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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포스트

다양한 주제로 구성된 기획전을 통해 여러 가지 지역 문화콘텐츠들을 한 곳에 모아 보여줍니다.

따뜻한 겨울 나기

월동준비 1호, 연탄과 추운 겨울 먹으면 더 맛있는 군것질 거리, 솜이 들어간 누비옷 등 겨울을 나기 위한 생활 모습을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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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태백시

    연탄가스와 동치미 국물

    난방과 취사를 연탄으로 하던 1960년대~1980년대에는 연탄가스로 인한 중독 사고가 많았다. 특히 아궁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방구들이 금이 가거나 제대로 환기가 되지 않아 연탄가스가 부엌에 머물러 있는 경우, 그리고 방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문틈으로 가스가 새어 들어오는 경우에는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발생하기 쉽다. 연탄가스를 심하게 맡을 경우 생명까지 잃기도 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각 가정에서는 잠잘 때 물 한 그릇을 방에다 떠다놓고 자기도 했다. 그래도 연탄가스를 맡았을 때에는 항아리에서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떠다가 환자에게 먹이곤 했다.

  • 구멍탄, 십구공탄, 연탄의 이름들

    1950~1960년대에는 주먹탄을 만들어 썼다. 주먹탄을 사용하는 화덕을 시중에서 판매할 정도였다. 1950년대 들어 연탄이 가정용 연료로 등장하는데, 연탄을 구멍탄 혹은 구공탄으로 불렀다. 연탄이 잘 타도록 세로로 뚫어놓은 공기구멍 때문에 구멍탄이라고, 최초의 연탄 구멍이 아홉 개라 하여 구공탄이라고 불렀다. 19공탄과 22공탄이 대중적인 연탄이다.

  • 연탄은 월동준비 제1호

    연탄 준비는 월동준비 제1호로 꼽혔다. 광업소에서는 연탄표를 지급하는 복지제도를 시행했다. 1970년대의 연탄배달 차량은 딸딸이로 불리던 삼륜 화물차로, 사택 단위나 마을 단위로 찾아다니면서 공터에 연탄을 내려놓았다. 남자들은 지게로 10∼20장을, 여자들은 대야에다 대여섯 장을 담아 이고 날랐으며, 아이들까지 가세해 손으로 들고 날랐다.

  • 충남 >서산시

    밥도둑 인정, 서산 어리굴젓

    굴은 “바다에서 나는 우유”라고 불릴 만큼 영양가가 높다. 선사시대 유적지인 부산 동삼동이나 김해 회현리의 조개무지에서 조개와 굴 껍데기가 많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굴을 먹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어리굴젓은 생굴과 소금, 고춧가루를 버무려 담근 젓갈로 고춧가루를 사용한다는 것이 다른 굴젓과 다른 점이다.

  • 경북 >경주시

    겨울철 의복을 누비는 누비장

    누비는 옷감의 보강과 보온을 위해 옷감의 겉감과 안감 사이에 솜, 털, 닥종이 등을 넣거나 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안팎을 줄지어 규칙적으로 홈질하여 맞붙이는 바느질 방법이다. 누비의 종류는 누비의 간격, 형태, 재봉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손누비는 세계 유일한 재봉법으로 그 정교함과 작품성이 자수를 능가하는 예술품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 너무 귀해서 나무를 잘라버렸던 감귤

    감귤은 대표적인 겨울 과일로 동남아시아 아열대가 원산지이다. 비타민 A, C의 함량이 높아 겨울철 감기 예방에 좋다. 겉껍질은 말려서 차나 약재로 활용하며, 속껍질의 하얀 부분은 펙틴이 풍부하여 과육과 함께 잼, 마멀레이드로 활용된다. 이른 시기부터 재배된 과일로 보여지며 현재 우리가 먹는 감귤의 대부분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사이에 일본에서 들어온 온주밀감이다. 그러나 최근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과 같은 감귤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 경남 >김해시

    겨울에도 채소를 키울 수 있는 비닐하우스

    비닐하우스는 채소류의 재배에 가장 많이 활용되는 시설물이다. 그 외에 화훼류(花卉類) · 과수류(果樹類)의 재배에도 이용된다. 일종의 온실로서 보온력이 뛰어나 겨울철 농사에 활용된다.

  • 부산 >중구

    복날과 동지, 죽집에서 먹던 팥죽

    오늘날 팥죽은 동지에 먹는 음식으로 알고 있지만, 일제강점기까지 복날에 팥죽을 먹었다. 동지에도, 복날에도 먹던 음식이었다. 조선후기부터 죽집이 있어서 주로 팥죽을 팔았다. 팥죽을 끓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5~7시간 불을 때면서 끓여야 했기에, 죽집은 새벽 장사를 위해 밤새 팥죽을 끓인다. 이런 이유로 죽집에 화재가 잘 발생했다. 일제강점기 죽집은 주로 시장근처에 있고 한그릇에 5전, 반그릇에 3전의 가격으로 팥죽을 팔았다.

  • 충남 >공주시

    추운 겨울날 새벽까지 파는 군밤

    밤은 우리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먹은 과실이다. 조선시대에는 평양밤과 양주밤이 유명했는데 일제 강점기에도 명성이 이어졌다. 특히 평양밤은 당도가 높아 일본으로 많이 이출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군밤장사의 수가 많아지는데 주로 도시에서 낮부터 새벽 2시까지 화로에 밤을 구워 팔았다. 가을부터 초봄까지가 군밤장수의 활동기였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일본인이 운영하는 백화점 근처에선 기계로 평양밤을 구워팔기도 했다. 어린 군밤장수는 10전의 군밤을 팔기위해 추운 겨울 낮부터 새벽까지 바깥에서 떨기도 하였다. 

  • 전북 >전주시

    팥죽과 칼국수의 따끈한 만남, 전라북도 팥칼국수

    팥칼국수는 팥물을 끓여 만든 앙금에 밀가루 또는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반죽한 칼국수를 넣고 끓여 설탕과 소금으로 간을 하여 싱건지, 묵은 김치 등과 함께 먹는 전라북도 지역의 향토음식이다. 과거에는 먹을 것이 부족하여 어려웠던 시절의 허기를 달래주는 식사였지만 현재는 영양식 또는 별미로 찾는 음식이다.

겨울로 들어서는 날, 입동(立冬)

해마다 양력 11월 7 ~ 8일 무렵은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입니다. 입동 때의 날씨를 보며 그해 겨울 추위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입동 즈음이면 긴 겨울을 보내기 위해 김치와 같은 저장 음식을 준비하고, 추어탕과 같은 보양식을 먹으며 기력을 보충하기도 하는데 김치의 종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치미, 배추김치 외에도 지역마다 매우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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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부안군

    염장만큼 숙성이 중요한 젓갈

    젓갈은 어패류에 소금을 넣고 발효시킨 음식이다. 일제강점기 젓갈생산지역으로 유명한 곳 중 하나가 곰소만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간척사업으로 섬이었던 곰소가 육지가 연결되고 그 부근의 갯벌은 염전이 되었다. 염전에서 천일염이 많이 생산되어 젓갈의 재료로 쓰였다. 곰소만에서 잡히는 어패류가 다양했으므로 곰소만의 젓갈은 다양하다. 젓갈은 신선한 해산물을 잡은 즉시 바로 염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숙성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젓갈의 숙성은 곰소만의 객주들이 했는데 이들은 주로 충남의 광천굴, 폐광, 폐터널 등에서 젓갈을 숙성시켰다.

