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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로 구성한 지역문화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

6월, 태극기 휘날리며

나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지는 6월 6일입니다. 6월 6일은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며 조기를 게양하는 현충일입니다. '현충(顯忠)'은 충렬을 높이 드러낸다는 뜻으로, 현충일은 충성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지는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충일에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모든 분들의 넋을 기리고 추모합니다.

나라의 위기 앞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며 희생할 수 있었던 숭고한 호국정신을 후손인 저희가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서는 태극기를 게양하며 묵념하는 것도 추모의 방법 중 하나입니다.

지금부터 올바르게 태극기를 게양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태극기 게양 하는 법 ]
1. 게양 방법: 깃봉(최상단)에서부터 간격을 두고 내려서 게양
2. 게양 시간: 오전 7시~오후 6시
3. 게양 위치: 집 밖에서 보았을 때, 중앙 또는 문 왼쪽에 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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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당진시

    당진 천의장터의 3.1만세운동과 4.4독립운동기념탑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의 천의장터는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에서 정미면까지 이어진 당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이다. 1995년 4월 4일 만세운동 당시 순사주재소가 있던 자리에는 4.4독립운동기념탑이 건립되었다.
  • 대전 >서구

    의친왕 망명시도와 국내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펼친 김용원
    김용원은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 덕골 출신으로 자는 중옥(仲玉), 호는 강산(剛山)·무이천(無二天), 이명은 백상열(白相悅)이다. 김용원은 1919년 대동단에 가입하여 의친왕 이강의 상해 망명 공작에 참여하였고, 의친왕의 망명이 실패하면서 김용원은 고향에 피신하였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으나 사임하고, 무장투쟁 활동을 위해 중국 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병으로 귀국하였다. 국내에서 김용원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체포·병보석 등을 반복하며 활동하며 7년간 옥살이를 하다 1934년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병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김용원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광주 >동구

    언론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최원순
    최원순은 1919년 동경 유학생으로 2.8 독립선언에 적극 참여하고, 평생을 언론인으로 언론운동을 했다. 일제의 언론 탄압에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언론인을 결속시키는 ‘전조선기자대회’를 열기도 하고 총독부를 비판하는 글을 써 투옥되기도 한다. 출소 후 그는 죽을 때까지 계유구락부를 만들어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활동을 한다.
  • 충남 >천안시

    독립운동의 터전 아우내장
    아우내장은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서 매월 1일과 6일 열리는 오일장이다. 문헌상의 기록에는 1779년부터 개설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벌렸던 곳으로 인근에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 인천 >동구

    3.1 독립운동 발상지, 인천 창영초등학교 앞 문구점
    인천 창영초등학교는 3.1운동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조진만 대법원장, 고유섭 선생 등 다양한 인물을 배출해낸 창영초등학교 옛교사는 인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창영초등학교 앞에는 작은 문구점이 하나 있는데, 40년 넘게 이 앞을 지킨 문구점 사장 할머니께서 이 학교의 역사와 동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 서울 >은평구

    민족을 위한 헌신, 금사향이 부른 『님계신 전선』
    님계신 전선은 6·25전쟁 당시 발표된 노래로 국방부 정훈국 소속이었던 금사향이 노래를 불렀다. 그는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태극기를 휘날리며 공연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6.25 참전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다. 님계신 전선 노래비는 은평평화공원 미 해군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 동상 옆에 세워져 있다. 
  • 경북 >성주군

    성주 독립운동의 성지, 야계 송희규 종가
    송희규의 본관은 야로(冶爐)이고, 자(字)는 천장(天章)이며, 호는 야계산옹(倻溪散翁)이다. 송수겸(宋守謙)의 증손이며, 시조 송맹영의 16세손이다. 송희규는 왕의 외숙인 윤원형의 무도함을 탄핵했다가 전라도 고산에서 5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1552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로 돌아와 야계 종택인 백세각을 건립하였다. 송희규는 성주 야성송씨의 위상을 높인 인물이다. 야계 종가는 야성송씨 집성촌인 고산정 마을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송희규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다.
  • 대전 >중구

    독립운동가 신채호가 8살까지 살았던 대전 신채호 선생 생가지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가 있다. 1991년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면서 1992년 생가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주민들의 고증을 바탕으로 하여 1999년 생가가 완성되었다. 2015년에는 생가 관리 건물로 쓰이던 곳을 리모델링해 단재홍보관인 단채헌이 개관되어 신채호와 대전의 독립운동가 관련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 서울 >성북구

