛의 편견을 깨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누구나 좋아한다.
  • 충남 >부여군

    부여의 달콤한 밤과 알밤막걸리
    충청남도 부여군은 공주시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밤 생산지이다. 억센 가시가 돋은 밤송이 속에는 윤기 나는 밤이 한 개에서 많게는 세 개씩 숨어있다. 밤은 생으로 먹어도, 구워서 먹어도 맛있지만 막걸리의 재료로도 사용된다. 특히 부여군의 알밤으로 만드는 밤막걸리들은 그 달콤하고 진득한 맛으로 젊은이들과 여성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막걸리는 시금털털하다는 편견을 깨어버리는 달콤한 알밤막걸리는 고소하고 달콤하고 목넘김이 좋아 술술 들이킬 수 있다.

바다와 함께 살아가요!

여러분 바다에도 기념일이 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바로 매년 5월 31일 바다의 날로 해양산업의 중요성과 의의를 높이고 해양산업 종사자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날입니다. 이날 행사는 주로 항만 및 바다 청소, 수산자원 보호 등 바다 환경과 관련된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다의 현재 인간의 손길로 인해 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국내 연안에서 수거되는 해양 쓰레기의 양도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한 해 평균 11만 4212t이라고 하는데 이는 무려 20t짜리 생활 쓰레기 수거 트럭 5700대의 분량이며 그중 플라스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플라스틱은 자연적으로 썩는데 500년 이상이 걸린다는 큰 단점이 있습니다.

심지어 분해되어도 미세 플라스틱이 된다고 합니다.

이 미세 플라스틱은 해양 생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하는데요. 결국에는 우리 식탁에 음식으로 올라오며 인간에게 위협을 끼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해요.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오늘부터 하나하나 잘못된 습관들을 고쳐보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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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바다 위에 열리는 시장, 파시
    파시는 저장시설과 운반시설이 부족하던 시절에 바다 위에서 열리던 시장이다. 조선시대의 문헌 자료에 '파시'라는 용어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전부터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파시는 대상 어종에 따라 구분이 가능한데 조기파시와 민어파시, 고등어파시 등이 그것이다. 파시가 열리는 지역에는 이 기간 동안 임시 촌락인 파시촌이 형성된다. 파시촌은 밤만 되면 불이 꺼지지 않았는데 어부들을 상대로 여러 상업시설이 불야성을 이뤘기 때문이다.
  • 전남 >보성군

    뻘배 타고 갯벌을 미끄러지며 꼬막잡기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장암리 일원에서는 갯벌 위를 뻘배를 타고 다니며 꼬막을 채취한다. 부드러운 펄에서 꼬막 채취가 쉽도록 뻘배를 사용한다. 수십 개의 종류 중 참꼬막은 제사상에 오른다고 하여 ‘제사꼬막’이라 부르며 고급 조개로 간주한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가 좌우로 감싸고 있는 보성군 벌교 앞바다인 여자만(汝子灣)의 넓은 갯벌에 대포마을과 장암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1962년에 어촌계가 조직으로 그동안 어업 활동에 면허제도가 도입되어 마을 공동어장 관리를 시작하면서 양식 꼬막 생산이 시작되었고, 집중적으로 생산된 꼬막 작업에 뻘배가 중요한 도구로 자리잡았다. 그 결과 2016년에 '국가중요어업유산 제2호’로 지정되었다.
  • 충남 >보령시

    보령 오천항, 잠수부가 키조개를 캐는 유일한 항구
    오천항은 백제와 신라시대에 회이포라는 항구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 고려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어지자 군선을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충청수영을 설치했다. 천수만의 깊숙한 곳에 있어 피항시설이 없어도 안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도 방파제 없이 선착장에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오천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령시의 중심 장시인 광천장이 위치해 있다. 광천장을 오가는 배들이 물때가 맞지 않으면 이 곳에 배를 두고, 걸어가야 했던 마지막 기항지이기도 했다.
  • 경기 >화성시

    어촌마을에서 즐기는 바다 체험, 화성 국화도
    국화도는 경기도 소속이지만 충청남도 당진 장고항에 더 가까운 서해의 작은 섬이다. 국화도에는 두 개의 부속 섬이 있는데 이들 섬은 물때에 따라 국화도와 연결된다. 작은 섬이라 많은 주민들이 살지 않고 분교로 있던 학교도 폐교된 지 오래되었다. 선착장 주변과 완만한 경사의 국화도 해수욕장 주변에 펜션과 같은 숙박시설이 여럿 있다. 접근성이 좋고 조용한 섬으로 간단한 트래킹을 즐기러 오거나 낚시를 하러 오는 섬이다.
  • 부산 >사하구