  • 충남 >홍성군

    토굴 숙성 새우젓으로 유명한 광천토굴새우젓시장

    우리나라에서 새우젓으로 유명한 곳이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이다. 광천은 고려시대 때부터 새우젓 산지로 유명했다. 조선시대에는 호남지역에서 세곡 등을 싣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조운선(漕運船)이 운행하는 길목이다. 현재 ‘광천토굴새우젓시장’은 토굴에서 숙성시킨 새우젓을 주로 판매한다. 시장의 상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새우젓을 파는 상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새우젓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 충남 >논산시

    강경포구와 강경장의 명성을 되살린 강경젓갈시장

    우리나라 서해안 해산물이 강경포구까지 배로 올라오고, 호남평야에서 생산한 농산물이 강경포구에 모였다가 충청도와 경기도로 간다. 그곳에 강경장이 있었다. 강경장은 1930년대까지 평양장, 대구장과 함께 그 규모가 3대 오일장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와서 옛 강경장의 명성을 되찾고, 지역 특산물인 젓갈을 홍보하기 위해 ‘강경젓갈시장’ 복원에 노력하고 있다.

  • 충남 >논산시

    “새우젓은 1년 되어야 살이 부서지고 젓국물이 구수하죠”

    새우젓은 담그는 시기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음력 3~4월에 담그면 춘젓, 5월에 담그면 오젓, 6월에는 육젓, 9-10월이면 추젓이라 한다. 그중 육젓이 가장 맛있는데, 어획량이 많지 않아 값이 비싸다. 새우젓은 숙성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저장온도, 염의 비율, 보관 용기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냉장시설이 좋아진 요즘은 소금의 양이 많이 줄었다. 1년 넘게 잘 숙성한 새우젓의 젓국물은 막걸리 같다. 새우젓은 1년이 되어야 살이 부서지고 맛있어진다. 젓이 죽이 되지 않고 새우가 예쁘고 또렷한데, 감칠맛이 나고 국물 빛이 묽다면 조미액을 따로 넣은 것이다.

  • 인천 >중구

    “쌀이 귀해서 흔한 굴, 김치 넣고 짠지떡이라고 불렀는지도 몰라”

    짠지떡에는 백령도에서 흔한 자연산 굴이 들어있다. 그리고 까나리액젓으로 만든 깔끔한 김치가 그 맛을 좌우한다. 짠지떡의 피는 만두처럼 얇지 않고 두껍고 쫀득하다. 두부나 채소 없이 굴과 삭은 김치 두 가지로 맛을 내고, 굴이 있어도 무르지 않고 먹기에 알맞다.

  • 경북 >경주시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부자집 며느리의 사연이 담긴 김치 사연지

    사연지는 경상도 백김치의 일종으로 경상북도 경주시와 안동시의 향토음식이다. 만드는 방법이 까다롭고 정성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안동지역에서는 제사상에도 올린다. 경주 최부자집의 내림음식으로도 유명하며 사연지라는 이름도 최부자집에서 유래한다.

  • 전남 >무안군

    남도의 쌉싸름한 맛, 전라남도 고들빼기김치

    고들빼기김치는 소금물에 삭혀 쓴맛을 제거한 고들빼기를 멸치젓국,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의 양념에 버무려 담근 전라남도 지방의 향토음식이다.

  • 강원 >춘천시

    겨울철 물에 담가 먹는 김치, 동치미

    동치미는 무를 통째로 소금에 절여 배, 청각, 쪽파, 갓, 고추, 마늘, 생강 등과 함께 소금물을 부어 익힌 김치이다. 주로 김장철에 담그는 동치미는 옛 조리서에 ‘동침(凍沈, 冬沈)’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름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북부 지방에서는 동치미 국물에 면을 말아 겨울철 별미로 즐겼고 강원도 지역에서도 막국수 국물로는 동치미 국물을 기본으로 한다.

  • 인천 >옹진군

    김치 맛을 더욱 살려주는 옹진 까나리액젓

    까나리는 뼈째 먹을 수 있는 고칼슘, 고단백 생선이다. 구이나 찌개, 조림 볶음 등으로 요리해 먹기도 하지만 주로 젓갈을 담가 먹는다. 까나리젓은 까나리를 소금에 절여 5개월 이상 발효 숙성시킨 식품으로 숙성된 젓갈을 베보자기나 창호지에 거른 것이 액젓이다. 까나리액젓은 김치의 신선도를 높여주고 숙성을 빠르게 하고 간장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 충남 >서천군

    충청남도 서천군의 자랑, 붉은보라 빛 새우젓, 자하젓

    자하젓는 8월~11월 , 서해안의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충청남도 서천군지역에서 잡히는 새우인 자하로 담든 일종의 새우젓이다. 자하(滋蝦)는 본래 투명하지만, 젓갈을 담가 숙성되면 붉은 연보라 빛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맛이 담백하고육질이 부드러운 자하젓은 충청남도 서천군의 대표적인 특산품이다.

한국의 서원

2019년 5월, 유네스코의 자문·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한국의 서원 9곳'에 대해 세계유산 등재를 권고하였습니다. 성리학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은 9개 서원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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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정읍시

    태인의병 창의지 무성서원

    정읍 무성서원은 한말 을사의병기에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태인의병 창의를 결의한 곳으로 사적 제166호이다. 무성서원은 고려시대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에서 유래하며, 조선시대 서원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 모인 유림들은 최익현의 창의선언에 동참하기로 하여 의병대열에 합류함으로써 태인의병이 결성되었다.

  • 경북 >안동시

    풍악서당에서 병산서원으로

    병산서원은 풍산현의 유림이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풍악서당을 모체로 하고 있다. 류성룡은 풍악서당이 있던 곳이 사람의 왕래가 잦아 학문에 방해가 된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후에 류성룡의 문인들이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려 풍산서당 안에 존덕사를 세워 배향하였고 이것이 지금의 병산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의 교육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고 해방 이후에는 학교법인을 설립해 서원의 교육철학은 현대에까지 계승되었다.

  • 경북 >안동시

    이황의 도산서당을 모체로 한 도산서원

    명종이 즉위한 1545년 을사사화가 있었다. 사화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이듬해인 1546년 이황은 병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한다. 이때부터 호를 물러날 퇴, 시냇물 계, 퇴계(退溪)라 하고 고향에서 살았다. 토계 인근에 정자와 서당을 짓고 이곳에서 도덕과 예를 실천하고 가르치며 군자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도산서원은 이런 이황의 가르침을 받았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서원이었다.

  • 대구 >달성군

    김굉필의 처향에 세워진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과 한강 정구를 배향하는 서원으로, 서원이 위치한 달성군은 김굉필의 처가가 있는 곳이었다. 김굉필은 동방 5현에 속하는 인물로, 그의 학문과 삶은 『소학』과 『대학』이 가르침에 충실하였다. 특히 스승인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유배를 가고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의연함과 단정함은 선비들의 사상과 학풍을 넘어 실천의 가르침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김굉필의 외손인 한강 정구는 도동서원 중수와 도동원규 편찬에 기여하였고 소학의 가르침을 예학으로 발전시켰다.

