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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로 구성한 지역문화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

애틋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칠월칠석

칠월칠석은 까치와 까마귀가 만들어준 오작교 위에서 견우와 직녀가 1년에 딱 한 번 만나는 날로 칠석날로도 불리는데요. 칠월칠석에는 다양한 풍습이 행해집니다.

칠성단에 참기름으로 불을 켜 자손들의 장수를 빌기도 하고, 여인들은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게 해달라는 걸교의식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신이 내려오는 날이라고 하여 아침 일찍 논에는 나가지도 않았답니다~ 신이 내려오는 날 인간이 돌아다니면 수확량이 떨어질 거라 믿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칠월칠석에 내리는 비는 기쁨의 눈물과 슬픔의 눈물로 나뉘는데요! 칠석날에는 만남의 기쁨으로 인한 눈물이고 다음날 내리는 비는 헤어져야 하는 슬픔으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합니다.

다가올 8월 29일(음력 7월 7일) 칠석날에는 견우와 직녀의 애달픈 사랑 설화를 떠올리며 보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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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진주시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이 서린 용다리
    옛날 진주 군수의 둘째 딸이 시집을 갔다가 얼마 후 남편이 죽어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다. 군수의 집 머슴 돌쇠는 둘째 딸을 사랑하게 되었고 둘째 딸도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돌쇠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둘은 신분의 차이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었고, 군수의 딸이 상사병을 앓다 죽었다. 그 소식에 돌쇠는 그만 미쳐버려 용다리 근처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다. 그뒤로 용다리에 개구리 떼가 생겨 울기 시작했다. 부부가 용다리를 건너면 개구리 떼가 잠잠해졌고, 상사병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 번 왕복하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 충남 >보령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탄생시킨 독수리바위
    충청남도 보령시 빙섬에 삼만이라는 총각이 부모님을 여의고 배를 빌려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다. 어느 날 밤 배 주인의 딸이 찾아와 자신이 곧 시집을 가는데 가기 싫다면서 삼만이와 하룻밤을 보낸다. 그 후로 여인과 삼만이는 자주 만남을 가지게 되었으나 배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삼만이를 배에 실어 바다에 버렸다. 열흘 뒤 삼만이가 탄 배가 갯벌에 멈추었는데 삼만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천둥번개가 치더니 배가 갯벌로 들어가고 독수리 모양의 바위가 솟아올랐다. 얼마 후 여인도 혼인을 하였으나 이틀 만에 죽고 말았다.
  • 충북 >옥천군

    웅인과 계화 공주의 비극적 사랑이 담긴 문바위
    충청북도 옥천군 청상면 한곡리에는 문같이 생긴 문바위가 있다. 옛날 옥황상제의 딸 계화 공주와 재상의 아들인 웅인은 서로 사랑했으나 권력 욕심이 있던 악독한 대신이 자기 아들과 계화 공주를 결혼시키기 위해 재상과 웅인을 모함하였고, 결국 그들은 인간 세상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인간 세상에서 살던 웅인은 괴물을 무찌를 결심하고, 옥황상제의 금기를 어긴다. 웅인은 괴물을 죽였지만, 금기를 어긴 죄로 바위가 되고, 웅인을 보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계화 공주 역시 그의 곁에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 강원 >강릉시

    착한 부부의 애달픈 사랑이 깃든 매바위와 거북바위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에는 착한 부부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매바위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착한 부부는 거북이를 구해주었고, 남편은 죽을 위기에서 용왕에게 구조된다. 용궁에서 지내던 남편은 아내가 그리워 다시 육지로 돌아오지만,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 매바위가 되고 남편 또한 거북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 경남 >하동군

    금오산을 붉게 물들인 별님과 달님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
    경상남도 하동군에는 금오산이 있다. 금오산 일대에는 금오산에 얽힌 별님과 달님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별님과 달님의 사랑을 질투한 지신이 잡신을 시켜 별님을 죽이고, 그 모습을 본 달님도 자결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별님과 달님이 흘린 피가 물들어 금오산의 철쭉과 붉은 바위가 생기게 되었다는 내력을 밝히고 있다.
  • 경북 >경주시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에는 영지가 있다. 이 저수지에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한다. 아사달은 불국사의 석가탑을 만들기 위해 신라로 오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불국사에 온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에는 만날 수 없다는 금기로 인해 아사녀는 영지에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그리움에 지쳐 영지에 몸을 던진다. 아사달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불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 충남 >금산군

    견우와 직녀
    ‘아우 직녀 전설’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우 직녀는 옛날에 뱃사공들이 나무통을 째매서 타고 가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견우와 직녀’이야기에서 견우와 직녀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별들이 함께 만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게가 장원급제 상징이 된 이유

함양 남계서원에 가면 천장에 그려진 게 두 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서원과 게 그림이라니, 둘 사이 연관성이 무엇일지 의문이 생길 수 있지만, 게는 예로부터 복과 합격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게가 두 마리라는 건 초시와 복시, 즉 1차 시험과 최종 시험까지 모두 합격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셈이죠.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어촌에서 게는 더욱 각별한 존재였습니다. 단옷날 해안가에서 열리던 '단오게잡이놀이'는 남녀노소 다 같이 즐기던 여름철 풍속으로, 한 해의 풍요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놀이였습니다. 삼척에서는 게가 잡귀를 막아준다고 여겨, 사대광장에서 게의 발을 닮은 줄을 당기며 마을의 평안을 빌었습니다. 이것을 '기줄다리기'라고 하는데, 여기서 '기'는 게의 방언입니다.
설화 속에서도 게는 지혜를 전하는 존재였습니다. '원숭이와 게의 떡 다툼' 설화에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이, '소금쟁이와 게와 물고기' 설화에는 경솔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는 우리 조상의 가르침이 담겨 있죠. 이렇듯 게는 오랜 세월 행운과 깨달음의 상징으로 우리의 곁에 함께 해왔습니다. 우리 함께 게에 얽힌 다채로운 우리 이야기를 만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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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삼척시

    나쁜 기운과 귀신을 쫓는 삼척 기줄다리기
    삼척 기줄다리기는 줄이 게(사투리 '기')의 발을 닮았다고 해서 ‘기줄다리기’라고 부른다. 삼척에서는 게가 나쁜 기운과 귀신을 쫓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옛날에 죄인을 처형하던 곳인 사대광장에서 줄다리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풍년도 풍년이지만 줄다리기에서 지면 마을 공사에 동원됐기 때문에 이기기 위해 매우 치열하게 했다. 줄은 쌍줄로 만들어서 두 줄을 비녀목으로 연결하는데, 이 힘겨운 줄 꼬기 작업을 달래주는 '술비통노래'가 지금까지 불리고 있어 주목된다.
  • 서울 >마포구

    섣부른 판단이 불러오는 참사를 보여주는 소금쟁이와 게와 물고기
    소금장수는 게를 잡아 구워 먹겠다, 끓여 먹겠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자 게는 좋겠다며 말대답을 한다. 물에 빠뜨리겠다니 그제야 하지 말라고 한다. 말대답에 약이 오른 소금장수는 게를 물에 던져버리게 되고 게는 약 올리며 도망간다. 소금장수는 다시 물고기를 잡지만 또 똑같이 말대답을 한다며 물고기를 물에 던지게 되고 물고기 역시 약을 올리고 도망간다. 소금장수가 허망한 채 다리를 건너는데 게와 물고기가 다시 놀렸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게와 물고기를 잡겠다며 소금장수는 물에 뛰어들어 죽게 된다.
  • 경남 >함양군

    ‘게’ 그림으로 장원급제를 꿈꾸던, 함양 남계서원 풍영루
    정여창을 향사하는 남계서원(灆溪書院)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과 달리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우리나라 서원 건축구조의 기틀을 세웠다. 남계서원은 1552년(명종 7) 창건하여 1566년 ‘남계서원’ 사액을 받았다. 누각인 풍영루는 1847년 불에 탔다가 1849년 다시 중건한 것이다. 누각 정면에는 ‘풍영루(風咏樓)’, 반대편에는 ‘준도문(遵道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누각 천정에는 도배하듯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 장원급제를 상징하는 두 마리 ‘게’ 그림이 인상적이다.
  • 충남 >태안군

    태안반도의 숨겨진 매력 태안군 꽃게
    충청남도에 속한 태안군을 대표하는 특산물은 꽃게이다. 꽃게는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잡히긴 하나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은 단연 태안군이다. 태안군에서도 특히 가의도와 신진도 주변에서 꽃게를 많이 잡는데 한 때는 꽃게를 잡아 돈을 쓸어 담았다는 이야기가 지역에 전해온다. 태안 지역에서는 잡히는 꽃게를 가지고 다양한 요리를 만드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꽃게탕이 인기가 좋다.
  • 경기 >평택시

    단옷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단오게잡이놀이
    경기도 평택시의 단오게잡이놀이는 게잡이 과정을 놀이로 재구성한 것이다. 비교적 게가 많이 잡히는 평택 지역의 주민들은 단오 무렵이면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온 게를 잡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함께 강가나 갯가를 찾았다. 이 놀이는 게잡이를 나가기 전의 입장-게잡이-요리-뒷풀이 순으로 진행된다. 비교적 단순해 보이긴 하나 놀이 과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놀이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게잡이 과정에서 서로 주고받는 소리 역시 이 놀이의 또 다른 묘미라 할 수 있다.
  • 경기 >의정부시

    원숭이의 엉덩이가 빨개진 이유가 밝혀진 원숭이와 게의 떡 다툼
    가을날, 원숭이가 게에게 놀러 오자 게는 논에서 잘 익은 곡식을 훑어다가 정성껏 떡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원숭이가 욕심을 부려 떡을 모조리 챙겨 나무로 올라갔다. 게에게 나무에 올라오면 떡을 주겠다며 놀리던 중 바람이 불어 떡이 바닥에 떨어졌다. 게는 떡을 가지고 게구멍으로 들어가 다시 원숭이를 놀리고, 화가 난 원숭이는 게구멍에 대고 방귀를 뀐다. 게는 원숭이 엉덩이를 잡아 뜯고 그 뒤로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게 되고 게 앞발엔 털이 생겼다고 한다.
  • 제주 >제주시