    부산 을숙도, 다시 살아난 생태계의 섬
    부산 사하구에 위치한 을숙도는 새가 많고 물이 맑다고 해서 '을숙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과거에는 갈대와 수초가 무성하고 어패류가 풍부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까지 했던 동양 최대의 철새 도래지였으나, 산업화와 난개발 때문에 자연환경과 생태계가 훼손되었다. 이후 각종 오염을 감내해야 했던 을숙도는 1996년부터 생태계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2012년 완료하였고, 현재는 을숙도 철새공원, 낙동강하구에코센터, 생태공원과 메모리얼파크 등의 명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전국

    일반인도 쉽게 짜릿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해루질
    해루질은 물이 빠진 바다에서 어패류를 채취하는 행위를 말한다. 최근 해루질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를 하고 있다. 바다를 무대로 생활하는 어민들과 단순히 해루질 체험활동을 즐기기 위한 체험객들의 주된 목적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민들의 해루질은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부분이 강하지만 체험객들에겐 하나의 유희에 불과하다. 다만 다양한 목적으로 해루질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어족 자원을 외지에서 온 체험객들에 모두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서울 >마포구

    조선 후기 어업의 발달과 관련이 깊은 지토선
    지토선(地土船)은 지방에 소재한 배라는 뜻으로,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방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배를 말한다. 이 배의 또 다른 명칭은 어염상선(魚鹽商船)이다. 지토선은 지방을 기반으로 한 선박으로 용도적인 부분에서나 지역적인 부분에서 볼 때 매우 다양한 형태의 선박이 존재하였다. 지토선은 고기를 잡는 것보다는 물건을 싣고 강과 바다를 자유롭게 오가는 선박이었는데 주로 취급하던 품목으로는 나무와 소금, 물고기 등이었다.
  • 강원 >삼척시

    수심과 어기(漁)에 따라 다양한 어종을 어획하는 동해안의 자망
    강원도 삼척시와 동해시 어민들은 바다를 수심에 따라 구분한다. 수심 20~40m는 가까운 바다라고 부르고, 수심 100m 이상은 먼 바다라고 부른다. 수심에 따라 어구를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다. 고기를 잡는 그물인 자망(刺網)은 수심의 깊이에 따라 그 종류가 다르다. 자망은 울타리처럼 생긴 그물과 고정형 그물로 나뉜다. 그물의 용도에 따라 저자장, 유자망, 부자망, 선자망 등으로 구분된다. 설치 수심에 따라 표층자망, 중층자망, 저층자망으로도 구분한다. 동해안에서는 어류의 서식지에 따라 자망을 달리 사용하는데, 어종의 크기에 따라 자망의 그물코와 그물 겹수가 다르다. 가지미를 잡을 때는 저자망을 사용하고, 오징어를 잡을 때는 중층자망을 사용한다. 오랜 전통을 지닌 어법으로, 시기에 따라 어종의 변화와 수심에 대응해 다양한 어종을 어획할 수 있다.
  • 경북 >울진군

    바다의 길잡이 역할을 한 후포 등대
    후포리는 경상북도 울진군 최남단에 속해있는 마을로 800여명의 주민이 거주 중이다. 마을에는 해발 60m의 등기산이 자리 잡고 있고, 등기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바닷가의 산정에는 후포 등대가 자리하고 있다. 후포 등대는 1968년 1월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밤이 되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의 표지 역할과 후포항을 진출입하는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등대는 백색의 팔각형으로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높이 11m의 등대는 35km의 불빛이 뻗어나가 바다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으며, 현재는 후포항과 동해를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의 역할도 하고 있다.
  • 경북 >울릉군

    아름다운 우리 땅 국토지킴이 독도 등대
    아름다운 우리 땅, 대한민국 최동단 독도에는 국토를 지키는 독도 등대가 우두커니 서 있다. 독도 등대의 역사는 1954년 8월 처음으로 불을 밝히며 시작되었다. 독도 등대의 첫 번째 임무는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알리고 우리의 땅과 선박을 지키는 것이다. 독도 등대는 백색 원형 콘크리트 구조로 15m의 높이를 자랑하고, 최대 46km의 거리까지 빛을 전달하고 있다. 독도 동도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등대 주변에는 통신 시설과 경비 시설이 함께 하고 있다.