    독립운동가이자 승려, 시인 한용운
    한용운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이다. 백담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된 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하며 조선불교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 준비과정에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뤘다. 대표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서울 성북구에는 한용운이 1933년에 짓고 거주했던 '심우장'이 남아있다.
  • 양구·화천 전투, 고지전투에 참전한 최전방 전투병, 부상으로 제대하다
    김대명은 6·25참전 용사로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에 살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선산 처가 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보름 만에 상주로 다시 돌아왔다. 피난을 못 갔다고 2등국민이란 소리 듣는 것이 싫었다. 1950년 11월에 영장을 받게 되자 1등 국민이 되려고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대구 방직공장에서 훈련을 받고 동부전선 최전방인 양구, 화천 등에서 치열한 고지전을 치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뀌는 고지전투 속 중공군과의 육박전으로 큰 부상을 입고 대구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명예 제대하여 현재는 참전유공자로 살고 있다.

기억하기 위해 기록된 6.25전쟁

2023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45년 한반도는 새 나라를 세울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념적 대립이 생기게 되면서 한반도에는 두 개의 체재가 들어섰고 이념적 갈등은 결국 6.25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동이 트기 전, 대포 소리에 잠이 깼어요. 사람들이 짐을 메고는 어디론가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더군요.
그제야 알았어요. 전쟁이 일어났다는걸요." - 6.25를 겪은 민간인의 증언

6.25전쟁은 3년간 많은 인명 피해를 냈습니다. 한국군 61만, 유엔군 54만, 북한군 80만, 중공군 97만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은 민간인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요. 남한은 100만, 북한은 107만여 명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렇게 수백만 명의 사상자들과 함께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참혹한 비극과 아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6.25전쟁을 배경으로 많은 영화들이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참전 용사들과 전쟁 피해자들을 생각하고 그날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된 우리의 『6.25 특선 영화』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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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보성군

    좌우익의 대립상황을 밀도감 있게 담아낸 영화 『태백산맥(1994)』
    1994년 개봉된 「태백산맥」은 조정래가 쓴 동명의 대하장편소설을 원작으로, 1948년 10월 일어난 여수ㆍ순천사건으로부터 6ㆍ25전쟁에 이르기까지 전라남도 보성 벌교를 배경으로 하여 일어나는 좌ㆍ우익의 대립상황을 밀도감 있게 담아낸 전쟁드라마영화로 임권택 감독이 연출했으며, 영화진흥공사가 지원한 국책영화이다. 안성기(김범우), 김갑수(염상구), 김명곤(염상진), 신현준(정하섭), 오정해(소화) 등이 출연했고 상영시간은 168분이다
  • 인천 >중구

    목숨을 건 첩보전을 그린 영화 『인천상륙작전(2016)』
    2016년 7월 27일 개봉한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감행된 군사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이재한 감독의 영화이다. 양창훈 제작, 이만희각본, 이정재, 이범수, 리암 니슨, 진세연, 정준호 등이 출연했다.
  • 부산 >중구

    전쟁을 넘어 굳세게 살아가는 삶, 영화 『국제시장(2014)』
    2014년 12월 17일에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작품으로 부산광역시에 위치한 국제시장을 배경으로  황정민, 오달수, 김윤진이 주연을 맡은 휴먼 드라마 영화이다. 1950년대 6·25전쟁에서 현재까지 살아온 산업화 세대인 지금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역사의 비극·감동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는 전쟁영화이다.
  • 경북 >포항시

    71명의 학도병이 포항을 지켜낸, 영화 『포화속으로(2010)』
    2010년 이재한 감독이 발표한 「포화속으로」는 6·25전쟁에서 큰 활약을 한 학도병들의 이야기를 다룬 전쟁 영화로, 1950년 8월 11일에 포항여자중학교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차승원이 북한군 장교 역할을, 빅뱅의 멤버 최승현이 학도병을 맡았고, 권상우는 불량 청소년에서 애국자로 변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 강원 >평창군

    6·15선언의 정신을 영화로 보여준 『웰컴 투 동막골(2005)』
    영화 「웰컴투동막골」은 1950년 11월 6·25전쟁이 한창이던 ‘동막골’이라는 강원도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유엔군, 북한군, 국군 일행이 우연히 이 마을에 모여들면서 벌어지는 일을 영화적 판타지로 그려내고 있다. 사상과 이념의 대립이 없는 한 공간에 그들을 배치시킴으로써 관객들이 이전의 전쟁영화와는 달리 이데올로기의 안경을 벗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 경남 >합천군