    용출수에서 산란하는 참게를 잡는 제주도 사람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동, 화순리, 하도리, 이호동 등은 강(江)이 바다와 이어지는 기수역으로, 이곳에 참게가 산다. 제주 해변의 대부분은 분출한 용암이 해변까지 흘러내린 계곡을 따라서 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건천(乾川)이기에 참게 서식지는 매우 드물다. 어린 참게는 민물에서 생활하지만 산란기가 되면 기수역으로 내려와 한동안 생활한다. 절기상 망종(芒種, 6월 6일)이나 하지(夏至, 6월 22일)에 장마가 지면 그 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와 백로(白露, 9월 8일)까지 하류에서 사는데, 이때가 참게잡이철이다. 제주말로 참게 이름은 매우 다양하디. ‘산깅이’(화북동), ‘너파리깅이’(하도리), ‘냇깅이(화순리)’라 부른다. 산깅이는 ‘산에 사는 게’라는 뜻이며, 너파리깅이‘는 ’너팍너팍한 모양의 게‘라는 뜻이며, 냇깅이는 ‘냇가에 사는 게’라는 뜻이다. 이들 이름은 참게가 사는 기수역의 다양성에서 비롯되었다.
  • 충남 >태안군

    태안군 신진도에서는 통발 함정으로 꽃게를 잡는다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리에는 제1종 신진도항이 있다. 1995년에 연륙교인 신진대교가 가설되면서 비로소 뭍이 되었다. 신진항에는 꽃게, 갈치, 오징어 등을 어획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어선들이 즐비하다. 꽃게는 통발을 이용해서 잡는데, 통발에는 고등어나 열치 등을 넣어 꽃게를 유인한다. 통발을 물에 넣고 하루가 지난 후 거둔다. 과거에는 신진도 연안에서 주로 조업했으나, 지금은 격렬비열도 주변에서 근해어업을 한다. 산란기의 봄 꽃게는 가을 꽃게보다 살이 단단해 맛이 좋다. 과거에는 짚 가마니에 담아 꽃게를 인천장으로 보내 판매했으나, 지금은 톱밥에 꽃게를 담아 살아있는 꽃게를 소비자들에게 보낸다. 태안군이 바다목장사업으로 시작한 종묘 방류 사업이 꽃게잡이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 전남 >순천시

    순천만 펄 갯벌에서 널배 타고 칠게를 잡자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마산리 거차마을은 순천만(順天灣)에 속한다. 해안 하구에 형성된 연안습지로 칠게가 많다. 넓게 펼쳐진 갯벌에 미리 건강망을 설치해 두고, 밀물을 따라 들어온 고기를 잡는다. 건강망은 남해안과 서해안 갯벌에 치는 어구이지만, 순천만에서는 칠게를 주로 잡는다. 그물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대나무발을 쳤다. 12㎢의 넓은 면적 전체가 펄로 이루어진 순천만의 펄 갯벌에 쳐둔 건강망까지 이동하기 위해서는 널배[뻘배]를 이용해야 한다. 수명이 길고, 속도가 빠른 삼나무로 널배를 만드는데, 목적과 사용자에 따라 널배의 크기와 모양이 다르다.
  • 경기 >연천군

    1급수 참게를 잡기 위한 진검승부, 연천게줄당기기
    예로부터 연천은 물이 맑기로 유명한 하천이 많았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1급수에서나 볼 수 있는 다양한 생물이 서식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참게이다. 연천게줄당기기는 바로 이 참게와 관련된 놀이이다. 참게가 강으로 올라오는 계절이면 연천의 여러 마을 주민들이 서로 게를 잡기 위해 다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놀이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참게 모양으로 줄을 만들어 줄을 당김으로써 그러한 갈등을 해소하였다. 이 놀이는 삼판양승제로 결정이 난다. 그리고 일반적인 줄다리기와 달리 허리춤에 줄을 끼고 기어서 게처럼 줄을 당기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김치 이야기

김치의 날은 사계절 내내 우리 식탁에 올라온 김치의 가치를 생각하고, 오랜 세월 이어온 김장 문화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날입니다. 김치 재료 하나하나가 모여 스물 두 가지 효능을 낸다는 뜻에서 날짜도 11월 22일로 정했습니다.
지역마다 기후와 재료가 달라 김치의 종류와 맛도 다양합니다. 강화도의 순무섞박지, 여수의 돌산갓김치, 충남의 게국지처럼 각 지방의 손맛이 살아 있는 김치들은 서로 다른 풍토와 이야기를 품고 있지요.
김치의 날을 맞아 전국 각지의 다양한 김치를 만나보고, 우리 식탁에 담긴 지역의 맛있는 이야기를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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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한국인의 김치를 만드는 재료 배추
    배추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저온성 채소이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한반도에서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의서 『향약구급방』에 배추가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재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 고추, 마늘과 함께 4대 주요 채소로 인식되고 있으며, 배추의 대부분은 김치의 주재료로 소비된다.
  • 광주 >남구

    ‘광주김치박물관’, 한국 전통 발효 과학의 홍보대사
    광주김치박물관은 ‘김치’를 주제로 광주김치센터 본관 2층에 자리한 박물관이다. 김치의 역사, 김치라는 단어의 변천사, 김치 담는 재료와 과정, 전국의 다양한 김치 종류, 김치 담을 때 필요한 물품, 김치의 효능과 가치 등을 관람객에게 전하기 위해 2010년에 개관했다. 상설전시실은 전시 내용에 따라 ‘환영의 장’, ‘김치역사의 장’, ‘팔도김치의 장’, ‘김치체험의 장’, ‘김치탐구의 장’,‘발효음식의 장’으로 나뉜다. 늘 밥상에 오르는 김치를, 새삼 새롭게 보게 하는, 마법 같은 곳이다.
  • 인천 >옹진군

    자연산 굴과 까나리액젓으로 만든 김치의 깊은 맛, 짠지떡
    짠지떡에는 백령도에서 흔한 자연산 굴이 들어있다. 그리고 까나리액젓으로 만든 깔끔한 김치가 그 맛을 좌우한다. 짠지떡의 피는 만두처럼 얇지 않고 두껍고 쫀득하다. 두부나 채소 없이 굴과 삭은 김치 두 가지로 맛을 내고, 굴이 있어도 무르지 않고 먹기에 알맞다.
  • 경북 >경주시

    최부자집 며느리의 고충이 깊게 담긴 김치 사연지
    사연지는 경상도 백김치의 일종으로 경상북도 경주시와 안동시의 향토음식이다. 만드는 방법이 까다롭고 정성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안동지역에서는 제사상에도 올린다. 경주 최부자집의 내림음식으로도 유명하며 사연지라는 이름도 최부자집에서 유래한다.
  • 인천 >강화군

    강화도의 특산물 순무로 담근, 순무섞박지
    섞박지는 무, 배추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담근 김치이다. 순무섞박지는 강화도의 특산품인 순무와 새우젓, 고춧가루, 생강, 마늘, 대파 등을 넣어 담그는 섞박지이다. 순무 특유의 씁쓸하고 달큰하며 독특한 향이 각종 양념과 조화를 이루면서 시원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낸다.
  • 충남 >서산시

    게장 국물을 넣어 지져먹는 김치, 게국지
    게국지는 게나 게장 국물을 넣고 만든 김치를 지져 먹는(끓여 먹는) 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충청남도의 향토음식이다. 요즘 방송에 소개되는 꽃게와 새우가 들어간 해물탕 형태의 게국지는 본래의 모습과 차이가 크다. 게국지는 구수하고 감칠맛도 풍부한 개성 있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음식으로 사람들을 끌고 있다.
  • 강원 >삼척시

    “시원한 곰치국 재료? 푹 삭은 김치 한 국자”
    꼼치는 동해안을 비롯한 모든 해안에서 나는 어종이다. 동해안의 꼼치는 다른 지역과 모양이 조금 다르다. 서·남해안의 것은 메기와 비슷하여 물메기, 미거지라고 부른다. 동해안에서는 꼼치를 곰치, 물곰이라고 부른다. 곰치는 여름 내내 1,000m의 깊은 바다에 살다가 겨울이 되면 산란을 위해 수심이 얕은 바위틈으로 올라온다. 겨울 곰치는 흐물거리던 살도 단단해져 제 맛이 난다.
  • 전남 >여수시

    갓김치가 이어주는 바다와 고기의 맛, 여수삼합
    우리나라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을 조합해 먹는 삼합요리가 있다. 광주의 홍어삼합, 장흥의 한우삼합, 여수의 돌문어삼합. 이름만 들어도 각 지역의 음식 맛깔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여수의 맛을 담아낸 여수삼합은 지역에서 해물삼합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여수 특산물인 돌문어와 돌산 갓김치를 한국인인 국민 고기인 삼겹살과 함께 불판 위에서 끓여내는 것이 특징이다. 사이좋게 한점씩 올려 한입에 먹으면 삼합에 푹 빠지게 될 것이다.
  • 전남 >무안군

    남도의 쌉싸름한 맛, 전라남도 고들빼기김치
    고들빼기김치는 소금물에 삭혀 쓴맛을 제거한 고들빼기를 멸치젓국,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의 양념에 버무려 담근 전라남도 지방의 향토음식이다. 고들빼기는 산과 들이나 밭 근처에서 자생하는 초롱꽃목 국화과의 두해살이풀로 뿌리와 잎을 나물이나 김치로 이용한다.
  • 전남 >여수시

    톡 쏘는 알싸한 남도의 맛, 여수 돌산갓김치
    돌산 갓김치는 여수의 향토음식으로 돌산도에서 재배한 갓에 고춧가루, 마늘, 생강, 파, 멸치액젓과 생새우 등을 넣어 버무린 김치이다. 돌산 갓 특유의 톡 쏘는 매운맛과 알싸한 맛으로 예로부터 궁중 진상품으로 올려졌다.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돌산로 일대의 죽포, 두문포, 봉림, 방죽포의 네 개 마을은 ‘여수 돌산 갓김치 마을’로 지정되어있다.