과거 아이들의 옷차림

아이들의 몸에 맞춰 제작된 작고 앙증맞은 옷을 보다 보면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렇게 유아옷을 보고 있으니 문득 드는 의문이 있는데요! 과거 아이들은 어떤 옷을 입고 생활했을지말이에요~ 궁금하다면 알아봐야겠죠! 지금부터 과거 속으로 떠나 아이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새곤새곤 자고 있는 아기의 저고리를 유심히 살펴보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배냇저고리를 입고 있네요. 배냇저고리는 아이가 태어나 처음 입는 옷으로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는 옷이랍니다! 추운 날씨지만 조잘조잘 떠들며 놀고 있는 아이를 보니 귀까지 덮어주는 모자를 쓰고 있네요. 저 모자는 굴레로 추위를 막기 위해 안감은 비단이나 융을 사용하였으며 화려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까치까치 설날은♬ 까치설날이네요! 저기 누가 봐도 눈에 띄는 두루마기를 입은 아이가 있는데요. 무슨 옷을 입은걸까요? 아~ 까치두루마기네요.까치 두루마기는 오색 옷감으로 지은 두루마기로 설 전날 입혔으며 현재는 돌옷으로 많이 입힌다고 합니다~ 옛 시절 아이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지 궁금했는데 궁금증이 해결되는 유익한 시간이었네요~ 다음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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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이천시

    아이들의 장수를 바라는 이천 거북놀이
    이천 거북놀이는 청소년들이 거북이 형상을 뒤집어쓰고 노는 놀이로 추석날 벌인다. 거북이를 수수 잎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밭농사와 관련이 깊다. 아이들이 남의 집 마당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나면 집주인이 떡과 음식을 내어주는 풍습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이들이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 전국

    뒤쪽이 트이게 만든 아이용 바지, 풍차바지
    풍차바지는 바지 마루폭에 바람을 막아주는 풍차(風遮)를 달고 뒤가 길게 트인 아이용 바지이다. 풍차바지라는 이름은 바지 엉덩이 부분에 헝겊 조각인 ‘풍차’를 달아서 붙여졌다. 풍차바지의 형태는 큰사폭, 작은사폭, 마루폭, 조끼허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풍차바지의 앞은 보통 남자 바지와 같다. 마루폭에 순서대로 큰사폭과 작은사폭을 꿰매어 붙인다. 그리고 바지 뒤쪽의 트인 부분에 풍차를 대어 겹치게 하였다. 풍차바지는 성인의 바지와 구성은 비슷하지만, 뒤와 밑이 트여 아이들이 입기에 적합한 의복이었다. 풍차바지를 입고 어린아이들이 배변훈련을 하기도 하였고, 색상으로 남아와 여아를 구별하기도 했던 풍차바지는 아동들이 착용했던 옷 중에서도 가장 기능적인 옷이었다.
  • 전국

    찬 기운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옷, 두렁치마
    두렁치마는 치마 모양으로 어린아이의 배와 아랫도리에 두르는 옷이다. 어린아이의 배 위에 두렁치마를 둘러 밖의 찬 기운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였다. 두렁치마의 형태는 성인의 치마와 비슷하지만 일반적인 치마와 다르게 뒤가 겹치지 않게 만들어서 아기의 뒤가 배기지 않도록 하였으며, 기저귀를 갈기에도 편리하였다. 두렁치마의 모양은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치마폭을 두고 바깥쪽에 사다리꼴의 무를 달았다. 치마의 주름은 듬성듬성 잡거나 가장자리 양쪽으로 두세 개씩 주름을 잡기도 하였다. 두렁치마의 소재는 무명, 광목(廣木), 명주를 사용해서 만들었으며 자주 세탁해야 하는 아이들의 옷이라 대체로 흰색이다. 두렁치마는 배냇저고리, 풍차바지와 더불어 외형적 디자인보다 아동의 위생과 성장에 맞춘 실용성을 고려한 유아기의 대표적인 복식이다.
  • 전국