  • 경남 >함양군

    함양의 유림이 뜻을 모아 세운 남계서원

    함양은 일두 정여창의 고향으로, 남계서원은 고을 사림들이 정여창을 흠모하여 세운 서원이다. 함양은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이자 글과 예를 숭상하는 풍속이 있었다. 함양의 선비들은 남계서원을 정몽주를 배향하는 영천의 임고서원과 안향을 기리는 소수서원과 견줄 만큼 정여창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 충남 >논산시

    김장생이 예학을 가르치던 곳에 세워졌던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조선의 예학을 학문적으로 자리매김한 김장생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김장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양성당 옆에 세워졌다가 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 되었다. 서원에는 김장생의 뒤를 이어 학문과 강학을 이어간 아들 김집과 제자인 송시열과 송준길이 함께 배향되어 있어 조선 예학을 이끌었던 주요 선현들을 만날 수 있다. 19세기 들어 주변 지형이 변하고 서원 앞에 흐르는 사계천이 범람하면서 침수피해가 커지자 1880년(고종 17)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워졌다. 건물이 웅장했던 강당 응도당은 1971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건 과정에서 당초의 건물배치와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경북 >영주시

    소백산 자락의 깊은 골에 자리한 소수서원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기 전에 주세붕이 붙인 이름은 ‘백운동서원’이었다. 백운동(白雲洞)은 ‘흰 구름에 쌓인 골짜기’라는 뜻으로 서원의 입지와 관련이 깊다. 서원에서 바라보면 멀리 소백산의 산자락 위로 흰 구름이 가득하고 옆으로는 소백산에서 내려온 죽계천이 연못을 이루다 밑으로 흘러갔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죽계별곡」은 이곳 죽계천을 노래한 고려가요이다. 구름에 감싸인 소백산과 그 밑으로 흐르는 죽계천의 경치를 보면서 주세붕은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떠올렸고 이곳에 서원을 세워야겠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 경북 >경주시

    양동마을 독락당에 세워진 옥산서원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서원이 위치한 안강은 이언적의 고향이다. 이언적은 을사사화로 유배 간 강계에서 죽음을 맞았고, 19년이 지난 후에 마을의 사림들이 지방관의 도움을 받아 그가 거처하던 독락당 근처에 덕행과 학업을 기리는 서원을 세웠다. 16세기 말에 세워졌지만, 임진왜란의 피해를 입지 않아 건물과 소장 유물들이 잘 보전되어 있다.

  • 전남 >장성군

    호남지방 지성의 산실, 장성 필암서원 확연루

    확연루(廓然樓)는 필암서원의 문루이자 유생들의 휴식 공간이다.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서원이다. 필암서원은 1590년 창건된 후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어 1624년 복원하였고, 1662년 ‘필암서원’ 사액을 받았다. 필암서원이 들어선 위치가 수해를 당하기 쉬운 곳이어서 1672년 지금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재의 확연루도 1752년 화재로 전소되어 다시 중건한 건물이다. 1760년 김시찬이 「확연루기」를 지었고, ‘확연루’ 편액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가을볕 받으며, 누정 산책

걷기 좋고, 단풍이 물드는 계절, 가을. 우리 지역에 있는 누정에 올라 가을 정취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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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 >영주시

    최초의 서원에 지어진, 영주 소수서원 경렴정

    경렴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 자리한다. 경렴정은 다른 서원의 누정과 다른 점이 많다. 경렴정은 용도나 양식을 볼 때 누각이 아니라 정자의 형태이고, 다른 서원의 누각과 달리 서원 밖에 세워져 있다. 정자에는 ‘경렴정’이라 쓴 두 개의 편액과 신재 주세붕과 퇴계 이황이 지은 시를 비롯한 여러 현판이 걸려있다. 

  • 경북 >안동시

    형제간의 우애가 느껴지는, 안동 백운정

    백운정(白雲亭)은 안동을 가로지르는 반변천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지어졌다. 지금은 임하댐 건설로 임하호가 펼쳐져있다. 흰 구름이 머무는 정자. 강 건너로는 개호송 숲과 의성 김씨 동족마을의 고택이 보이는 수려한 곳이다. 일대가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백운정은 귀봉 김수일(金守一)이 1568년 지은 정자이다. 김수일은 평생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던 인물이다. 백운정은 동생인 학봉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더 알려졌다. 김성일은 백운정에 머물며 많은 시를 남겼다. 미수 허목이 전서체로 쓴 ‘백운정(白雲亭)’ 편액이 정자의 기품을 더해준다.

  • 충북 >제천시

    벗들과 새 보금자리로 이사한, 청풍 응청각

    청풍 응청각(凝淸閣)은 청풍 관아의 부속 건물로 공무로 내려온 관인이 머물던 객사였다. 응청각이 원래 있던 자리는 제천시 청풍면 읍리였다. 읍리가 수몰되면서 응청각도 청풍 관아의 금병헌·한벽루·금남루 건물과 함께 현재의 자리로 사이좋게 이전되었다. 문루인 금남루에서 보면 동헌인 금병헌, 응청각, 한벽루가 나란히 서있다. 청풍명월의 고장답게 퇴계 이황과 같이 응청각에서 유숙하면 지은 시가 많이 있다.

  • 전남 >순천시

    신선들의 놀이터, 순천 선암사 강선루

    순천 선암사 강선루(降仙樓)는 다른 사찰과 달리 문루 기능이 큰 2층 누각이다. 강선루는 좁은 지류가 흐르는 다리 위에 지은 문루여서 다른 누각과 구조가 많이 다르다. 강선루 1층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고,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맑고 깊은 계곡 옆의 강선루와 보물로 지정된 무지개다리 승선교가 같이 있어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선암사(仙巖寺), 강선루(降仙樓), 승선교(昇仙橋)’ 모두 신선과 연관된 이름이다. 온통 신선들의 놀이터다.

  • 전남 >완도군

    윤선도와 송시열의 엇갈린 운명, 보길도 세연정

    윤선도는 1637년 이후 보길도에 부용동 원림인 ‘세연정 – 낙서재 – 동천석실’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세연정(洗然亭)은 두 곳의 인공 연못 사이에 지은 정자이다. 사람의 손이 더해져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곳이 세연정이다. 대청마루 기둥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멋진 액자 속의 명화이다. 보길도에는 남인 윤선도에게 시련을 안겨주었던 서인 송시열의 흔적이 함께 남아있다.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가다 풍랑으로 도착한 곳이 바로 보길도였다. 그는 보길도 끝 암벽에 죽음을 예감하듯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새겨놓고 그해 죽었다. 남인과 서인의 영수로 대결하던 두 거물. 역사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 전남 >담양군

    천상의 화원, 담양 명옥헌

    담양 명옥헌은 배롱나무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명옥헌은 조선 중기에 아들 오이정이 아버지 오희도가 죽은 후 아버지를 기리며 지은 누정이다. 계곡 물소리가 ‘옥구슬이 부딪쳐 깨지는 듯 맑은 소리’ 같다는 의미의 명옥헌은 배롱나무꽃이 필 때쯤이면 천상의 화원이 된다. 담양의 다른 누정과 달리 관련된 문학 작품이 많지 않지만 자연 경관 만으로도 상쇄하고 남음이 있다.

  • 경북 >포항시

    추사와 그의 아버지를 함께 만나는, 포항 분옥정

    분옥정(噴玉亭)은 용계정(龍溪亭)과 함께 포항의 대표적인 정자이다. 분옥정은 숙종 때 유학자 김계영을 기리기 위해 1820년 경주 김씨 문중에서 지은 정자다. 분옥정은 ‘용계정사’ ‘화수정’ ‘청류헌’ 으로도 불리었다. 정자에는 여러 편액과 기문이 걸려있다. 이 가운데 ‘용계정사’ ‘화수정)’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쓴 것이다. 또한 ‘분옥정’과 ‘청류헌’ 편액은 추사의 김정희가 썼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포항 분옥정에 가면 우리나라 글씨의 대명사인 추사와 그의 아버지 유당의 서체를 함께 만날 수 있다.

  • 대구 >달성군

    유교 전통을 이어가는, 달성 도동서원 수월루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수월루(水月樓)는 서원의 문루이자 유생들의 휴식공간이다. 도동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9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김굉필(金宏弼)을 모신 서원으로, 1607년 도동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라는 의미이다. 도동서원의 공간은 ‘수월루 – 환주문 – 동ㆍ서재 - 중정당 – 내삼문 – 사당’이 일렬로 이어진다. 문루인 수월루는 창건 당시에는 없다가 1849년 처음 지어졌다가 1973년 중건한 건물이다. 수월루(水月樓). 말 그대로 ‘물에 비친 달’을 의미하듯이 누각에 오르면 앞으로 낙동강의 물줄기와 주변 경관이 펼쳐진다.