청춘의 용기로 피어난 독립의 빛

11월 3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바로 학생독립운동기념일입니다. 이날은 1929년에 광주 학생들이 일제 식민지 정책에 항거한 날을 기념하는 날로,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과 함께 대한민국 3대 독립운동으로 불릴 만큼 역사적 의미가 깊습니다.
이 격렬한 항일 운동의 발단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했습니다. 통학 열차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 여학생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한 사건에 한국 학생들이 항의하며 충돌했고, 편파적인 일본 경찰의 조치에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는 성진회, 독서회 같은 비밀 학생 조직이 중심이 된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번졌는데요. 1930년 3월까지 전국에서 5만 4천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등 역대급 규모로 확산되었지요.
학생독립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한 민족해방운동이자 1930년대 국내 항일 독립운동의 포문을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집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용기를 내어 일제에 항거한 광주 학생들의 빛나는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족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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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영암군

    영암의 아들 최규창,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최규창은 1920년대 광주항일학생운동을 이끈 성진회와 독서회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 때 중등 학교 최초의 비밀 학생 모임인 ‘성진회’에 가입하여 1928년 동맹휴교 싸움을 이끈 지도부로 활동하였고, 1929년 광주 학생 운동 때에는 독서회 관계자로 참여하여 학생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었다. 1930년 중반 이후부터 사망하기까지 그는 ‘호남평론’, ‘호남신문’, ‘조선중앙일보’ 등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 경남 >진주시

    진주 항일학생운동가 정금자
    정금자는 1930년 진주에서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만세 시위에 참여해 정학처분을 받았다. 1931년에는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회사 직공이 되어 노동운동에 참여한다. 사회주의 계열 적색노동조합에서 활동하며 하동 출신인 김계정, 제영순, 조복금 등과 함께 1931년 파업을 주도하다 체포돼 불구속 기소된다. 1930년 1월에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만세 시위를 한 공로가 인정돼 2018년 대통령 포창을 받았다.
  • 전남 >완도군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학생시위로 확산시킨 장석천
    장석천은 전라남도 완도 신지도 출신으로 1918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유없이 학생들을 괴롭히는 일본 교사를 응징하고 퇴학당하였다. 그리고 장석천은 1926년 ‘동맹휴학’사건으로 무기정학 처분을 당하자 스스로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였으나 전라남도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에서 활동하던 장석천은 광주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학생들을 위한 대책협의와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할 것을 결의하였다. 장석천은 학생운동의 지도를 전담하였으며 이로 인해 체포되어 1년 6개월 형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노동운동을 벌이다 1932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보석출감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 중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장석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전남 >구례군

    독서회 중앙본부 조직에 앞장선 조길룡
    조길룡은 전라남도 능주군 원화순방 읍내면(지금의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출신으로 1929년 성진회를 이어 받아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장재성이 동경에서 귀국하여 ‘독서회 중앙부’를 조직하자 조길룡은 독서회 중앙부 출판부 위원으로 각종 인쇄물 인쇄와 배포를 맡았다. 독서회 중앙부에서 활동하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광주농교생 가두시위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조길룡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경북 >칠곡군

    대구사범학교 항일비밀결사 ‘다혁당’ 당수 권쾌복
    권쾌복은 경상북도 칠곡 출신으로 1939년 ‘왜관사건’ 과 관련하여 비밀결사 ‘백의단’을 조직하였으나 즉흥적 조직으로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는 못하였다. 1941년 권쾌복은 선배들이 결성한 ‘문예부’와 ‘연구회’ 조직이 졸업생 중심으로 구성되어 조직 존속의 문제가 생기자 유흥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두 조직을 계승한 ‘다혁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권쾌복은 다혁당의 당수였으나 조직이 결성된 지 5개월 만에 발각되어, 포항에서 군사 훈련을 받던 중 체포되었다. 권쾌복은 다혁당의 당수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권쾌복은 광복 후 언론계에 몸담았고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권쾌복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경남 >통영시

    『반딧불』로 항일정신을 고취시킨 강두안
    강두안은 경상남도 통영 출신으로 『학생』, 『반딧불』 등을 발간한 독립운동가이다. 강두안은 대구사범학교 4학년으로 1939년 10월 박효준(朴孝濬)·이태길(李泰吉)·문홍의(文洪義)·유흥수(柳興洙) 등과 반일민족의식을 담은 작품집 『반딧불』을 간행하여 민족의식과 반일정신 고취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에서 간행한 『반딧불』이 일제 경찰 손에 들어가면서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전모가 드러나 대합국민학교에 부임한 강두안은 체포되었다. 1943년 강두안은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44년 12월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강두안에게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부산 >부산진구

    일제의 전시체제에 항거한 부산 항일학생의거지, 부산공설운동장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은 1940년 11월 23일 일제가 주죄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대회’라는 학생경기대회에서 일본인 심판장의 편파 판정과 민족차별에 분노한 동래중학교와 부산 제2상업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이 의거를 일으킨 장소이다. 이날 양교 학생 1,000여 명은 시내로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벌였고, 경기 심판장이었던 노다이 대좌의 관사까지 습격하였다. 현재 구덕운동장 주차장 앞에는 <부산 항일학생의거 터> 표지석이 세워졌고, 2004년 11월 23일 부산학생의거를 기리기 위해 부산어린이대공원에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탑>이 건립되었다.
  • 대구 >중구

    항일비밀결사 태극단(太極團) 결성지와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탑
    태극단은 1943년 5월 대구공립상업학교 4학년생 이상호가 서상교, 김상길 등과 함께 전시체제의 일제에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결성한 학생 비밀결사 조직이다. 그러나 태극단은 결성한 지 2주 만에 내부자의 밀고로 단원이 전부 검거되면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군국주의 침략전쟁이 극성에 달했던 시기에 엄혹한 통제와 감시가 자행되는 중에도 무려 1년에 걸친 준비 기간을 거쳐 조직을 구성하였다는 점에서 태극단은 1940년대 대구지역의 비밀결사 활동 및 학생운동에 이정표를 하나 세웠다고 할 수 있다. 태극단이 결성되고 활동하였던 대구공립상업학교 본관(1923년 건축,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건물은 현재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2003년 학교를 새로운 교사(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로 이전하면서 학교 뒤편에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였고, 공원 경내에는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탑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 광주 >북구

    일제강점기 최대의 학생운동, 광주학생의거와 기념유적
    광주학생의거는 1929년 10월 30일 전라남도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을 발단으로 일어난 일제강점기 최대의 학생운동이다. 같은 해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의 학생들이 일제의 차별과 탄압에 항의하는 가두시위를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항쟁이 지속되었다. 또한 광주학생의거는 특정 지역의 학생운동에 그치지 않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으로 확산하여 전민족적인 항일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현재 광주광역시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인 광주제일고등학교를 비롯하여 곳곳마다 광주학생의거를 기념하는 기념탑과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있다.
  • 전남 >해남군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외친 항일운동, 윤창하
    윤창하는 전라남도 해남 출신으로 해남군 현산보통학교를 졸업, 1926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8년 윤창하는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이경채의 퇴학 처분에 항의하여 일어난 동맹휴학에 동참하였다. 이로 인하여 윤창하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9년 윤창하는 독서회 중앙본부 재무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광주고등보통학교 독서회 조사선전부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였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시위운동과 독서회 활동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지만 이후 옥고 후유증으로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윤창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출생의례를 통해 본 지역별 풍습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금줄 한 가닥에는 산모와 아기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아이를 건강하고 무탈하게 키우고 싶다는 한결같은 소망으로, 아이를 점지해달라 삼신에게 비는 '기자의례'부터 산모와 아이를 보살피는 '산후의례'까지 출생 전후의 다양한 의례를 이어온 것이죠.
이를테면 강원도에는 아들을 기원하며 산에 올라 삼신을 모시는 '산메기'가 있었고, 충청도에는 아이를 많이 낳은 집의 물건이나 금줄에 걸었던 고추를 빌려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신을 모시는 방식도, 아이와 함께 세상에 나온 '태'를 처리하는 방식도 지역마다 달랐다고 하네요.
이처럼 각 지역의 환경과 고유한 믿음에 따라 출생의례는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금줄, 삼신상, 첫국밥, 기자의례까지, 우리 삶에 깊숙이 스며 있던 탄생을 둘러싼 의례들을 함께 들여다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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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춘천시

    강원도의 출생의례
    강원도 지역의 기자의례(아들을 기원하는 의례)로는 산메기가 있다. 명절이나 봄, 가을에 좋은 날을 받아 삼신을 받는 의례인데, 주문진읍 소돌마을 아들바위와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요선정 옆에 있는 마애 여래 좌상에게 소원을 빌면 아들을 점지해준다 하여 인기 있는 기자의례 장소였다. 또한 영월에서는 산모가 삼태미(집안의 재를 담아 버리는 삼태기)를 깔고 앉으면 안된다는 금기도 있다. 
  • 전국

    아이를 지켜주는 삼신
    삼신은 집안에 아이를 내려주고 아이의 건강을 지켜주는 신이다. 일반적으로 삼신할머니, 삼신할매 등으로 불리는 여성신이다. 아이를 낳은 후에 삼칠일을 치르면서 삼신상을 올리고, 집안 안방에 삼신단지나 삼신 바가지를 모셔놓고 아이의 건강을 기원한다. 때로 아이를 낳기 위해 삼신 모시기를 하기도 했다.
  • 경북 >성주군

    아이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항아리
    태어난 아이의 탯줄을 보관하는 항아리를 태항아리라고 한다. 왕실에서는 탯줄이 국운과 연관된다고 믿어 태항아리에 담아서 별도로 마련된 태실에 보관했다. 이런 왕실의 풍습을 따라 양반층에서도 태항아리를 가산에 묻곤 했다. 지금도 탯줄을 소중히 여기는 풍습은 여전히 남아있다.
  • 전국

    삼칠일 동안 걸어두는 금줄
    금줄은 부정을 막기 위해서 집 대문이나 길 어귀에 걸어두는, 공간을 구분하는 새끼줄이다. 일반적으로 집안에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거나 중요한 제의를 준비할 때 집 대문의 양쪽 기둥 사이에 걸어둔다. 금줄을 걸어두는 기간은 삼칠일(21일) 정도이다. 금줄은 왼 새끼를 사용하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숯과 종이, 성별에 따라 남자아이는 빨간 고추를 여자아이는 솔가지를 함께 엮어 걸어둔다.
  • 전남 >무안군

    전라도의 출생의례
    출생의례는 새로운 생명을 가지는 것을 기원하거나 태어난 생명을 무탈하게 키워내기 위하여 행하는 각종 의례를 말한다. 기자속을 전라도에서는 지앙맞이라고 한다. 그렇게 아이를 가지면 태몽이나 산모의 상태를 통해서 성별을 예측해보기도 했다. 산모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주의하고 먹는 것부터 행동까지 주의했다. 산실을 마련하고 삼신상을 차린다. 대문에는 삼칠일간 금줄을 걸어둔다. 금줄을 걷어내고 나면 아이와 산모는 첫 나들이로 친정집에 간다.
  • 충남 >홍성군