    방한과 장식을 겸한 어린아이용 쓰개, 굴레
    굴레는 조선시대 후기 방한과 장식을 겸한 어린아이용 쓰개로 상류층 가정에서 돌쟁이부터 4~5세까지의 남녀 아이가 착용하였다. 굴레는 돌을 맞이한 아기들이 많이 써 ‘돌모’라고도 불리며, 아이의 건강에 대한 염원을 담은 다섯 가지 색의 비단에 화려한 장식을 덧붙여 아이의 쓰개로는 가장 화려하다. 굴레의 형태는 세 가닥 또는 더 많은 가닥을 얽어 정수리인 모부(帽部)를 덮고, 그 밑에 여러 가닥의 드림댕기가 드리워진다. 굴레는 어린이의 쓰개였지만 성인이 착용할 때도 있었다. 딸이 회갑을 맞을 때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딸이 색동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고 어머니의 무릎에 안기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때 굴레를 함께 썼다.
  • 서울 >용산구

    평생 '어린이'를 위해 살았던 아동문학가 방정환
    '어린이'라는 말은 1920년 전까지 우리나라에 없던 말이다. 아동문학가 방정환이 1920년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월간지 『개벽』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면서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방정환은 안데르센과 그림 동화를 번역 소개했고, 한국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아동문제연구회인 색동회를 창립하고 어린이날을 만들었으며, 동화회를 열었다. 『신청년』 , 『신여성』 , 『학생』 등의 잡지를 발간하고, 『칠칠단의 비밀』, 『사랑의 선물』 등의 동화를 썼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방정환의 동상이 서 있다.
  • 전국

    아이의 첫 생일, 돌
    아이의 첫 번째 생일을 ‘돌’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태어나 1년이 되기 전에 죽는 아이들이 많아서 돌의 통과의례적인 의미가 컸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일에 예쁜 돌복을 입히고, 음식을 풍성히 차려 잔치를 했다. 잔치 중에는 아이의 장래를 예측해보는 돌잡이도 했고, 이웃들에게 돌떡을 돌리기도 했다. 현재에도 돌은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돌잔치 문화도 전승되고 있다.
  • 전국

    삼칠일 동안 걸어두는 금줄
    금줄은 부정을 막기 위해서 집 대문이나 길 어귀에 걸어두는, 공간을 구분하는 새끼줄이다. 일반적으로 집안에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거나 중요한 제의를 준비할 때 집 대문의 양쪽 기둥 사이에 걸어둔다. 금줄을 걸어두는 기간은 삼칠일(21일) 정도이다. 금줄은 왼 새끼를 사용하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숯과 종이, 성별에 따라 남자아이는 빨간 고추를 여자아이는 솔가지를 함께 엮어 걸어둔다.
  • 전국

    은으로 배씨(梨種子) 모양을 만든 댕기, 배씨댕기
    배씨댕기는 여자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사용한 댕기이며, 은으로 배씨(梨種子) 모양을 만들고 그 위를 칠보로 장식한다. 주로 3~4세의 어린아이가 머리장식으로 사용한 댕기로 머리카락이 아직 한 줌이 채 되지 않는 어린아이들이 착용하였다. 배씨댕기는 댕기 위에 사각형이나 마름모, 또는 원형의 비단·전(氈)·융 같은 천 위에 은이나 유리로 여러 모양을 만든 장식을 얹은 것이다. 그리고 양편에 가늘게 보조댕기를 달아 중앙에 배씨를 놓는다. 그런 다음에 양편으로 가른 머리를 배씨댕기와 바둑판처럼 나누어가면 같이 연결한다. 이렇게 배씨댕기로 짧은 머리를 고정하고 앞가르마를 장식하였다. 배씨댕기는 생애 첫 장신구로 아이의 건강과 행운을 빌어 병마를 피하고, 액운을 막기 위한 주술적 의미도 포함되었다.
  • 전국

    깃이 달리지 않은 아기 저고리, 배냇저고리
    배냇저고리는 태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갓난아이를 씻기고 입히는 옷으로 깃과 섶을 달지 않은 아기의 저고리를 말한다. 배냇옷 또는 깃저고리라고도 한다. 배냇저고리의 형태는 우리나라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일반 저고리와 달리 길과 소매, 옷고름뿐이며 색이나 재료와 바느질도 매우 단순하며 엉성하지만, 실용과 과학, 합리성을 담고 있다. 또한, 배냇저고리는 많은 의미와 상징을 지니고 있어 옛 우리 가정에서는 이를 귀히 여겨 보관하는 습속이 있었다.
  • 전국