  • 경남 >밀양시

    우리나라 3대 누각인, 밀양 영남루

    밀양 영남루(嶺南樓)는 진주 촉석루·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이다. 보물로 지정된 영남루는 야경이 밀양 8경 가운데 제1경에 해당한다. 영남루는 남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 절벽위에 자리한다. 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 절터에 1365년 지어진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44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의 이색·문익점·이숭인, 조선의 권근·하륜·김종직·이황 등 내로하라는 문인들이 영남루를 노래한 시가 남아있다.

  • 충남 >논산시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금강을 바라보던, 논산 임리정

    논산 임리정(臨履亭)의 원래 이름은 황산정(黃山亭)이었다. 임리정은 1626년 사계 김장생(金長生)이 낙향하여 정자이다. 임리정은 《시경》의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 같이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하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김장생은 이이·성혼을 배향하는 죽림서원(황산서원)과 죽림서원 바로 옆에 지은 것이 임리정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아들인 김집을 비롯하여 송시열·송준길·장유 등 당대의 내로라는 제자를 배출하였다. 제자 송시열의 팔괘정(八卦亭)도 곁에서 금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조상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조상들의 사계절을 어떻게 지냈을까? 조상들의 사계절을 엿볼 수 있는 계절마다 이용했던 생활용품과 장소, 음식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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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여름 무더위에 껴안고 자는 죽부인

    죽부인은 대나무로 엮어 만든 침구의 하나로 무더운 여름밤에 끼고 자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피서용 생활도구이다. 주로 남성들이 끼고 잤기 때문에 인격화하여 ‘죽부인’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생전 사용하셨던 죽부인도 모시고 같이 제사를 받게 하였다.

  • 충남 >공주시

    추운 겨울날 새벽까지 파는 군밤

    밤은 우리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먹은 과실이다. 조선시대에는 평양밤과 양주밤이 유명했는데 일제 강점기에도 명성이 이어졌다. 특히 평양밤은 당도가 높아 일본으로 많이 이출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군밤장사의 수가 많아지는데 주로 도시에서 낮부터 새벽 2시까지 화로에 밤을 구워 팔았다. 가을부터 초봄까지가 군밤장수의 활동기였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일본인이 운영하는 백화점 근처에선 기계로 평양밤을 구워팔기도 했다. 어린 군밤장수는 10전의 군밤을 팔기위해 추운 겨울 낮부터 새벽까지 바깥에서 떨기도 하였다. 

  • 여름을 즐겁게 해 주는 빙수

    빙수는 얼음을 갈아 설탕, 시럽, 단팥 등을 넣고 먹는 음식으로 더운 여름철에 인기있다. 빙수는 일제강점기에 판매음식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천연빙으로 만들다가 위생적인 문제로 제빙공장의 얼음을 사용하게 되면서 대중화되었다. 당시 빙수가게는 여름 한철 장사로 천막을 쳐 임시가게를 열었다. 밖에는 ‘빙설(氷雪)’이라고 쓴 긴 깃발을 높이 달고 붉은색으로 외면을 장식한 후 실내에는 만국기를 달았다. 빙수가게에 여점원이 많았는데 풍기문란으로 신문에서 지적받기도 하였다.

  • 전북 >임실군

    여름날 배롱나무와 어우러진, 임실 만취정

    임실 만취정(晩翠亭)은 김위(金偉 ; 1532∼1595)가 1572년(선조 5) 낙향하여 세운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김위의 호 ‘만취(晩翠)’에서 따온 것이다. ‘만취’는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초목의 푸른빛’이라는 의미이다. 김위는 재상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여러 고을의 수령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당대의 고봉 기대승·율곡 이이·백호 임제와 같은 인물과 교유하였다. 만취정에는 이들의 현판이 지금도 걸려있다.

  • 전남 >영암군

    수석 같은 월출산을 사계절 즐기는, 영암 부춘정

    영암 부춘정(富春亭)은 호남의 명산 월출산을 바라보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부춘정은 야트막한 부춘봉 자락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군자의 상징인 연꽃이 심겨진 연못과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는 덕진천이 흐른다. 부춘정은 강한종이 낙향하여 1618년에 지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다른 건물과 달리 뒤쪽 4칸에 방을 만들고, 앞쪽 4칸에 마루를 놓았다. 10개의 기둥에 주련이 달렸고, ‘부춘정’ 편액과 기문·시판이 마루에 걸려있다.

  • 전북 >익산시

    조상을 추모하는, 익산 망모당

    망모당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356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1607년(선조 40)에 조선 중기의 문신 송영구(1556~1620)가 그의 거처 후원 구릉에 망모당을 짓고 누정 동쪽의 우산에 있는 선영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망모당이라는 정자 이름은 ‘사모하고 그리워한다.’라는 의미로, 송영구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만났던 인물이 후일에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만나 지어준 편액이라고 한다.

  • 서울 >종로구

    봄을 알리고 단비를 기원하는, 창덕궁 보춘정

    보춘정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번지 창덕궁 내 성정각에 딸려 있는 누각이다. 보춘정 건물의 다른 면에 희우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이 누각은 봄이 옴을 알리고, 가뭄 때 단비를 기원하는 누각이다. 조선 숙종대에 지어진 누각이다.

  • 전남 >나주시

    봄을 간직하고 있는, 나주 장춘정

    장춘정은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죽산리 화동마을 969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전라남도기념물 제201호이다. 1561년(명종 16)에 조선 중기의 무신 유충정(柳忠貞:1509∼1574)이 건립하였다. 1818년(순조 18)과 1930년에 중수하였으며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장춘정이라는 정자명은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숲과 사시사철 피는 꽃들이 항상 봄을 간직한 듯 하다는 의미이다. 장춘정을 중심으로 문인과 무인 등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영산강 권역의 대표적인 정자이다.

  • 조상의 묘를 찾아뵙는 한식절사

    한식에는 과일과 떡 등을 차리고 조상의 묘소에서 차례를 지낸다. 이를 한식차례(寒食茶禮), 한식제사(寒食祭祀), 한식성묘(寒食省墓)라고 한다. 조상의 무덤이 헐었을 경우에 잔디를 다시 입히는 것을 일반적으로 한식에 한다. 이것을 ‘개사초(改莎草)’라고 한다.

무형문화재 목공예 장인을 아시나요 ?

목공예에 인생을 함께한 무형문화재 목공예 장인들 ! 생활문화, 불교용품, 선비용품 등 다양한 목공예 장인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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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곡성군

    선비의 칼 낙죽장도를 만드는 낙죽장도장(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粧刀)는 몸에 지니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말한다. 대나무로 만든 장도에 낙죽장식을 한 칼을 낙죽장도라고 한다. 낙죽장도를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낙죽장도장(烙竹粧刀匠) 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78년 2월 23일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으로 지정하여 기능을 보존 및 전승하고 있다. 낙죽장도장 기능보유자는 1993년 한병문이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그의 아들 한상봉이 2012년 등록되었다.

  • 인천 >남동구

    소의 뿔로 만든 화각공예 장인 화각장(국가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華角匠)은 쇠뿔을 투명하게 만든 안쪽에 그림을 그려 채색한 화각공예 기능을 가진 장인이다. 화각은 주로 머리빗, 경대, 반짇고리, 실패, 베갯모 등에 사용되었다. 1930년대 거의 생산이 중단된 화각기술이 지금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장인 음일천의 공이 컸다. 화각장은 1996년 12월 31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되었으며 기능보유자로는 이재만이 인정되어 현재까지 유일하게 활동하고 있다.