    충청도의 출생의례
    출생의례는 새로운 생명을 기원하거나 태어난 생명을 무탈하게 키워내기 위하여 행하는 의례를 말한다. 아이 낳기를 기원하는 기자의례에는 자연의 생명력을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지만 아이를 낳은 집의 생명력을 가져오기도 한다. 충청도에선 아이 갖기를 기원해 아이 낳은 집의 도끼, 작두비녀, 배냇저고리, 고추, 절구대 등을 출산의 주구로 놓고 아들을 기원했다. 아이를 가지고 유산의 기미가 느껴지면 오이넝쿨이나 호박넝쿨을 달여 먹는다.
  • 경남 >창녕군

    경상도의 출생의례
    경상도에서는 집안에 삼신이 없으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여 따로 날을 받아 삼신을 모시는 ‘삼신받기’를 했다. 삼신받기를 할 때는 가임기 여성을 데려가지 않았다. 간절히 바라던 아이가 생기면 산모는 물론 온 가족이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했다. 특히 임신 기간에는 집수리를 함부로 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을 때는 산실을 마련하고 산실에는 삼신판을 차린다. 대문에는 금줄을 건다.
  • 관심지역 경기 >수원시

    경기도의 출생의례
    경기도 양주에서는 농사지어 처음 찐 쌀을 창호지에 싸서 달아두었다. 이를 삼신주머니라 부르며, 고깔을 씌우기도 했다. 인천 지역에서는 초상 중에 아이를 낳으면 팥죽을 쑤고 밥이나 떡을 해서 죽은 사람의 살을 푸는 '상문풀이'가 있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미역국과 밥과 정한수를 떠놓고 삼신에게 먼저 올리고 산모가 먹는 풍습도 있었다. 산모가 처음 먹는 이 밥을 ‘첫국밥’이라고 하는데 수원에서는 ‘젖국밥’, 의왕에서는 ‘첫국첫밥’이라고 불렀다. 
  • 제주 >제주시

    제주도의 출생의례
    제주도의 한라산 영실, 가파도 개미왕들, 산방산, 식산봉 등은 자식을 낳기 위해 치성드리는 명소다. 제주도에선 산파를 삼승할망으로 불렀다. 아이를 낳고 3일 째 되는 날, 태를 처리하고, 쑥 삶은 물에 목욕을 했다. 목욕한 아이를 남자의 갈옷으로 싼 후 봇뒤창옷을 입혔다. 아이가 처음 입는 옷인 봇뒤창옷은 길운을 가진 옷으로 여겨 함부로 하지 않았다.
  • 전국

    아이를 낳고 일상생활로 돌아가기 위한 산후조리
    출산 후 산모가 건강하게 일상생활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을 산후조리라고 한다. 출산으로 이완된 몸을 회복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금줄을 친 삼칠일간이 산후조리기간이었으나 남존여비 사상으로 인해 여자아이를 낳은 경우에는 더 빨리 일상생활에 복귀했고, 집안 형편에 따라서도 날짜가 다양했다. 보온이 중요해 여름에도 버선을 신고 긴소매 옷을 입었으며, 먹는 음식도 가려서 먹었다. 

옛적에 신던 여름 신발, 나막신

'딸깍딸깍'

어? 무슨 소리죠? 아하, 나막신이 바닥과 부딪혀 나는 소리인 것 같아요! 여러분은 나막신을 신어본 적이 있나요? 요즘 신발은 대부분 천과 가죽으로 만들어져서 나막신처럼 나무로 만든 신발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1910년 이후 등장한 고무신의 영향으로 나막신은 차츰 설 자리를 잃어버리다 1940년대 전후로 사라졌거든요. 나막신은 원래 조선시대 말기에 짚신과 함께 대중적으로 신는 신발이었다고 해요. 가죽신이 비싸서, 비오는 날 진흙이 되어버린 땅에서 신기 위해 쓰였다고도 합니다.

나막신에 대해 알아보니 과거에 또 어떤 신발들을 신었는지 궁금해지지 않나요? 삼국시대 이전에는 풀과 가죽으로 만든 이(履)와 화(靴)라는 신발을 신었다고 해요. 조선시대 양반가 부녀자들은 앞코와 뒤축이 장식된 낮은 높이의 신발인 당혜를 신었다고 합니다. 또 미투리라는 질 좋은 짚신이 있었는데요. 이는 삼이나 모시, 노끈을 엮어서 만들었다고 해요. 정말 다양한 신발들이 있었죠?

주룩주룩 비가 오는 날, 혹은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 여러분은 어떤 신발을 신으시나요? 신발 젖을 걱정 없는 장화나 통풍이 잘되는 샌들을 많이 신으실 텐데요. 장화와 샌들을 신을 때 과거 조상님들이 신었던 나막신도 한번 떠올려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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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비오는 날 신는 나막신
    나막신은 비 오는 날 진흙땅에서 신기 위해 한 덩어리의 목재를 깎아 만든, 굽이 높은 신발이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의 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비가 올 때는 물론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에도 신었다. 1910년 이후 고무신이 등장하자 경쟁에서 밀려 1940년대를 전후하여 거의 사라졌다. 
  • 전국

    삼 ·모시 ·노 등으로 삼은 신, 미투리
    미투리는 짚신 중에서도 질이 좋은 것으로, 삼(麻)이나 모시, 노끈 등을 엮어 만든다. 미투리는 선비들이 나들이할 때 신던 것으로 미투리 중 섬세한 제품은 사대부들이 주로 신었다. 미투리는 형태로 보면 신목이 낮은 신발의 총칭인 이(履)의 일종이다. 미투리는 흔히 날이 여섯 개나 여덟 개였으며, 아주 정교한 총(미투리의 앞과 옆을 이루고 있는 올) 50~60개로 이루어졌다. 원래 미투리는 삼으로 만들었는데 점차 모시, 노끈, 닥나무 껍질, 칡넝쿨이나 종이와 무명실 등의 좋은 재료로 섬세하게 엮기도 하였으며 왕골이나 부들로 만든 미투리는 염색하여 무늬를 넣어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투리는 짚신보다 튼튼하여 양반층과 서민들이 고급 신발로 취급하였다.
  • 전국

    비 오는날 또는 진 땅에서 신는 신발, 나막신
    나막신은 비오는 날 진 땅에서 신기 위하여 통나무를 파서 깎아 만든 굽이 높은 신이다. 나막신은 나무로 신발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두껍고 큰 목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은행나무·오동나무·피나무·소나무·오리나무처럼 제작이 쉬운 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들었다. 목재의 겉이 마르지 않도록 기름을 칠하기도 했다. 나막신은 신분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신었다. 굽이 높아 비에 젖어 질어진 땅을 걸어다니 좋았으나, 무겁고 활동성이 떨어져 먼 길을 가거나 말을 탈 때는 착용하지 않았다. 맑은 날에도 많이 신었으며, 굽이 닳으면 새 굽을 바꿔 달았다고 한다. 나막신은 이처럼 널리 신겨지다가 1910년 이후 등장한 고무신으로 인해 차츰 설 자리를 잃어버려 1940년대를 전후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 전국

    구름무늬가 새겨진 신발, 운혜(雲鞋)
    운혜(雲鞋)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부녀자가 신는 신으로 신코[신발 앞쪽의 뾰족한 곳]와 뒤축[발 뒤쪽의 둥그런 부분 중 두둑한 맨 뒤쪽의 가운데]에 다른 색의 무늬를 장식한 신발이다. 신발 바닥에 짐승 털로 만든 조각인 담(毯)을 깔아 따뜻하다는 의미에서 ‘온혜(溫鞋)’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신발의 앞쪽 모양이 제비의 부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제비부리 신’이라고도 불린다. 운혜는 앞코에 죽엽문(竹葉紋)을, 뒤축에는 굼벵이 형태의 장식을 붙여서 마무리한다. 이러한 형태는 개화기 개발된 고무신에 그대로 반영되어 최근까지 그 형태를 유지해왔다. 운혜는 화려하고 조화로운 색감과 날렵한 곡선 형태가 어우러져 한국적 미의 아름다운 외양을 나타내고 있다.
  • 전국

    조선시대 양반가 부녀자들의 신발, 당혜
    당혜(唐鞋)는 조선시대 부녀자가 신던 가죽신으로, 당초문(唐草文)으로 앞코와 뒤축을 장식한 낮은 높이의 신발이다. 조선시대 여자의 신으로는 당혜⸱온혜(溫鞋) 등이 있었는데, 당혜는 좋은 집안인 양갓집 부녀자가 신었고 온혜는 일반 백성 집안의 부녀자가 신었다. 중국 당나라에서 통일신라시대 무렵 들어와 조선시대 말엽까지 신었으며 ‘당혜’라는 명칭은 당초문(唐草紋) 장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혜의 일반적인 형태는 남자용 신발보다 앞코가 더 뾰족하게 올라가 있다. 또한 현대의 고무신처럼 신울의 간격이 좁아 오랫동안 신고 걷기는 불편하였다. 그리고 신발의 오른쪽, 왼쪽의 구별이 없었다. 당혜의 신코에서 뒤축으로 이어지는 곡선의 아름다움은 당혜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다른 나라의 신발과는 구별되는 조선시대 특유의 형태적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 서울 >송파구

    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화혜장
    화혜장은 전통 신발을 만드는 장인이다. 조선시대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갖신’을 신었다. 이러한 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이 ‘화혜장’이다. 전통 신발 제작은 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수십 번의 제작공정을 거쳐 이루어질 만큼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가 요구된다.
  • 전국

    남방계와 북방계의 신발, 이(履)와 화(靴)
    이(履)는 신목이 짧은 신의 총칭으로 신발의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며, 남방족계의 신이며, 화(靴)는 장화와 같이 신목이 높이 달린 신으로 방한, 방침에 적당하여 무풍적인 북방계의 신이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두 종류의 신을 혼용하여 착용했기 때문에 먼저 생긴 신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고유 복식이 북방호복 계통이므로 고유의 신은 목이 긴 화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삼국 이전에는 이미 풀과 가죽을 이용한 신을 신었으며, 부여의 초탑, 마한의 초갹, 초갹답, 초리 같은 다양한 신의 종류를 바탕으로 삼국시대의 신발이 발달하였다.