    까치설빔으로 어린이가 입는 오방장두루마기
    까치두루마기는 까치설날 아이들이 까치설빔으로 입는 옷으로 오색 옷감으로 지은 두루마기를 말하며 오방장(五方丈)두루마기라고도 한다. 까치두루마기의 형태는 다섯가지 색으로 만들어졌으며, 섶이나 길과 무는 같거나 다른 색으로 하였으나 대부분 오방색 중앙을 차지하는 황색으로 겉섶을 만들고, 길은 연두색으로 만든다. 남자아이는 깃과 옷고름인 돌띠, 남자아이는 깃과 옷고름인 돌띠와 끝동의 색은 남색, 무는 자색으로 하였다. 반대로 여자아이는 깃과 옷고름인 돌띠, 끝동의 색을 홍색·자색으로, 무는 남색으로 하였다. 이처럼 까치두루마기는 검은색을 제외한 고운 색으로 소매와 길을 만들었다. 이는 오방색을 통해 길상(吉祥)의 기(氣)를 받아 부귀영화와 장수를 누리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뚜벅뚜벅 역사를 거닐는 옛길

길을 걷다 보면 다양한 풍경들이 자연스레 눈에 담기게 되고 심란했던 마음이나 복잡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끼게 됩니다. 하루쯤은 정처 없이 걷는 것도 좋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담고 있는 옛길을 뚜벅뚜벅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옛 조상님들이 걸으며 보았던 풍경과 사뭇 다를 순 있지만 가는 길목 길목에 남겨진 역사의 산물이 옛길의 흔적을 보여준답니다. 지금부터 편안한 마음으로 걸어볼 수 있는 옛길을 알아볼까요? 조선과 중국을 오가는 상인과 사신들이 이용했던 의주길은 의주대로를 바탕으로 한 역사문화탐방로로 화석정, 벽제관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등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어 길에 담긴 역사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평해길은 강원도와 한양을 연결해주던길로 들판과 산, 한강 수변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며 정약용유적지, 망우묘역 등을 탐방해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강진과 영암을 잇는 삼남대로의 중요한 고갯길 누릿재는 최익현, 송시열,김정희 등 많은 문사들의 방문기록이 있는 역사적가치가 큰 옛길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남긴 흔적뿐만이 아니라 오랜시간 축적되어온 문화, 역사 등을 담고 있는 옛길을 가족, 친구들과 함께 나란히 걸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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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보은군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타고 넘던 말티재길
    법주사가 있는 속리산으로 진입하는 관문이라 불리는 말티재는 신라 진흥왕 때에 법주사를 세우기 위해 의신조사가 넘어간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넘었던 옛길이다. 말티재는 사람을 가마가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험하고 힘든 구간이었다. 사람이 가마에서 내린 후 말에 옮겨 탔다는 고개일 정도로 사람들의 통행도 어려웠던 길이다. 신작로가 만들어지고 법주사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속리산으로 진입하는 주요한 입구 역할을 했다. 지금은 말티재 옛길의 북쪽에 속리터널이 개통되면서 자동차의 통행량도 많이 감소했다. 말티재를 넘어가면 임금이 벼슬을 하사한 정이품송 소나무가 있다.
  • 경기 >화성시

    아버지 사도세자를 찾아 정조가 다니던 화성효행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로 옮기고 매년 능을 찾았다. 도성에서 무덤이 있는 현륭원까지 이르는 길은 정조효행길 또는 화성효행길이라는 이름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배다리를 이용해 한강을 건넌 후 과천에서 수원으로 이동했지만, 1795년부터는 한강을 건넌 후 시흥(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을 지나 수원으로 향했다. 과천길을 버리고 시흥길을 택한 것이다. 시흥행궁에서 머무른 뒤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화성에 도착했으며, 화성행궁을 출발해 대황교를 지나 현륭원으로 이동했다.
  • 서울 >관악구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관문 남태령 옛길
    남태령은 서울특별시 관악구와 경기도 과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다. 지금은 남태령에 넓은 대로가 개통되어 자동차의 통행이 빈번한 도로가 통과한다. 일제강점기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조그마한 산길을 넘어 한양과 지방을 오가던 사람들이 이동했다. 과거 남태령 구간에는 도적이 많아 50명 이상의 행인이 모인 다음 관군의 호송을 받아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남태령을 넘어 서을특별시의 사당동, 동작동을 지나 노량진의 노량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이동했다.
  • 경기 >과천시