  • 전남 >담양군

    알록달록 대나무 상자를 만드는 채상장(국가무형문화재 제53호)

    채상장은 얇게 저민 대나무 껍질을 물들여 무늬가 배치되도록 짠 상자인 채상을 엮는 기능 혹은 그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채상은 문양과 색이 아름다워 주로 반짇고리, 채죽침, 상자 등으로 만들어졌다. 1975년 1월 29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어 김동연, 서한규를 거쳐 현재는 서신정이 기능 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기능을 보존 및 전승하고 있다. 

  • 경북 >포항시

    화살 넣는 통을 만드는 전통장(국가무형문화재 제93호)

    전통장은 화살을 담는 화살통인 전통(箭筒)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89년 국가무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어 기능 보유자는 김동학이 유일하다. 그의 증조부는 무인출신으로 화살통을 손수 만들어 썼다고 하며 4대째 화살통 만드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 전남 >나주시

    소반을 만드는 소반장(국가무형문화재 제99호)

    소반장은 밥과 반찬 등의 음식을 차려놓고 먹는 작은 상, 소반을 만드는 일이나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말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궁중에선 소목장이 소반도 만들었는데, 1992년 11월 10일 국가무형문화재 제99호로 소반장이 지정되었다. 소반 중에는 해주반, 나주반, 통영반이 유명하다. 최초의 기능보유자는 해주반으로 유명한 이인세(1928-2009), 그의 사후 2014년에 나주반의 김춘식과 통영반의 추용호가 소반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활동하고 있다.

  • 경남 >통영시

    나전칠기를 만드는 나전장(국가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은 조개껍질을 다양한 형태로 잘라 기물의 표면에 붙여 장식한 공예품인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기능 혹은 그러한 기술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1966년 6월 29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끊음질과 줄음질 기법으로 나누어 나전칠기의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고 있다. 끊음질은 가는 선 모양으로 기하학적 문양을 만드는 방식, 줄음질은 거북이나 매화 등의 모양을 오려서 문양을 만드는 기법이다. 

  • 인천 >강화군

    왕골을 엮어 생활기물을 만드는 완초장(국가무형문화재 제103호)

    완초장은 왕골로 돗자리, 방석, 합 등의 기물을 엮어 만드는 기능 혹은 그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강화지역의 왕골 공예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기후 조건이 왕골의 생장에 알맞아 질 좋은 원료를 구할 수 있으며, 예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03호 완초장으로 등록되어 보존 및 전승되고 있다.

  • 전남 >순천시

    대나무를 지져 문양을 만드는 낙죽장(국가무형문화재 제31호)

    낙죽장(烙竹匠)은 대나무의 표면을 뜨거운 인두로 지져 글씨나 무늬를 새기는 기능 또는 그 기술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낙죽의 도구는 인두와 화로이고, 인두를 알맞게 달구는 것과 달구어진 인두가 식기 전에 한 문양과 한 글자를 끝내는데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1호 낙죽장으로 지정되어 이동련, 국양문, 김기찬이 기능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 

  • 문, 창문, 가구를 만드는 소목장(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은 나무로 건물의 문이나 창문, 가구를 제작하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장인이다. 나무를 다루는 장인을 목수라고 하는데 대목장과 소목장으로 나눠진다. 대목장은 주로 궁궐·사찰·주택 등 건축물을 짓는 것을 담당하고, 소목장은 주로 건축물 실내로 들어가는 가구나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5년 1월 29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을 지정하여, 현재 박명배, 소병진, 엄태조가 기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 궁시장(국가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활을 만드는 사람은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시장(矢匠)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활을 잘 만들어 중국에서는 우리를 동쪽의 활 잘 만들고 쏘는 민족이라는 뜻의 '동이'라고 불렀다. 1971년 9월 13일 국가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이 지정되어 현재는 유영기, 박호준, 김종국이 기능 보유자로 인정되어 전통적인 활과 화살 제작기술을 보존하고 전승하는데 힘을 쓰고 있다.

독서의 계절,역사가 있는 교육기관

독서의 계절에 생각해보는 역사가 있는 교육시설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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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동구

    무등산 깃대봉의 민립대학, 광주 조선대학교 본관

    광주광역시 동구 서석동 무등산 깃대봉 중턱의 조선대학교 본관 건물은 광주의 랜드 마크 가운데 하나다. 370m 길이에 19개 박공 건물이 늘어선 모습은 마치 한 마리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는 것처럼 보인다. 본관 19개 건물 가운데 초기에 세워진 5개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 94호다. 5개 동은 1947년부터 1955년까지 8년에 걸쳐 건축되었다. 이어진 건물들은 후에 증축한 것이다. 조선대학은 광복 직후인 1946년부터 진행된 민간 차원의 대학설립 운동이 결실을 맺은 최초의 사례다. 당시 호남 각지에서 7만2,000명이 조선대학 설립동지회에 가입해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이 설 수 있었다.

  • 광주 >동구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광주 서석초등학교 본관·별관·체육관

    광주 서석초등학교는 광주광역시에 최초로 세워진 근대식 공립학교다. 1896년 소학 교령에 따라 공립소학교로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주 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1930년 강당 겸 체육관[현재의 서석당]이 세워졌고, 1935년 본관, 1943년 별관이 건축되었다. 학교의 이름은 1938년 광주 서석 공립 심상소학교가 되어, 서석이라는 유서 깊은 이름을 붙였다. 서석은 무등산의 이칭이자, 광주의 옛 이름이 서석읍이다. 해방 후에도 서석이라는 교명은 계속 사용되었다. 광주 서석초등학교 본관과 강당, 별관은 정성 들여 지은 붉은 벽돌 건물이다.

  • 전남 >순천시

    선교사의 자녀들, 구 순천선교부 외국인 어린이학교

    미국 남장로회 순천선교부는 1910년 설립이 결정되었다. 당시 순천선교부에는 선교사만 70명 이상이 오가며 활동했다. 순천선교부는 1913년부터 순천시 매곡동 일대 버려진 땅에 교회, 학교, 병원을 세우고, 사택을 지어 활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순천선교부 외국인 어린이학교는 기혼 선교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회색 벽돌로 지은 건물이다. 낯 설고 물 설은 식민지 땅에서 헌신한 선교사들의 자취를 짐작하게 해 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순천선교부 외국인 어린이학교는 순천시 순천선교부 거리의 등록문화재 5곳 가운데 한 곳이다.

  • 서울 >중구

    여성에게 열린 배움의 빛,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은 1915년 지어졌다. 이화학당의 교세가 커지고 학생이 늘면서 교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심슨기념관은 붉은색 벽돌 외벽에 규칙적인 아치형 창문들, 창문 위에 박은 화강석 키 스톤이 깔끔하고 산뜻한 분위기를 준다. 심슨기념관은 조선의 여성들에게 최초로 배움의 빛을 열어주었던 이화학당의 사명을 100년 넘게 이어 온 한국 여성 교육의 산실 가운데 하나다.

  • 서울 >노원구

    뒤늦게 출발한 식민지 공학교육, 서울대학교 구 공과대학 본관과 교사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 법의학부와 의학부로 출발했다. 조선총독부가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밀려 마지못해 식민지에도 대학을 세운 것이다. 농학부, 이학부, 공학부도 설치하겠다고 해놓고 비용 문제를 앞세워 계속 미루다가 1938년에야 이공학부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이공학부는 1942년 교외 지역인 태릉에 들어섰다. 본관과 교사 2개 동으로 된 경성제대 이공학부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흡수되어 고등 공학 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현재는 국립 서울과학기술대학의 교사로 쓰인다.