익숙한 지명 속 뜻밖의 유래

우리나라 곳곳을 거닐다 보면 옛사람들의 상상력이 담긴 흥미로운 지명들을 마주하곤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마을 이름 같지만,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신비로운 전설이 보이기도 하죠.
가령 대전의 '범골'은 호랑이가 사냥꾼과 함께 한 굴에서 지냈다는 설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진안의 '고미동'에는 영리한 여우가 알려준 명당 덕분에 한 나무꾼이 큰 부자가 되었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죠.
이처럼 우리나라의 지명들에는 동물과 자연,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던 옛사람들의 믿음과 상상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이름은 과연 어떤 유래를 품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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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음성군

    효자를 위해 잉어가 스스로 뛰쳐나온 음성 이양골
    충청북도 음성에 효자로 이름난 권국화가 살았다. 어느 해 부친의 약을 구하러 한밤중에 장호원을 가려고 하니 호랑이 태워다 줬다. 그리고 한겨울에 부친이 잉어회를 먹고 싶다고 해 성미저수지에 가서 도끼로 얼음을 깨려 했으나 깨지지 않았다. 권국화는 무릎을 꿇어 하늘에 기도를 드렸고, 무릎의 체온에 얼음이 녹아 뚫힌 구멍으로 잉어가 뛰쳐나왔다. 덕분에 아버지는 잉어회를 먹고 천수를 누렸다. 권국화가 잉어를 잡았던 성미저수지가 있는 들판을 잉어가 올라온 곳이라 하여 이양골이라 불렀다.
  • 대전 >중구

    사냥꾼이 새끼 호랑이를 키운 마을, 대전 범골
    대전광역시 중구 호동에서 대명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범골이라고 한다. 옛날 범골에 재주 좋은 사냥꾼이 살았다. 하루는 친구 병문안을 갔는데, 친구의 병이 호랑이 앞다리를 먹어야 낫는다고 했다. 사냥꾼은 친구를 위해 호랑이를 잡아 줬다. 그런데 죽은 호랑이가 어미였던 까닭에 새끼 호랑이가 사냥꾼 집 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냥꾼은 새끼 호랑이를 데리고 굴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았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사냥꾼이 호랑이와 함께 살았던 곳이라 해서 범골이라 불렀다.
  • 광주 >광산구

    억새밭을 일구다 금덩이가 나온 광주 산막동 보화마을
    광주광역시 산수리 마을에는 성실하기로 소문난 여양진이 살았다. 그는 스님의 권유로 산막동에 이주를 하여 농사를 지었다. 당시 이곳은 억새가 많아 그것을 일일이 베어내고 밭을 일구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밭을 일구던 그는 어느 날 땅에서 금덩이를 파냈다. 여양진은 금덩이가 스님의 덕으로 얻은 것이나 부처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전해줄 절을 찾아 떠났다. 이후 여양진이 가꿔놓은 밭에는 여러 사람들이 이주해 살았고, 주변 마을에서는 금은보화를 얻은 곳이라 해서 보화촌(寶貨村)이라 불렀다.
  • 전북 >진안군

    여우 덕에 마을을 이룬 진안 고미동
    옛날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외궁리에 고씨 성을 가진 이가 살았다. 그는 가난하여 산에서 나무를 해다 장에 팔아 생계를 잇고 있었다. 하루는 산에 나무를 하러 올라갔는데 여우가 자꾸 고갯짓을 하며 부르는 것 같아 따라갔다. 그랬더니 생전 처음 보는 넓은 들판을 접하게 되었다. 고씨는 의형제를 맺은 송씨와 조씨가 더불어 그 밭을 열심히 일구어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산을 모았다. 이후 인근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꼬리가 긴 여우가 고갯짓을 하며 가르쳐준 마을이라 해서 고미동(顧尾洞)이라 불렀다.
  • 전북 >무주군

    원나라 순제가 붙여준 지명, 무주 구천동
    원나라 순제는 잃어버린 옥새를 찾으려고 고려에까지 사람을 보내 달라고 했다. 이에 무주 출신 유해가 원나라에 가서 옥새의 행방을 찾았으나 알 수가 없었다. 유해는 순제의 옥새를 찾아주기로 약속한 날, 전날에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담배를 꺼내 물며 ‘담배나 죽이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를 밖에 있던 담거와 배소가 듣고 자신의 소행이라고 실토를 한다. 유해가 옥새를 찾아주니 순제는 잔치를 베풀고는 유해의 고향에 아홉 나라의 제후들이 축하해줄 자리라는 뜻의 구천동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 전남 >곡성군

    '세 갈래 길'이라는 뜻을 가진 삼기면의 마을별 지명유래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은 곡성, 담양, 벌교로 통하는 세 갈래 길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백제 시대 욕내군에 속하였고 현재 12개의 마을로 개편되었다. 통명산, 초악산, 대명산과 삼기천 등이 있고 곡성군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호남고속도로 곡성나들목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역원제에서 비롯된 원등마을과 곡성현과 옥과현의 경계를 이루는 월경마을, 고양이형국이라 괴소리, 지형에 따라 의암·금반마을, 산 이름을 딴 통명·대명마을이 있고, 청계·봉현·주산·노동마을 등 풍수와 전설 따라 각양각색의 지명이 형성되었다.
  • 전남 >곡성군

    높은 다리가 있어 고달이라 불린 고달면의 마을별 지명유래
    전라남도 곡성군 고달면은 조선시대 남원부에 속했다가 1906년 구례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곡성군에 속하게 되면서 7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고달면은 마을 앞에 높은 다리를 놓았다 하여 '고다리'라 불리다가 조선 말부터 고달(古達)이라 불렀다. 고달면의 지명은 천마산과 섬진강 주변 마을들로 마을이 형성 되는 과정과 시기에 따라 생기게 되었다. 오리 떼가 날아드는 ‘오리실’, 풍수지리와 연관된 목동이나 호곡마을, 전설이 깃든 뇌연마을이나 탑선마을 등이 있으며 가정 마을은 지역의 풍광과 연관된다.
  • 경북 >경산시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올라간 경산시 구룡마을
    옛날 용왕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새 왕비를 들인 후, 딸들이 왕비에게 구박을 받자 용왕은 막내딸을 육지에서 살게 했다. 막내딸은 지금의 구룡산에 터를 잡고서 비와 구름을 관장하며 아홉 용을 낳고 살았다. 막내용이 말썽을 심하게 부리자 막내딸은 용왕에게 부탁하여 막내용에게 벌을 청했다. 용왕은 아홉 용을 하늘나라에 보내어 비와 구름을 다스리게 했다.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한 막내용은 살던 곳을 찾아 나서다 용왕의 노여움을 사 죽고 말았다. 이들이 살던 산을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해서 구룡산이라고 했으며 구룡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구룡마을이라고 불렀다.
  • 전남 >진도군

    옛 지명에 담긴 조상들의 선견지명
    공선구지에는 지금 조선소가 들어서 있고, 독구불, 분무굴, 쇠당섬도 모두 조선소와 관계있는 쇠를 다루는 지명이다. 또한, 공선구지가 빌(공)자, 배(선)자의 공선이라서 조선소를 암시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명대로 후대에 조선소가 들어온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딱 맞아떨어져, 조상들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는 것이다.
  • 인천 >계양구

    인천 계양구 병방동 지명유래
    최근까지 지역의 촌로들은 병방동을 ‘됭면’으로 불러왔는데, 이는 동면을 ‘됭면’으로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병방동을 동면으로 대신불려진 이유는 병방리에 동면(東面)의 면소재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면은 부평도호부 관아가 있었던 부내면(府內面)의 동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반짝이는 겨울 전국 야경 명소

연말이 다가오면 거리 곳곳에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낮에는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이 어둠과 함께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죠. 차가운 겨울밤, 따뜻하게 빛나는 불빛들이 만들어내는 낭만 속으로 떠나볼까요?
수백 년 전, 임진왜란의 첫 봉홧불이 타올랐던 부산의 황령산 봉수대에서는 아픈 역사의 자리에서 부산 시내를 가득 채운 불빛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서울 강남의 삼성 배수지 공원은 시원하게 뻗은 한강을 중심으로 강남과 강북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죠. 통영 8경 중 하나인 통영운하는 무지개 다리 위 오색 조명이 바다에 반사되어 황홀한 야경을 선사합니다.
불빛 하나하나에는 그 지역만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도, 일상의 풍경이 특별해지는 곳도 있죠. 다가오는 연말, 겨울밤의 낭만을 찾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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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 >북구

    주상절리, 억새군락지, 호수공원과 해변이 조화로운 울산 북구 12경
    뛰어나게 아름다운 경치를 이르는 말이 ‘절경’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상대적이라 동일한 것이라도 모두에게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고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울산광역시 북구청에서는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 전문가 등의 검토를 거쳐 2021년 3월에 ‘북구 12경’을 선정하였다. 이와 같이 북구 12경 탄생은 오래지 않아 관광객들에게는 아직 낯설겠지만 이들은 오래 전부터 지역에서 사랑받던 곳이다.
  • 경남 >통영시

    바다와 석양 그리고 산과 바위가 어우러진 통영 8경
    경상남도 통영시에서는 지역의 아름다운 절경을 널리 알리고자 산과 바다 그리고 석양이 어우러진 통영 8경을 선정하였다. 한때 '한국의 나폴리', '동양의 나폴리' 등으로 불리던 통영은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합되어 지금의 통영시가 되었다. 통영시에는 경치가 뛰어난 자연물과 인공물이 수없이 존재한다. 지역민들은 통영시 바다와 산의 사계, 그리고 이들의 조화로운 어울림 등을 그 누구보다 많이 보았기에 8경을 선정하는 것은 지역민들이 몫이다. 웅장한 경치를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산사의 종소리처럼 차분하고 은은한 경치를 즐기는 이들도 많다.
  • 전남 >목포시

    아홉 가지 먹거리와 함께 즐기는 목포시의 목포구경
    전라남도 목포시에 ‘목포구경’이 소재한다. 1930년대부터 전해지던 ‘목포팔경’을 현대에 맞게 '목포구경'으로 2015년에 새롭게 지정한 것이다. 목포시는 서해와 영산강이 만나는 여울목에 위치하고 있다. 목포항 건설로 1930년대에는 우리나라 6대 도시에 들어갈 정도였다. ‘유달산’에 오르면 서해와 목포 야경이 보이고, ‘삼학도’ 등을 비롯한 작은 섬들이 바라다 보인다. 섬과 바다, 그리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다. 목포를 대표하는 아홉 가지 먹거리와 조화를 이룬 목포구경은 목포시를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목포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 서울 >강남구