    한양으로 들어가는 한양관문길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남부지방으로 향하던 대로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이어지던 삼남로이다. 삼남대로라 불리기도 하던 이 길은 조선시대 육상교통의 중심축이었으며, 근래에 경기도 삼남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조명되고 있다. 경기도 삼남길의 첫 번째 구간이 한양관문길이다.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의 경계를 형성하는 남태령에서 시작하여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온온사, 과천향교, 가자우물(찬우물) 등을 거쳐 경기도 안양시의 인덕원에 이르는 구간이 한양관문길에 포함된다.
  • 충북 >충주시

    백두대간을 최초로 넘었던 하늘재 옛길
    하늘재 옛길은 경상북도 문경시와 충청북도 충주시를 잇는 해발 520m의 고갯길로, 백두대간을 넘는 여러 고갯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하늘재는 한반도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며, 국방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다. 하늘재 옛길은 삼국시대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가 신라로 이동하던 통로이며, 주변에서 생산된 물자의 교역이 이루어지던 남북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 경북 >영주시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죽령 옛길
    죽령 옛길은 경상북도 영주시와 충청북도 단양군을 연결하던 옛길이다. 현재 죽령을 통과하는 길 가운데 영주시의 희방사역에서 고갯마루의 죽령 주막에 이르는 구간이 죽령 옛길로 남아 있다. 자동차 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 죽령 옛길은 경상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기능을 담당했다.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 다양한 물건을 짊어지고 나르던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길이었다. 죽령 옛길이 매우 경사가 심한 구간에 자리했으므로 새로운 도로나 철도가 개통될 때에 죽령 옛길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강원 >양양군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의 물자가 오가던 구룡령 옛길
    구룡령은 강원도의 양양군 서면과 홍천군 내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옛길은 산세가 부드러워 옛날부터 영동지방 사람들이 내륙으로 갈 때 많이 이용하던 길이다.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선비들은 물론, 지게꾼과 가마꾼도 구룡령 옛길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일제는 동해안의 물자를 빼앗아 가고자 1908년 새 도로를 개통하면서 신작로가 구룡령 옛길과 노선을 중복하지 않아 구룡령 옛길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조선 시대와 근현대의 자취를 모두 간직하고 있는 구룡령 옛길은 역사・문화와 자연경관의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 경기 >의정부시

    정조가 광릉을 참배할 때 통과하던 축석령길
    경기도 의정부시와 포천시의 경계에 있는 축석령은 오래전부터 한양에서 강원도 철원을 지나 함경도로 이어지던 조선시대의 간선로에 포함된 구간이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사람, 변방으로 귀양 가는 사람들이 넘던 고갯길이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은 남양주시에 있는 광릉을 참배하러 다니던 능행길에 축석령을 통과하기도 했다. 한양으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던 까닭에 동학혁명 때에는 일본군과 의병 사이의 전투가 있었고, 6·25전쟁 때에는 한국군과 적군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곳이 축석령이다.
  • 경기 >광주시

    경기도 광주 경안역을 중심으로 연결된 경안도(慶安道)
    경안도는 조선 시대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경안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역로이며, 경안역은 1457년 종6품인 찰방으로 승격되었다. 이 역로는 한양에서 지금의 경기 동남부에 해당하는 광주-이천-여주-충주 방향으로 이어지던 역로와 이천-음죽 방향으로 이어지던 역로를 관할하였다. 중심이 되는 경안역을 비롯하여 광주의 덕풍역, 여주의 양화역·신진역·안평역, 이천의 아천역·오천역, 음죽의 유춘역 등 7개 역이 포함되었다. 경안도는 경상도의 동부인 경상좌도 및 일본에서 한양으로 이동하는 물건의 수송로상에 있던 역들을 담당하였다. 또한 왕이 한양에서 출발하여 여주의 왕릉으로 향하던 능행로의 구간에도 포함되었다.
  • 경기 >과천시

    이야기가 있는 과천 남태령 옛길 따라 도보산책
    남태령에는 17세기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여우고개 이야기와 정조 대왕 능행차시 남태령으로 지명이 바뀌게 된 사연 등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현재 남태령 도로 옆에 조성되어 있는 남태령 옛길은 한양에서부터 삼남(경상, 전라, 충청)으로 통하는 대로였으며, 역사적으로는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현륭원으로 행차하실 때 지나셨던 효행의 길로써 유서가 깊은 길이다. 남태령 옛길 따라 과천방향으로 산책을 하면서 평소 모르고 지나쳤던 숨어있는 우리 조상들의 정신과 얼이 담겨져 있는 문화유적지들을 탐방해 본다.