  • 전북 >익산시

    수의학 배우던 전국 수재들, 익산 구 이리농림학교 축산과 교사

    이리농림학교는 1922년 전국에서 유일한 갑종 실업학교로 개교했다. 5년제 공립학교였던 이리농림학교는 농과와 임과로 시작되어, 1931년에는 수의축산과가 설치되었다. 수의축산과는 졸업 시 수의사 자격을 주었다. 이리농림학교는 개교할 때부터 전국의 수재가 진학을 희망하는 학교 가운데 한 곳이었다. 축산과 교사는 1932년 특별교실로 지어졌다. 실험실습이 이뤄지던 공간으로서, 교실과 교실 사이에 기둥 겸 굴뚝을 세웠고, 벽돌 벽면을 가로로 분할한 듯이 보이는 장식 등이 눈에 띄는 건축물이다.

  • 전남 >구례군

    황매천의 얼을 이어받아, 구례 구 방광국민학교 교사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옛 방광초등학교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매천 황현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의 얼이 담긴 학교를 건립한다는 지역민들의 뜻에 따라 세워졌다. 매천은 1908년 호양학교를 설립하는데 앞장선 바 있다. 호남 인재 양성의 요람이었던 호양학교는 1920년 폐교되었다. 방광학교 설립 당시 인근 고찰 천은사에서 땅과 건축비를 희사하고, 주민들도 기꺼이 부지를 내놓으며 주민들 손으로 한옥 기와집 학교 건물을 지었다. 방광학교는 산업화 이전에는 발전하던 학교였으나, 이농현상이 가속화함에 따라 1996년 문을 닫았다. 방광초등학교는 지리산학생수련원으로 바뀌었고, 옛 본관은 수련원 내 호양민속학습관이 되었다.

  • 충북 >청주시

    선비의 정신을 갖춘 상업 인재를, 청주 대성고등학교 본관

    청주상업학교는 1930년대 청주 지역 학부모들의 염원과 청주 유지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 특히 청암 김원근과 석정 김영근 형제가 거금을 내놓아 학교 설립이 결실을 보았다. 붉은 벽돌 2층으로 지어진 학교 본관은 상업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해방 후 청주상업 고등학교가 되었으나 시대의 추세에 따라 2002년 인문계로 전환해 청주 대성고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우암산 자락 인가 드문 뽕나무밭에 들어선 학교는 해방 후 청주대학교를 비롯해 학교 건물들이 잇따라 지어지고, 청주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현재는 번화한 거리로 변했다.

  • 경기 >수원시

    수원 교육 백년의 상징, 수원 삼일중학교 아담스 기념관

    수원의 삼일학교는 1903년 수원의 애국지사들이 주동이 되어 설립되었다. 삼일학교라는 교명은 기독교 교리의 삼위일체를 뜻한다. 아담스 기념관은 1923년 삼일학교의 새 교사로 지어졌다. ‘아담스’는 삼일학교 신축 교사를 지으라고 헌금을 모아 보내준 미국 교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아담스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이다. 중국인 기술자가 현장 감독을 맡아 공사를 진행한 아담스 기념관은 세련된 균형미를 갖춘 건축물로 평가된다. 아담스 기념관은 현재도 옛 모습을 간직한 수원 교육사의 중요한 근대유산으로 꼽힌다.

  • 전북 >전주시

    새로운 여명을 열다, 전주 신흥고등학교 강당과 본관 포치

    전주 신흥학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1900년부터 근대학문의 요람으로 출발했다. 신흥학교의 본관은 조선 시대 학당 희현당 자리에 1928년 세워졌다. 강당은 1936년 준공되었다. 신흥학교 본관과 강당은 미국의 리차드슨 부인이 거금을 기부해 건립되었다. 신흥학교의 본관은 광주 수피아여학교의 윈즈브로우 홀과 규모와 형태, 구조가 똑같은 쌍둥이 건물이다. 신흥학교는 1919년 3.1 만세운동, 1930년 광주 학생 항일운동 동조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80년에도 항의 시위에 나서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신흥학교 옛 본관은 아쉽게도 1982년 화재로 불타 사라졌으나, 다행히 현관 포치만은 화마를 피했다.

구비전승 설화이야기

구비문학은 인류가 언어를 사용하면서 집단을 이루어 사회생활을 할 때부터 형성된 문학으로서, 문자가 창제된 이후 글로 이루어진 기록문학이 나타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구비문학의 시원은 곧 문학의 시원인데, 인류가 집단생활을 하면서 언어를 통하여 협동하는 과정에서 구축한 언어단위가 예술성을 획득하여 후대로 전승되면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에서 신에 대한 제의를 행하면서 송창(誦唱)하던 제신가(祭神歌)나 집단으로 노동을 하면서 부른 노동요 등은 초창기 구비문학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또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었던 강력한 체험이나 역사적인 큰 사건에 대한 흥미 있는 이야기가 집단의 호응을 받으면서 후대로 전승되면서 꾸며져 세련된 설화문학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구비문학은 언어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언어생활의 일부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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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정읍시

    향운설화의 대표적인 정자, 정읍 군자정

    군자정은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영주로 532-7(고부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33호이다. 사방이 연못으로 둘러 싸인 정자여서 연정(蓮亭)이라고도 한다. 최초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역사가 오래된 정자이다. 군자정은 고장의 운명과 관련된 향운설화(鄕運說話)의 대표적인 정자로, 고을의 운명을 길하게 하기 위해 연정을 파고 정자를 개보수한 설화와 역사를 함께한 정자이다. 군자정이란 정자명은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연꽃을 군자의 꽃이라 칭한데서 연정을 군자정이라 하였다.

  • 충남 >예산군

    저승에 갔다 온 할머니

    90세 먹은 노인이 죽어 시신을 염습하여 입관한다. 장례 전날, 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노인이 살아난다. 노인은 저승에 갔더니 몇 년 더 살다가 오라고 해서 이승으로 왔다고 한다.

  • 서울 >서대문구

    상가승무노인곡(喪歌僧舞老人哭)

    「상가승무노인곡(喪歌僧舞老人哭)」은 가난하지만, 효심이 깊은 상중의 젊은 내외가 어머니의 환갑상을 차리면서 벌어진 이야기와 아들 내외의 효행에 탄복한 영조대왕이 그 효심을 표창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어느 고을을 지나던 영조임금은 방안에서 상주가 노래하고 여승이 춤추며 노인이 우는 광경을 목격한다. 노모를 극진히 모시고자 하는 아들 부부의 지극한 정성을 목격한 영조대왕은 과거 시제로 ‘상가승무노인곡’을 낸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낙방하지만, 효자는 자신이 겪을 일을 빗대어 글을 지어 장원급제하였다는 것이다.

  • 대구 >남구

    하회 유씨 묘지설화

    「하회 유씨 묘지설화」는 명당 주인으로 하여금 그 곳이 명당이 아닌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묫자리를 빼앗았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김씨 집안의 한 지관이 명당자리를 가리키며 내일 오시까지 물이 나오지 않으면 3대에 걸쳐 정승이 나온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김 씨 여인이 밤새도록 물을 길어다 붓는다. 그래서 김씨 문중에서는 묫자리를 포기한다. 김 씨 연인은 오빠에게 간청하여 시아버지를 그곳에 묻는다. 이후 김씨 문중은 쇠퇴하고, 유시 문중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 충북 >충주시

    충주 어씨 시조설화

    충주 어씨 시조인 어중익(魚重翼)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득성(得姓)에 관한 이야기이다. 충주 어씨 설화는 『한국성씨대관』, 『한국인의 성씨』,『만성대동보』, 『한국의 전설』, 『충주어씨족보(忠州魚氏族譜)』, 『한국구비문학대계 8-3』에 수록되어 있다. 문헌 자료와 구전설화를 종합하면, 어씨의 본성이 지씨였다는 점과 어씨 성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사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 경남 >창녕군

    창녕 조씨 시조설화

    창녕 조씨의 시조인 조계룡의 출생과 득성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라 진평왕 대에 이광옥의 딸 예향과 신룡의 아들 옥결이 만나서 낳은 자식이 조계룡이라고 한다. 계룡의 옆구리에 ‘조’ 자가 새겨져 성을 조씨라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화에서는 예향이 병을 고치기 위해 화왕산의 못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병이 나은 동시에 잉태했다. 꿈속에 신룡의 아들인 옥결이 나타나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임을 밝히고 잘 기르면 자손만대가 번성할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이광옥이 왕에게 아뢰자, 왕이 조라는 성과 계룡이라는 이름을 주었다고 한다.