    강남의 야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삼성 배수지 공원
    강남구 삼성동에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강남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공원이 있다. 강남수도사업소에서 관할하는 삼성 배수지가 위치한 자리에 조성된 이 공원은 삼성동 마을 주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산책 코스이며 한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뛰어난 전망과 아름다운 들꽃과 편안한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특히 삼성배수지 공원의 백미는 밤에 있다. 어두운 밤 가로등 불빛만을 보며 공원 언덕에 오르다 평지를 만나게 되는 도시 불빛의 불야성으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 충남 >홍성군

    석양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홍성의 ‘궁리포구’
    궁리포구는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궁리에 있다. 궁리포구는 홍성팔경 중 제8경으로 해돋이와 해넘이를 같이 볼 수 있는 명소이다. 특히 궁리포구의 해넘이는 드넓게 펼쳐진 천수만과 포구를 드나드는 작은 어선들을 함께 조망할 수 있어, 아름다운 석양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또한, 궁리포구 인근에는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속동갯벌마을과 천수만의 생태환경을 관찰할 수 있는 홍성조류탐사과학관도 자리하고 있다.
  • 부산 >부산진구

    국내 최고의 야경을 자랑하는 부산의 황령산 봉수대
    황령산 봉수대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에 소재한 황령산에 있다. 이 봉수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고려말로 추정되며, 남서쪽에 있는 구봉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에 있는 계명산 봉수대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전국의 봉수대 중에서 최초로 봉화를 올린 봉수대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 복원된 황령산 봉수대는 인근에 조성된 전망대를 바탕으로 부산 시민들뿐만 아니라 많은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 경남 >창원시

    밤하늘 수놓은 불꽃의 향연, 마산 진동마을 낙화놀이
    마산 진동낙화놀이는 경남 마산시 진동면 일원에서 전승되고 있는 전통적 불놀이 형태이다. 참나무숯과 귀목나무 껍질숯을 갈고서 여기에 황가루를 섞어 길가에 매달아 불을 붙인다. 이때 숯가루가 타면서 불꽃이 흩날리게 방식의 전통적 불꽃놀이로 형태이다.

지역 속에 담긴 흥미로운 유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에는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다양한 지역 이야기들이 숨어있습니다. 지도로 길을 찾을 순 있지만, 이곳에 언제부터 길이 있었는지, 길이 왜 만들어졌는지, 이곳 지형이 주민들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죠.
궁금증이 생겼을 때 지도 대신 봐야 할 책이 바로 '시군지'입니다. 구례·완주·제천에서 간행한 이 사료집은 그 지역의 산과 강, 그리고 마을이 어떤 시간을 지나 지금에 이르렀는지 보여주죠. 물론 서울이나 인천의 향토문화자원집처럼, 우리가 익히 아는 대도시의 깊은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돕는 자료들도 있습니다.
이렇듯 '시군지'는 단순한 기록물을 넘어, 한 지역의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매일 무심히 지나치던 우리 동네에서든, 낯선 여행지에서든, 지역에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시군지를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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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신안군

    1800년대 말 서해안 지역의 도서 상황을 기록한 지도군총쇄록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瑣錄)』은 19세기 말의 자료로 오늘날 신안군 지역에 해당하는 당시 지도 지역의 다양한 모습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오횡묵으로 지도군수로 부임을 받은 그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지도군까지 배를 타도 오는 일련의 과정과 지도군수로 있으면서 그가 여러 섬을 다니며 했던 일들을 이 책에 소상하게 기록해 놓았다. 여러 가지로 자료가 부족한 19세기 말 도서 지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하였다는 점에 무척 의미 있는 책이 아닐 수 없다.
  • 제주 >서귀포시

    서귀포시 대정읍의 역사자료전시관, 기억의 눌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은 알뜨르 비행장, 선알오름 학살터 등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 기억들을 모아놓은 대정현 역사자료전시관의 이름이 기억의 눌이다. 눌은 제주 방언으로 '차곡차곡 쌓아놓은 더미'이다. 기억의 눌이 있는 건물은 1955년 지어진 대정면사무소 건물로, 2005년 등록문화재 157호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기억의 눌은 대정읍의 주민들이 직접 지역 공간의 기억과 기록을 모아 만든 전시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관심지역 경북 >안동시

    30년 동안 지역문화잡지를 발행해 온 문화모임 안동
    ‘문화모임 안동’은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을 위한 전국 강연이 안동에서 열리면서 신문사 후원을 위해 모였던 안동지역의 문화인과 학자들이 안동지역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매체가 필요하다는데 공감하면서 만들어졌다. ‘문화모임 안동’을 통해 1988년 4월에 창간된 지역문화잡지 『안동』은 30년이 넘도록 발행되고 있다. 이 잡지에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주인공이며 안동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가 게재된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2014년에 종간될 뻔 했지만 시민들의 힘으로 여전히 발행되고 있다.
  • 경기 >이천시

    이천을 이끄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천 이야기 총론
    이천문화원은 이천 문화의 주체가 이천시민임을 인식하여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과 시민기록관 등 아카이브 기반 시설을 마련하였다. 주제별 아카이브와 이천문화를 알리는 다양한 전문가 과정을 개설하였다. 2017년 ‘이천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다-이천 시민기록자 양성 과정’을 수료한 시민기록자들은 지역주민의 관점에서 이천시민의 일상과 기억을 기록하고, 지역 아카이브 전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구술생애사, 마을지, 마을 노거수 사진 기록, 이천 옛이야기 총서 등 다양한 콘텐츠로 우리 동네 이야기를 기록·생산하고 있다.
  • 경기 >이천시

    주민의 관점에서 마을을 기록하는 문화 자치, 이천 마을지
    이천문화원은 2017년부터 외지에서 온 소수 전문가가 기록하는 기존의 마을지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주민이 기록 주체로 참여하는 방식의 마을지를 제작·발간해 오고 있다. 이를 위해 마을지 제작 우선 과정으로 시민기록자와 마을주민이 만나는 ‘마을 기록학교’를 마련하여 마을주민의 삶과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기록할지 주민 스스로 선택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후에는 마을주민 인터뷰로 개개인의 기억과 마을 이야기 등을 기록하며 마을 역사를 재발견하고 마을주민이 마을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마을지를 발간한다.
  • 경기 >과천시

    시민들의 기증 자료로 꾸며진 과천향토사료관
    2012년 4월 16일 과천시 문원동에 있는 과천문화원 2층에 과천향토사료관을 개관하였다. 과천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18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주로 기증받은 자료인 고문헌, 박물류, 사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천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열정을 느낄 수 있고 조상들의 발자취가 담겨 있는 곳이다.
  • 전남 >곡성군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곡성군 지명유래
    곡성이란 명칭은 본래 백제의 욕내(欲乃)에서 유래된다. 통일신라시대 지방통치조직과 군현개명작업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생성된 '곡성군' 지명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욕내군은 지금의 목사동면과 석곡면 일대로 고려시대까지 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골짜기가 많은 곳’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욕내'라는 순우리말 명칭이 한자로 변경되어 '곡성(谷城)'이 되었다고 한다.

생활문화가 만든 장례문화의 차이

한 사람의 마지막 길을 예와 정성을 다해 모시는 의식, 장례.
장례의 절차는 전국적으로 비슷하지만, 장례를 치르는 방식은 각 지역의 생활문화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고 합니다.
경기 남부에서는 이웃사촌들이 모여 '사촌계'를 만들어 마을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상여를 함께 메며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강원도 횡성에서는 관을 땅에 묻고 석회를 섞은 흙을 단단하게 다지는 '회다지'를 했는데요. 이때 선소리꾼이 고인의 이력과 애도를 담은 노래를 부르며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했죠. 경기·충청 지역에서는 시신이 빨리 뼈만 남는 것이 좋다는 관념에 따라 관을 넣지 않고 시신만 넣는 '퇴관' 방식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장례절차는 간소화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고인을 정성껏 배웅하고 남은 이들을 위로하고자 했던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지역마다 고유하게 이어져 온 다양한 장례 문화를 통해 한국의 장례문화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전해져 왔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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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영월군

    산간 지역의 독특한 장례문화를 보여주는 영월지게상여놀이
    영월 지게상여놀이는 지게를 이용하여 시신을 운반하는 것을 놀이로 승화시킨 것이다. 매장할 곳의 사정에 따라 상여로 시신을 운반하기 어려운 장지는 지게를 이용하여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운반하던 것이 이 놀이의 핵심이다. 소리꾼 등이 등장하여 지게로 시신을 운반하여 매장하는 과정까지를 놀이로 재현하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강원도 여러 지역에서도 지게 상여놀이가 전승되는 것을 보면 지역적 사정을 잘 보여주는 놀이라 할 수 있다. 이 놀이는 크게 네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마당은 입장, 둘째 마당은 운상하기, 셋째 마당은 회다지, 넷째 마당은 진사놀음이다.
  • 경기 >화성시

    화성지역의 상장례문화를 놀이로 재현한 화성왕재호상놀이
    경기도 화성지역의 왕재호상놀이는 왕재 지역의 상장례를 놀이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놀이는 모두 다섯 과장으로 나눠지는데 첫 번째 과장은 널액막음이다. 두 번째 과장은 발인제와 하직인사다. 시신을 운반하는 상여를 꾸민 다음 여러 상두꾼들이 상여를 메고 집을 나선다. 이 과장이 끝나면 바로 이어 길을 떠나는 노제[세 번째 과장]를 행한다. 네 번째 과장에서는 상여를 메고 굴을 지나고 개울을 건넌다. 맨 마지막은 달고질 과장이다.
  • 전국

    고려와 조선시대 상례와 장례풍속
    고려 경종 때 5복제도를 만들었다. 5복제도는 죽은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상복을 입는 방법과 기간을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 이러한 규정은 사실상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성리학이 들어오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예를 확립하고 불교식 제를 금지하면서 차츰 민간으로 퍼져나갔다. 
  • 전국