참 맛있는 여행, 거제

푸르른 5월, 날이 좋은만큼 콧바람을 쐬러 어디든 떠나고 싶어집니다. 날이 좋은데 집에만 있기엔 심심하신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저와 함께 거제로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수많은 여행지 중 왜 거제인지 물으신다면 응당 답해드리는 게 맞겠죠! 지금부터 거제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말씀드릴 테니 하나도 놓치지 마세요!

밥심으로 살아가는 민족에게 있어 맛집 탐방은 빼놓을 수 있는 취미생활 중 하나입니다. 맛집 탐방에 진심인 분들에게 거제는 흥미진진한 여행지가 될 텐데요. 풍부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췄으며 오직 거제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향토 음식이 즐비해 있기 때문이죠!

거제 9미라 불리며 입맛을 사로잡는 음식들은 맑은 해산물을 가미하여 소박하지만, 그 참 맛은 제일이랍니다.

거제 9미에 대해 살짝 살펴본다면 거제의 특색이라 해도 손색없을 성게, 멍게 비빔밥인데요. 청정지역인 거제에서만 해녀들이 직접 잡은 성게로 만들기 때문에 특유의 향과 맛이 일품이랍니다. 다음으로는 봄의 나른함을 쫓아줄 도다리쑥국입니다. 담백한 맛의 도다리와 향긋한 향의 봄 제철 식품인 쑥의 조합으로 한번 먹으면 잊지 못할 맛을 선사해줍니다~ 맛있는 여행 거제에서 바로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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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거제시

    겨울 남해의 방파제 낚시로 맛보는 호래기(꼴뚜기)회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 이 말은 꼴뚜기가 얼마나 볼품없는 생선으로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명백히 드러내는 속담이다. 그러나 꼴뚜기는 그런 취급을 받을 생선이 아니다. 남해안에서는 통칭 ‘호래기’라고 부르는 꼴뚜기는 아직 양식이 안 되기에, 가격이 비싼 고급어종에 속한다. ‘경남의 진주’라고도 불리는 꼴뚜기는 경상남도의 초겨울, 통영과 거제의 방파제 및 수산시장에서 맛볼 수 있다. 아는 사람들만 즐긴다는 호래기 낚시와 호래기 회는 재미와 별미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 경남 >거제시

    자연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거제 장승포항
    경상남도 거제시 장승포동에는 국제 개항장인 장승포항이 있다. 장승포는 거제도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날이 맑으면 바다 건너 일본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 1889년(고종 26년)에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으로 일본 어민이 대거 이주해와 마을을 형성했다. 1930년에 방파제를 쌓으면서 어항과 무역항으로 발전했다. 1965년 6월 개항장이 된 후 인근에 대우조선공업의 옥포조선소가 만들어지면서 크게 발전했다. 부산과 장승포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장승포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연륙되면서 지금은 여객선이 한려수도 해상 관광 유람선을 운행하여 해상 관광 도시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 경남 >거제시

    바다의 맛과 향을 비벼보자, 거제도 멍게비빔밥
    멍게비빔밥은 살짝 얼린 멍게젓갈에 밥과 함께 김 가루, 참기름, 야채 등을 넣어 비빈 요리로 경상남도 거제도의 향토음식이다. 주재료인 멍게젓은 멍게의 살로만 만드는데, 멍게 특유의 향과 단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멍게비빔밥을 먹을 때는 일반적으로 고추장을 첨가하지 않는다. 멍게젓 자체에 양념이 배어 있기도 하고 고추장이 멍게 특유의 향과 맛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경남 >거제시