  • 충남 >부여군

    제사 잘 드리고 복 받은 사람

    어느 총각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나무 장사를 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제사가 돌아왔다. 이날따라 비가 내려 나무를 할 수가 없었다. 총각은 할 수 없이 물 한 사발과 나무할 때 쓰던 도끼를 깨끗이 씻어놓고 제사를 지냈다. 이런 아들의 모습에 감복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현몽하여 논에 묻혀 있던 두 개의 황금단지를 발견하게 한다. 아버지의 혼령 덕분에 아들은 부자가 되었으며 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았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 충남 >당진시

    이상한 제사방법

    어떤 과부가 며느리 보는 것이 소원이다. 하지만 아들이 늦도록 장가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아들은 열심히 일해서 색시를 얻는다. 아들 내외는 부모님 제삿날이면 초저녁에 제상에 제물을 차리고, 그 앞에 이부자리를 펴놓는다. 그리고 등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고 들어오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 다시 등불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어느 학자가 아들 내외가 지내는 제사방법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아들의 설명을 들은 학자는 주인의 제사방식이 옳다고 하면서 계속 그렇게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 경북 >안동시

    회갑날 할멈에게 수염 뜯긴 영감

    예전에 성질이 억세고 거친 처자가 살았다. 처녀의 부모는 자기 딸을 데리고 사는 사람에게 평생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한다. 어떤 머슴이 처녀와 결혼한다. 첫날밤에 신부가 똥을 쌌다고 누명의 씌워 처자의 기를 죽인다. 머슴과 처자는 아들 삼 형제를 낳고 나름 행복하게 산다. 영감이 된 머슴은 자신의 환갑날에 첫날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가 할멈에게 수염을 뽑히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 부산 >북구

    세쌍둥이가 죽어서 된 삼태성

    어느 부잣집에 시주하러 온 스님과 부잣집 딸이 동침하여 세쌍둥이를 낳게 되었고, 그 아이들이 죽어서 삼태성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삼태성은 국자 모양을 한 북두칠성에서 물을 담는 쪽에 비스듬하게 길게 늘어서 있는 세 쌍의 별을 말한다. 삼태성의 유래담은 제주도와 함경남도, 평안북도, 중국 연변 지역에 사는 조선족 등에게서 전승되고 있다.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생활용품

생활용품은 그 시대의 생활상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옛 조상들이 사용했던 생활용품들의 특징을 통해 어떤 생활을 하며 살았는지 상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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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을 눕혀 보관하던 책장

    책장은 책을 넣어 보관하는 수납가구로 선비의 사랑방에 필수적으로 갖춰야할 가구였다.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졌으며 2층장, 3층장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가장 많다. 많은 책의 무게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조선시대 선비 취향에 부응하여 검소하고 소박하다.

  • 전남 >영암군

    가늘고 촘촘한 빗, 참빗

    참빗은 빗살이 가늘고 촘촘한 머리빗이다. 머리를 정갈하게 정돈하거나 기름을 바를 때 사용하였으며, 진소(眞梳)라고도 불렀다. 전라남도 영암과 담양 지역은 참빗 생산지로 유명한데 특히 영암 참빗의 품질이 높았다. 영암읍 망호리에서는 약 300여 년 전부터 마을사람들이 참빗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 음식과 그릇을 보관하는 부엌가구, 찬장

    찬장은 식기나 음식 등을 보관하는 부엌용 수납 가구이다. 중량감 있는 그릇을 포개 보관하기 때문에 무게를 충분히 감당하기 위해 튼튼하고 안전한 구조가 필수적이며, 실용적인 사용을 우선시 하는 생활용 가구이기 때문에 화려한 장식을 하지 않고 튼튼하고 견고하게 제작하였다. 단층 뒤주장은 곡식을, 이층찬장과 삼층찬장에는 양념, 그릇, 음식물 등을 보관하였다. 

  • 제주 >서귀포시

    구덕으로 대표되는 제주도의 죽공예품

    제주도는 다른 공예에 비해 목공예의 제작과 사용이 많았으며 특히 서귀포 지역에서는 죽공예의 제작이 활발하였다. 대표적인 죽공예품이 바로 ‘구덕’이다. 구덕은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로, 여성들의 일상생활 전체에서 쓰임새가 가장 많은 도구였다. 아기를 눕혀놓는 애기구덕, 물동이를 넣는 물구덕, 테왁 등을 담는 물질구덕 등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이는 제주의 자연 환경과 인문적 배경에서 발생한 독특한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는 바구니이다. 

  • 한여름 무더위에 껴안고 자는 죽부인

    죽부인은 대나무로 엮어 만든 침구의 하나로 무더운 여름밤에 끼고 자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피서용 생활도구이다. 주로 남성들이 끼고 잤기 때문에 인격화하여 ‘죽부인’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생전 사용하셨던 죽부인도 모시고 같이 제사를 받게 하였다.

  • 계산도구, 주판

    주판은 계산을 도와주는 간편한 도구로 수를 더하거나 뺄 때 사용했으며 이것으로 계산하는 것을 주산(珠算)이라고 한다. 고대 숫자들은 계산보다 기록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계산을 도와주는 도구가 별도로 필요했다. 주판은 우리나라에서 1980~1990년대 초까지 널리 보급되었지만 전자계산기의 등장으로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 옷을 걸어 보관하는 의걸이장

    의걸이장은 내부에 횃대라는 긴 막대가 있어 옷이 구겨지지 않게 걸어서 보관하는 옷장이다. 주로 관복이나 두루마기 등 남성의 의복을 보관하던 옷장으로 남성의 생활공간인 사랑방에 놓였다. 관복과 함께 신는 신발인 목화를 보관할 수 있는 이층 의걸이장도 있었다. 

  • 서안 옆에 놓는 문방용품 가구, 연상

    연상(硯床)은 벼루, 먹, 붓, 종이, 연적 등 문방용품을 한 곳에 모아 보관하는 문방가구로 주로 사랑방에서 사용되었다. 사랑방에서 중심에 배치되는 좌식 책상인 서안(書案)의 바로 옆에 연상을 두었다. 연상은 2단으로 구성되어 상단에는 벼루와 먹을 보관하고, 하단에는 연적이나 종이 두루마리를 보관했다.  

  • 약재를 보관하는 약장

    약장은 약재를 분류하여 따로따로 넣어두는 서랍이 있는 가구이다. 약재의 종류에 따라 많은 서랍이 필요하며, 이러한 서랍이 정연하게 연속적으로 배열된 모습은 독특하고 개성강한 조형미가 있다. 조선시대 약장은 형태·용도·목적·신분·지역 등에 따라 구분되며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 음식 그릇을 올려놓는 작은 상, 소반

    소반은 작은 상이라는 뜻으로 식기를 받쳐 나르거나 음식을 차려 먹을 때 사용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상차림은 1인 1상을 기본으로 했기에 각 가정에서는 크고 작은 소반이 많이 필요했다. 내방객이 많은 양반가에서는 수십여 점을, 일반 민가에서도 여러 점을 구비하여 사용하였다. 이처럼 소반은 우리나라 좌식생활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주방가구로 다른 가구와 달리 계층을 막론하고 널리 사용된 생활필수품이다.