    상여 운구를 연습하는 빈상여놀이
    빈상여놀이는 출상 전날 상여를 운구할 상여꾼들이 미리 발을 맞춰보는 놀이로 호상이면서 상가집이 부유한 경우에 행해졌다. 상여꾼들이 밤새도록 놀면서 상주와 유족을 정서적으로 위로해줬다.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며,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진도 다시래기와 서울시 무형문화재인 호상놀이도 빈상여놀이에 속한다.
  • 관심지역 경기 >수원시

    상갓집 다녀오기 전후에 하는 경기지역의 상문풀이
    상문은 잡귀(雜鬼)의 개념에 가까운 뜻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상갓집에 들렸다가 와서 탈이 나면 ‘상문이 끼었다’고 표현하며 이를 미연에 예방하고 또 상문을 풀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의례를 행한다. 예방방법으로는 게 다리 하나를 가슴팍 주머니에 넣어 조문을 가기도 하고, 조문 갔다 와서는 측간 위 이엉의 볏짚을 한 움큼 빼서 불에 태우거나 소금을 뿌리는 등 조치를 취했다. 만약 상문이 끼었다고 여기면 무당에 물어보아 방도를 대거나 만신을 불러다 상문풀이를 했다.
  • 경기 >양평군

    양반들끼리의 장례와 산역 조직, 경기도 지역의 유학계
    유학계는 양반들이 스스로 상여를 메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결성한 계로, 양반이 상민에게 상여를 메도록 시킬 수 없었던 신분차별 철폐기에 나타났다. 유학계의 역할은 운구(運柩)와 산역(山役) 등 장례절차에서 필요한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양반들끼리의 계였다. 그러던 유학계는 1970년대 이후 점차 대동계로 바뀌었다.
  • 경기 >화성시

    이웃사촌이 함께 상여를 메기 위해 결성된 상례조직, 사촌계
    사촌계는 “대동으로 상여를 메기 위해 이웃사촌들이 함께 조직한” 상례조직으로 경기남부 중에서도 화성, 용인, 의왕, 수원 등지에서 나타난다. 한말이나 일제시기에 처음 결성되었다는 지역도 있으나 대부분 지역은 대개 해방직후에 만들어졌으며 70, 80년대에 조직되거나 심지어 90년대에 결성된 곳도 있다. 사촌계 활동을 살펴보면 상장례를 포함하여 잡초 제거, 수재 성금, 노인회 및 부녀회 관광 등 마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관련 비용은 상주와 계원들에게 찬조금을 받고 부족한 부분은 사촌계에서 부담하는 방식으로 한다.
  • 관심지역 경기 >수원시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장례를 치른 당일 밤에 행하는 자리걷이(방가심)
    서울, 경기 등 지역에서는 죽음의례의 하나로 자리걷이, 일명 ‘방가심’이 행해지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부정을 가시려는 것이 주목적이고, 또 망자의 넋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자리걷이는 주로 망자의 시신을 매장하고 돌아온 날 밤에 치러지며 삼우제 지내고 치러지기도 한다. 동네만신이나 용하다는 만신을 불러 자리걷이를 진행하는데 만신은 주로 고리짝을 젓가락으로 긁으며 축원을 하거나 망자의 소망을 전달하기도 하고, 망자의 환생을 예언하기도 한다.
  • 관심지역 경기 >수원시

    입관하지 않고 시신만 꺼내어 묻는 퇴관
    18세기 중반 이후에 경기지역과 충청지역에서는 매장할 때 관을 넣지 않고 시신만 넣는 퇴관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시신이 빨리 뼈만 남은 상태, 즉 육탈(肉脫)이 되는 것이 좋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지역이라고 하더라도 입관을 고수하는 가문이 있었다. 매장할 때 퇴관은 관을 넣지 않기에 광중을 만들 때도 내광을 사람 신체 형태로 만드는 점이 입관과 다르다. 그 외 매장 절차에서는 입관과 거의 같다.
  • 관심지역 경기 >수원시

    망자 장례 후 삼 일째에 지내는 제사, 삼우제
    삼우제는 망자의 혼령을 위로하고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다. 전통적으로 우제(虞祭)는 장사 당일에 장지에서 혼백을 가져와 제청에 모셔놓고 초우제(初虞祭)를 지내고, 다가오는 유일(柔日)에 재우제(再虞祭)를 지내며, 강일(剛日)에 삼우제(三虞祭)를 지냈다. 경기지역에서는 보통 3일장을 지내고 나서 당일에 초우제, 이튿날에 재우제, 그다음 날에 삼우제를 지내거나 당일에 반혼제를 지내고 3일째 되는 날에 삼우제를 지내는 것으로 간소화되었다.

겨울을 견딘 선조들의 지혜

칼바람이 두 뺨을 스칠 때마다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요즘입니다. 옷 안에 핫팩을 붙이고 그 위에 롱패딩을 걸치면, 동장군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은 든든한 기분이 드는데요. 이렇게 든든한 방한복이 없었던 시절, 우리 선조들은 혹독한 한반도의 겨울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선조들의 지혜는 바로 '겹쳐 입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패딩 속에 조끼를 껴입고 귀마개를 하듯 상황에 맞게 필요한 방한용품을 더하는 방식이었죠. 예를 들어, 저고리 위에 덧입던 '마고자'는 지금의 패딩 조끼처럼 체온을 유지해 주는 따뜻한 외투였습니다. 또한, '남바위'는 귀마개와 목도리의 역할을 동시에 해주어, 찬바람에 노출되기 쉬운 얼굴과 목 주변의 열을 고스란히 지켜주는 고마운 모자였답니다.
지금부터 오늘날의 롱패딩 못지않게 든든하고 포근했을 선조들의 방한용품들을 만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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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뒤쪽이 트이게 만든 아이용 바지, 풍차바지
    풍차바지는 바지 마루폭에 바람을 막아주는 풍차(風遮)를 달고 뒤가 길게 트인 아이용 바지이다. 풍차바지라는 이름은 바지 엉덩이 부분에 헝겊 조각인 ‘풍차’를 달아서 붙여졌다. 풍차바지의 형태는 큰사폭, 작은사폭, 마루폭, 조끼허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풍차바지의 앞은 보통 남자 바지와 같다. 마루폭에 순서대로 큰사폭과 작은사폭을 꿰매어 붙인다. 그리고 바지 뒤쪽의 트인 부분에 풍차를 대어 겹치게 하였다. 풍차바지는 성인의 바지와 구성은 비슷하지만, 뒤와 밑이 트여 아이들이 입기에 적합한 의복이었다. 풍차바지를 입고 어린아이들이 배변훈련을 하기도 하였고, 색상으로 남아와 여아를 구별하기도 했던 풍차바지는 아동들이 착용했던 옷 중에서도 가장 기능적인 옷이었다.
  • 전국

    조선시대 남녀가 겉옷으로 두른 두루마기
    주의(周衣)는 조선시대에 남녀 귀천 없이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겉옷으로 주로 외출할 때 입었다. 주의는 한자어 표음으로 주막의(周莫衣)·주차의(周遮衣)라고도 하며 우리말로는 두루마기라고 한다. 두루마기는 다른 외투인 창의(氅衣)가 어깨 밑이 터져 세 폭이 따로 도는 것과 다르게 옷 전체가 두루 ‘막혀있다’라는 뜻의 ‘두루막이’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인 두루마기의 형태는 뒷길·앞겉길·앞안길과 소매, 그리고 겉섶·안섶이 있다. 또한 옷고름·안옷고름과 동정·깃 등으로 직령교임식(直領交衽式)이며 소매는 좁았다. 길이는 보통 발목에서 20~25cm 정도 올라오게 한다. 두루마기는 1884년(고종 21) 복제 개혁에 따라 종래의 웃옷인 창의·도포·중치막 등이 폐지되자 웃옷으로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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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위를 피하기 위해 저고리 위에 덧입는 마고자
    마고자는 마괘자(馬褂子)라고도 하며, 저고리 위에 덧입는 덧옷으로 중국 청나라 때 의복이다. 1887년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의 유폐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 마고자를 입고 온 뒤부터 한국에서도 입기 시작하였다. 마고자는 저고리와 비슷한 형태에 깃과 동정, 고름이 없으며, 양 섶을 여밀 수 있도록 섶에 단추를 달았다. 남성용은 여성용과 다르게 섶을 달고 길이도 여자 것보다 길어서 양옆 아랫부분을 터서 활동성을 좋게 하였다. 마고자의 목둘레는 마고자 안에 저고리를 입었을 때 옷깃이 보이도록 V자 모양이며, 배래는 저고리와 같이 붕어 배래로 되어 있다. 단추는 하나이며, 괘와는 반대로 단추가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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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위나 더위를 막기 위해 팔목에 끼는 토시
    토시는 팔목에 껴 추위나 더위를 막는 물건으로 ‘토수’라고도 한다. 원래는 남자들만 착용하였으나 점차 여자들도 착용하게 되어 조선시대 남녀노소 모두가 사용한 치레거리로 자리잡았다. 토시의 형태는 저고리 소매와 비슷하다. 한쪽 끝은 좁고, 다른 쪽은 넓다. 그래서 이를 봉재할 때는 버선처럼 4겹 박음질을 하고, 좌우 구분이 가능하게 만든다. 토시의 종류는 계절마다 소재와 형태가 달라 다양하였다. 토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외국에서 들어온 셔츠나 장갑과 같은 서양의복에 의해 차차 사라졌다. 1950년대 후반에는 노인들 일부만 사용하였으며 현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오늘날에도 등토시는 모시 한복에 받쳐 사용하기도 한다.
  • 전국

    뺨과 턱 그리고 정수리를 가릴 수 있던 방한구, 볼끼
    볼끼는 겨울철에 쓰는 방한구로 뺨과 턱, 그리고 귀까지 모두 감싸고 정수리에서 묶는 간단한 추위막이이다. 볼끼의 용어로 조선 전기에는 한자로 과시·협과로 기록되기도 하였으며, 후기에는 보을리·보을기, 볼기·볼끼 등으로 기록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사용해왔다. 조선시대 볼끼의 재료는 신분별로 차이를 두어 왕실 여성들은 자적색을 사용하고 상궁 이하 궁인들은 백색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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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남성들이 착용하던 방한모, 휘양(揮揚)
    휘양(揮揚)은 머리부터 어깨까지 덮는 방한모(防寒帽)로 조선시대 남자들이 주로 추운 겨울에 착용하였다. 휘양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정수리 부분을 둥글게 하고 이마 부위에 걸치게 한다. 모자의 아랫부분은 얼굴을 내놓는 부분으로 그 크기는 얼굴이 들어갈 정도로만 하고 윗부분은 약간 좁게 만든다. 뒤로는 통수와 목을 둘렀으며, 양쪽 볼끼에 끈을 달아 단단히 묶어 찬바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소재에 따라서 휘양은 모휘양(毛揮揚)·목휘양(木揮揚)·양휘양(凉揮揚)으로 구분하며, 실용성을 강조하였다.
  • 전국