    조개를 회로 먹는다고? 왕우럭조개
    이름에 접두어 ‘왕’이 붙을 때에는 유별나게 크거나 특출난 것을 표현한다. 뚜껑이 유별나게 커서 왕뚜껑, 중국집의 왕짬뽕, 어린시절 추억의 간식 왕밤빵까지... 개체중에 특출나게 큰 것은 왕건이 잡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크기 자랑은 거제도 앞바다에도 있으니, 그 이름 왕우럭조개다. 못해도 성인 주먹보다 크고, 특출나게 큰 녀석은 사람 얼굴만 한다고 하니, 과연 ‘왕’의 자리에 오를 만하다. 커서 회로 먹어도 충분한 살이 나오는 조개. 거제도의 명물 왕우럭조개를 만나보자.
  • 경남 >거제시

    수정같이 솟아있는 거제 옥산성
    거제 옥산성은 경상남도 시도기념물 제10호로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수정봉 정상 부분에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수정봉성이라고 불리는 옥산성은 게제도의 옛 치소 뒷산에 있는 산성으로 거제도에서 제일 높은 계룡산에서 거제면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 부분에 있다. 그리하여 옥산성에 오르면 멀리 한산도가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서쪽 방향이 트여있어 산성지로 적합한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 경남 >거제시

    일제강점기 대량생산된 마른멸치
    조선시대부터 멸치는 삶은 것을 말려서 유통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어민들이 한반도 해안가에 이주하고 개량된 장비로 많은 멸치를 잡으면서 마른멸치는 대량생산되었다. 경남의 멸치어장은 거제도, 욕지도, 진해만, 남해도, 사랑도, 울산만 등이고, 전남의 멸치어장은 거문도, 추자도, 제주도, 태랑도, 소안도, 흑산도 등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어장은 경남 거제도, 진해만, 욕지도, 사랑도, 거문도, 제주도 등이다. 통영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마른멸치를 일본이나 중국으로 유통시키는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 경남 >거제시

    진해만의 대구 잡이
    대구포는 대구를 말린 것으로 밑반찬이나 제사음식으로 쓰였다. 대구포를 만드는 대구어는 경남 창원 인근의 진해만이 최대 어장이다. 진해만에 있는 대구어장의 중심은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이다. 1979년 무렵에는 어민 450여명이 60여척의 배로 대구를 잡을 정도였다. 한반도의 대구어는 동해 계통 대구어와 서부 황해계통의 대구어로 나뉜다. 황해방면의 대구어는 체형이 왜소하고 동해계통 대구어보다 맛이 떨어진다. 진해만의 대구어는 동해 계통 대구어가 산란을 위해 왔다가 잡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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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수복을 입고 전복을 캐는 거제의 ‘모구리어업’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장동마을에는 모구리가 많다. 모구리는 잠수부를 일컫는 말로, ‘머구리’라고도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어패류를 채취하기 위해 조선으로 밀려 들어온 잠수기 업자들이 침탈적으로 어로행위를 이어 나갔다. 급기야 남획으로 인해 수산자원을 보호하려 어업을 통제해야 했다. 해방 이후 일본인 소유였던 잠수기어선이 귀속재산으로 처리되면서 초기 잠수기어업이 시작되었다. 전국에서 잠수기어업이 이루어지지만 그중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거제 장목항이다. 장목항 주변의 저도 어장은 천혜의 자원 보고로 많은 잠수기어선이 모여든다. 거제 어장에서는 개조개, 바지락, 왕우럭 등을 주로 채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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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타고 함흥에서 흥남으로, 흥남에서 뱃길로 거제도까지
    이장영(남·1940년생)현 거제도민회회장이다. 유서깊은 개신교 목사 집안 출신으로, 목사였던 부친이 흥남철수 작전을 기획하고 준비한 현봉학(의사)을 도와 당시 미사령관이었던 알몬드 장군을 강하게 설득했다고 한다. 교인인 가족들은 남은 사람 없이 피난을 나와 함흥에서 흥남으로 기차를 타고 왔고 부두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까지 와서 피난살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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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거제의 삼 삼으며 부르는 줌치타령
    경남 거제시에는 삼을 삼으며 부르던 노래로 줌치타령이 전승되고 있다. 삼삼기는 여성들의 노동이었기 때문에 「삼삼는소리」 또한 여성노동요라고 할 수 있다. 본디 줌치타령은 노래 자체를 즐기는 가창유희요이나 삼삼기의 고됨과 지루함을 잊기 위해서도 불렀다. 줌치 즉 주머니를 짓는 재료부터 주머니를 지은 방법, 주머니를 매개로 한 남녀 간의 구애 행동을 가사에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