대중매체 속의 지역문화

신문에 소개된 다양한 식재료와 음식, 시대적 특징과 분위기를 나타내주는 노래, 영화, 소설 등 다양한 대중매체 속 정보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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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전주시

    인기있는 외식메뉴, 비빔밥

    비빔밥은 옛날부터 만들었던 음식으로 생각된다. 안동의 헛제사밥처럼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들을 밥과 섞어 먹은 것이 비빔밥이기 때문이다. 비빔밥은 조선후기부터 음식점에서 팔았다. 일제시대 유명한 비빔밥으로 『별건곤』잡지는 진주(晉州)비빔밥을 거론하고 있다. 이 비빔밥은 육회비빔밥으로, 서울의 육회비빔밥보다 낫다고 하여 서울에도 육회비빔밥이 있던 것을 보여준다. 『동아일보』에서는 함평 소주와 함평비빔밥이 기막힌 조합을 이룬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전주비빔밥이 유명하다. 가을에 전주에서 비빔밥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 전북 >부안군

    염장만큼 숙성이 중요한 젓갈

    젓갈은 어패류에 소금을 넣고 발효시킨 음식이다. 일제강점기 젓갈생산지역으로 유명한 곳 중 하나가 곰소만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간척사업으로 섬이었던 곰소가 육지가 연결되고 그 부근의 갯벌은 염전이 되었다. 염전에서 천일염이 많이 생산되어 젓갈의 재료로 쓰였다. 곰소만에서 잡히는 어패류가 다양했으므로 곰소만의 젓갈은 다양하다. 젓갈은 신선한 해산물을 잡은 즉시 바로 염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숙성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젓갈의 숙성은 곰소만의 객주들이 했는데 이들은 주로 충남의 광천굴, 폐광, 폐터널 등에서 젓갈을 숙성시켰다.

  • 서울 >종로구

    근대 서민의 술안주, 빈대떡

    조선시대 빈대떡은 녹두를 불려 간 반죽을 밤이나 팥에 꿀에 말은 소를 안에 넣고 부친 음식이었다. 일제강점기 빈대떡은 대표적인 술안주가 되었는데 양념을 털어낸 김치, 되재고기 채썬 것, 각종 채소를 녹두반죽위에 올려놓고 돼지기름을 바른 철판에 구워내는 요리가 되었다. 이렇게 만든 빈대떡은 값싸고 맛있는 최고의 술안주가 되어 선술집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여성들이 빈대떡을 안주로 선술집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현대는 녹두값이 많이 올라 빈대떡은 더 이상 서민의 음식이 아니게 되었다.

  • 경기 >부천시

    복사골을 아시나요, 소사 복숭아

    복숭아는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자랐는데 팔기위해 재배한 것은 아니었다. 팔기위해 복숭아를 기르기 시작한 시기는 개항기 이후이다. 개항기 상품으로 팔기 위해 복숭아 나무를 심은 곳이 부천 소사이다. 부천 소사 복숭아는 일제강점기부터 많이 생산되고 질이 좋기로 유명하였다. 해방 후에도 유명했는데 1980년대 부천이 산업화되고 도시화되면서 대형 복숭아 과수원이 아파트와 공장으로 바뀌어버린다. 그러나 지금도 복숭아 과수원이 약간 남아 있어 과거의 영광을 알려주고 있다.

  • 인천 >중구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한국에 들어온 자장면

    자장면(炸醬麵)은 장을 튀겨 면에 비벼먹은 음식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튀기는 장은 콩 70%와 밀 30%를 섞어 짜게 발효시킨 면장(麵醬)인데 중국 산둥지역에서 주로 담궈 먹었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청나라와 조선은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조약을 체결하는데, 이 조약으로 청나라와 조선의 상인들은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상민수륙무역장정에 따라 청나라 사람들 특히 주로 중국 산둥 지방 사람들이 인천등 개항장에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산동지방의 향토음식이 한국에 정착한 것이 짜장면이다.

  • 서울 >종로구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경영한 화신백화점

    화신백화점은 지금의 종로타워가 있던 곳에 있었는데 1937년 준공되어 1987년 철거되었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규모로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화신백화점은 1937년 새로 준공하기전 3층의 규모의 건물이었는데 화재로 다시 지은 것이었다. 화신백화점은 박흥식이 건립하고 운영하였는데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후까지 다양한 사업을 왕성히 하였던 기업가였다. 화신백화점은 구 건물시기부터 지하 식품매장과 식당가가 유명했다. 식당가는 양식, 화식, 조선요리를 팔았는데 새건물이 준공된 후에도 이러한 체제였다. 지하 식품매장에는 수입식품과 일본의 고로께등 다양한 음식을 팔았다. 화신백화점은 주로 조선인 중상류층이 이용하였다.

  • 충남 >논산시

    1960년대에 들어온 요구르트

    요구르트는 6.25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1969년 일본과의 합작으로 한국야구르트가 생산하면서 널리 보급되었다. 1976년 해태유업이 시장에 뛰어들었고 이후 대일유업, 서울우유협동조합, 한국낙동, 삼양식품 등 많은 업체가 제품을 내놓았다. 이 시기의 요구르트는 탈지분유를 물로 희석하여 유산균을 발효시킨 것으로 우유의 비중이 굉장히 작았다. 마시는 음료에 가까웠던 요구르트가 걸쭉한 죽 형태로 변화된 것은 대일유업 즉, 지금의 빙그레에서 ‘요플레’를 내놓은 것이 시작이다. 대일유업은 1981년 10월 프랑스 농협 조합으로부터 기술도입 계약을 맺어 죽 형태의 요구르트인 요플레를 만들었다. 이후 요구르트는 죽 형태, 마시는 형태 등 다양화되었다.

  • 경기 >포천시

    조청을 졸여 굳힌 전통과자, 엿

    전통엿은 곡식에 엿기름을 넣고 고아 만든다. 엿기름은 기름이 아니라 싹난 보리를 말린 것이다. 공업적으로 엿을 만들기도 하는데 값싼 옥수수나 고구마 전분을 끓여서 죽으로 만든 다음 엿기름 대신 미생물로부터 얻은 당화효소를 넣는 것이다. 엿은 전통적으로 인기있는 간식이었지만 곡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흉년에는 나라에서 금지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제과업자들이 전통엿을 만들어 판매했고, 일본인 엿장사도 있었다. 엿은 양과자가 인기를 끌면서 매출이 줄어들었다.

  • 경남 >밀양시

    일제강점기 한국의 우뭇가사리로 만든 일본 과자, 양갱

    양갱은 중국에서 일본에 전해져 정착된 과자로 우뭇가사리를 냉동건조시킨 한천에 팥, 설탕 등을 넣고 쪄서 만든 과자다. 양갱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들어와 지금도 팔릴만큼 한국인의 과자로 정착되었다. 양갱의 원료인 우뭇가사리는 일제강점기 본격적으로 한반도 바다에서 채취되었는데 우뭇가사리가 양갱 원료 이외에 의약품, 화장품 등의 원료로 쓰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우뭇가사리 채취는 주로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 담당하였다. 해방 후에도 한천은 계속 만들어져 주로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 경기 >포천시

    1970년대 대기업이 대량생산한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은 우유나 유지방을 다른 재료를 섞어 얼린 것이다. 국제규격에 의하면 유지방이 8%이상 함유되어야 아이스크림이라고 한다. 아이스크림은 일제강점기부터 일반인에게 보급되었는데 신문에는 아이스크림 만드는 법이 나오고 아이스크림 행상도 있었다. 그러나 쉽게 상했기 때문에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스크림은 1970년대 대기업에서 본격적으로 대량생산되었다. 1970년대 농촌에 젖소가 보급되어 낙농단지가 만들어져 우유가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많은 양의 우유를 대량의 아이스크림으로 만들기 위해 기계를 설치하고 유지하는 것은 당시 대기업만이 가능했다. 해태, 한화 등 대기업이 1970년대부터 아이스크림을 대량생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