    방한과 장식을 겸한 어린아이용 쓰개, 굴레
    굴레는 조선시대 후기 방한과 장식을 겸한 어린아이용 쓰개로 상류층 가정에서 돌쟁이부터 4~5세까지의 남녀 아이가 착용하였다. 굴레는 돌을 맞이한 아기들이 많이 써 ‘돌모’라고도 불리며, 아이의 건강에 대한 염원을 담은 다섯 가지 색의 비단에 화려한 장식을 덧붙여 아이의 쓰개로는 가장 화려하다. 굴레의 형태는 세 가닥 또는 더 많은 가닥을 얽어 정수리인 모부(帽部)를 덮고, 그 밑에 여러 가닥의 드림댕기가 드리워진다. 굴레는 어린이의 쓰개였지만 성인이 착용할 때도 있었다. 딸이 회갑을 맞을 때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딸이 색동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고 어머니의 무릎에 안기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때 굴레를 함께 썼다.
  • 전국

    조선시대 남녀가 공용으로 썼던 방한모, 남바위와 풍차
    남바위는 조선시대 남녀가 공용으로 썼던 방한모로 '이엄(耳掩)' 또는 '난이(暖耳)'라고도 하며 일명 ‘풍뎅이’라고도 한다. 남바위의 형태는 위가 뚫려 있고 가장자리는 볼에서 둥근 모양으로 끝나는 조바위와 다르게 볼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너비의 모선(毛縇)이 둘려 있다. 조선시대 방한모 중에 남바위와 형태가 비슷한 다른 쓰개로 풍차가 있다.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또 다른 쓰개인 풍차(風遮)는 남바위와 비슷하지만 귀와 빰, 턱을 가리는 볼끼가 모자부분과 이어져 있다. 남바위는 볼끼를 탈착할 수 있지만, 풍차는 볼끼를 사용하지 않을 때 뒤로 제쳐서 끈으로 매야 한다.
  • 전국

    겨울에 부녀자들이 추위를 막기 위해 착용했던 아얌
    아얌은 조선시대 때 부녀자들이 추위를 막으려고 머리에 쓰는 방한모로 액엄(額掩)이라고도 한다. 아얌의 형태는 머리에 쓰는 부분과 뒤에 늘어지는 큰 댕기로 이루어져, 크게 모부(帽部)와 드림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아얌은 조선시대에 양반가와 일반 부녀자들이 외출용으로 착용하고 때론 장식용 난모(暖帽)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기녀들도 아얌을 일상용으로 착용하기도 하였으나 조선시대 말기에 다른 방한용 모자인 조바위가 등장하면서 차츰 사라졌다.
  • 전국

    발에 감는 좁고 긴 무명천, 감발
    감발은 먼 길을 떠나거나 추위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발에 감는 좁고 긴 무명천으로 버선이나 양말 대신 착용했다. ‘신발’이란 말은 짚신의 ‘신’과 감발의 ‘발’에서 나온 말이며, 감발의 유형은 발을 보호하는 기능과 보온의 기능을 하는 두가지로 나타난다. 신발이 발달하지 않았고, 방한도구가 없었던 시기에 감발은 손이나 발을 보호하는 유일한 보호용 도구였으며, 따라서 감발은 장거리 여행이나 추위를 막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노을이 아름다운 이곳에서 낭만 충전!

어느덧 2025년도 끝자락에 접어들었습니다. 연말이 되면 늘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밀려오곤 하죠. 숨 가쁘게 달려온 순간들 속에서 스스로가 대견하다가도 문득 놓쳐버린 기회들에 아쉬움이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한 해가 지나가기 전에, 하루의 해가 저무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속 깊이 담아두었던 아쉬움들을 저 석양 너머로 떠나보내는 건 어떨까요? 온 세상이 붉게 물든 장관을 마주하면 들떠 있던 마음도, 무거웠던 걱정도 차분하게 가라앉을 거예요. "모든 일은 이렇게 지나가기 마련이구나." 작은 위로와 함께 말이죠.
전국 곳곳에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찾아가기 좋은 낙조 명소들이 있습니다. 경남 사천시 실안낙조는 죽방렴과 바다, 섬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석양으로 유명합니다. 충남 태안군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는 두 바위로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광경이 서해안 3대 낙조로 손꼽히죠.
올 한 해도 수고한 나를 위해, 2025년을 후회 없이 떠나보내기 위한 시간을 선물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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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사하구

    낙동강과 남해가 만나는 지점,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다대포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위치한 다대포는 1971년에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다. 부산에 있는 네 개의 항구인 북항, 감천항, 다대포항, 남항 중 하나로, 본래는 목재 화물 부두였다. 낙동강 하구에 있는 다대포항은 수심이 2~20m로 얕고, 항역도 좁아 선박을 정박하고, 피항하기에 적합하다. 고대국가로부터 왜적이 출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조선시대에는 수군만호영이 설치되었다. 을숙도 철새도래지와 감천동 항구 사이에 있으며, 다대포항 인근에서 어획한 고등어·삼치·방어 등의 어물을 판매한다. 항구에는 860여 척의 어선이 정박해 있으며,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만 2,500명으로 어업 비중이 높다. 주변에 기암괴석이 많고, 숲이 우거져 있으며,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는 다대포 해수욕장과 낙동강하구에코센터, 낙조분수 등의 명소가 있다.
  • 경기 >화성시

    수도권 요트의 천국이 된 화성 전곡항
    화성시 전곡항은 서울 근교에 위치해 요트나 보트를 타러 온 이들이 찾는 지방어항이다. 수많은 보트와 요트 덕에 이국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전국 최초 레저 어항 시범지역으로 다기능 테마어항으로 선정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당성으로 불렀는데 당성은 삼국통일의 전초기지이자 중국의 선진문물이 유입되는 관문 역할을 했다. 지금은 방파제를 건설해 24시간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크고 작은 요트 200척이 정백해 있다. 방파제 끝에는 붉은 색의 등대도 명물 중 하나이며, 이 곳에서 보는 낙조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화성 일몰 명소로 손꼽힌다.
  • 인천 >강화군

    아름다운 서해 낙조와 기도 성지로 유명한 인천 보문사
    석모도 낙가산에 자리한 보문사는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 사찰의 하나로, 635년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회정이 창건했다고 한다. 사찰 앞마당에 있는 커다란 석굴에는 23명의 나한을 모시고 있는데, 삼산면에 살던 어부가 노스님의 현몽에 따라 바다에서 건져 올린 불상을 안치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보문사에는 등공양 중 실수로 깨트린 옥등잔에 관한 설화도 전해진다. 보문사에는 기도 성지로 유명한 마애관음보살상과 일반 맷돌보다 큰 화강암 맷돌이 있다.
  • 충남 >태안군

    낙조가 아름다운 명승지 태안군 안면읍의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에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가 소재한다.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는 안면읍 꽃지해수욕장에 위치하며, 2009년 명승으로 지정된 곳이다. 꽃지해수욕장은 백사장이 넓고 수심이 완만하며, 알맞은 수온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사계절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특히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일몰 광경은 서해안의 3대 낙조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 경남 >사천시

    기존의 8경에 용두공원과 청룡사 겹벚꽃을 추가한 사천 9경
    경상남도 사천시에서는 2002년에 주민들의 의견에 따라 사천 8경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후 추가와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민들의 의견이 있었다. 이에 사천시에서는 다시 주민들 의견을 모아 2023년 3월에 사천 제1경을 ‘창선·삼천포대교’에서 높은 선호도를 보인 ‘삼천포대교와 사천바다케이블카’로 변경하고 ‘용두공원과 청룡사 겹벚꽃’을 새롭게 추가하여 현재 사천시는 모두 9경이 선정되어 있다.
  • 경남 >진주시

    촉석루와 의암, 해돋이와 노을이 어우러진 진주 8경
    경상남도 진주시는 오래전부터 진주 12경, 진주 10경이라고 해서 지역의 절경을 자랑하였으나 지역이 개발되고 자연이 훼손되면서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에 지역의 뜻있는 분들의 발의로 시민들이 뜻을 합해 1997년에 새로운 진주 8경 선정을 추진하면서 후보지를 공모하고 심의하여 1999년 10월 8일에 이르러서 ‘진주 8경’을 제정·공표하였다. 그 결과 제1경은 진주성 촉석루, 제2경은 남강 의암, 제3경은 뒤벼리, 제4경은 새벼리, 제5경은 망진산 봉수대, 제6경은 비봉산의 봄, 제7경은 월아산 해돋이, 제8경은 진양호 노을 등이 선정되었다.
  • 전북 >김제시

    바닷가에 위치해 낙조가 아름다운 김제시 진봉면의 망해사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진봉면에 ‘진봉산 망해사’가 위치한다. 진봉산은 높지 않은 산이다. 그렇지만 진봉산 망해대에 오르면 서쪽으로 ‘서해’가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금만경평야’가 내려다보인다. 망해사가 위치한 곳은 서해의 섬들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서해의 일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승지이므로 망해사라 하였다고 한다. 한편 망해사는 사찰로서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명승지로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 전북 >익산시

    낙조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익산의 ‘웅포곰개나루’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에 있는 나루로, 충청남도 한산면 신성리와 금강을 가로질러 연결된다. 곰개(熊浦)라는 지명은 지형이 곰이 금강의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곰개나루는 서해의 해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이며, 조선 전기에는 세곡을 모으는 조창(漕倉)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 전북 >군산시

    고군산군도의 아름다운 낙조의 섬, 군산의 장자도
    장자도는 고군산군도의 작은 섬이지만 천혜의 항구와 좋은 어장을 가지고 있어서 예전에는 어업으로 풍요로운 섬이었다. 현재 어장은 예전만 못하지만 다리가 놓이면서 어업보다는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드라이브 코스의 마지막 지점으로 장자도에 들어와 고군산도의 바다를 둘러보며 걷다 보면 서해의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다. 장자도에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억울하게 바위가 되어버린 장자할머니의 슬픈 설화가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