    가족의 희생사를 다룬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3)』
    2004년 개봉한 강제규 감독작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 전쟁으로 한 형제의 산산이 부서진 삶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그린 영화이다. 전장에 끌려간 형과 동생, 두 형제는 서로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숱한 운명적 순간을 겪으며 살아남지만, 형이 동생을 구하려다 죽음을 맞고 산자와 죽은 자가 뒤바뀌게 되는 이야기다.
  • 전국

    전쟁의 잔상에서 살아남기, 영화 『만무방(1994)』
    엄종선 감독이 연출한 「만무방」은 1961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오유권 작가의 중편소설 『이역의 산장』을 ‘만무방’이란 제목으로 바꾸어 영화화한 것이다. 1994년 대종필름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6·25전쟁 말기 접전지역의 한 오두막에서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벌이는 또 다른 생존전쟁을 그린 전쟁영화로 장동휘, 윤정희, 김형일, 신영진이 출연하였다. 상영시간은 101분이다.
  • 경기 >부천시

    안정효의 소설을 다룬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1991)』
    1991년 한진흥업에서 제작한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미국에서 출판되어 화제를 모은 안정효의 소설 『은마(Silver Stallion)』를 원작으로 하여 장길수 감독이 연출하고, 이혜숙, 김보연, 손창민, 전무송 등이 출연하였다. 상영시간 123분이다. 6·25전쟁 중 미군 부대가 들어오면서 유입된 미국 문화로 인해 급속히 붕괴되어 가는 한국의 전통적인 시골마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원작의 모티브는 부천군 심곡리[현 부천시 심곡동]에 살았던 작가의 전쟁 피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 전남 >구례군

    이태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 『남부군(1990)』
    1990년 개봉한「남부군」은 종군기자 이태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로 출간된 원작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제작비 14억 원에 3만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된 대작으로 주목을 끌었다. 5년에 걸친 지리·소백산 지구의 빨치산 토벌전을 배경으로 북한에서 버림받고 남한에서 반동으로 몰려 갈 곳을 잃고 산속으로 들어간 빨치산의 전투 활동을 그렸다. 안성기, 최민수, 최진실, 이혜영 등 당대 최고의 인기배우들과 왕년의 스타인 트위스트 김이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와 열연했고, 장선우의 각본으로 정지영감독이 연출하였으며, 남프로덕션에서 제작하였다. 상영시간은 157분이다.
  • 강원 >철원군

    598고지에서 국군의 활약을 그린 영화 『전우가 남긴 한마디(1979)』
    「전우가 남긴 한마디」는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전술상의 요지인 598고지에서 국군의 활약상을 그린 전쟁영화이다. 2011년 독고영재가 당시 신예로 연기했던 영화촬영에 대한 후일담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9년 한진흥업에서 제작한 전쟁영화로 황길용의 원작을 백결이 각색, 이원세 감독이 연출하고, 진봉진, 장혁, 전영선, 김만 등이 출연했다. 상영시간 105분이다.

바다와 함께 살아가요!

여러분 바다에도 기념일이 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바로 매년 5월 31일 바다의 날로 해양산업의 중요성과 의의를 높이고 해양산업 종사자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날입니다. 이날 행사는 주로 항만 및 바다 청소, 수산자원 보호 등 바다 환경과 관련된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다의 현재 인간의 손길로 인해 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국내 연안에서 수거되는 해양 쓰레기의 양도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한 해 평균 11만 4212t이라고 하는데 이는 무려 20t짜리 생활 쓰레기 수거 트럭 5700대의 분량이며 그중 플라스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플라스틱은 자연적으로 썩는데 500년 이상이 걸린다는 큰 단점이 있습니다.

심지어 분해되어도 미세 플라스틱이 된다고 합니다.

이 미세 플라스틱은 해양 생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하는데요. 결국에는 우리 식탁에 음식으로 올라오며 인간에게 위협을 끼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해요.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오늘부터 하나하나 잘못된 습관들을 고쳐보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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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바다 위에 열리는 시장, 파시
    파시는 저장시설과 운반시설이 부족하던 시절에 바다 위에서 열리던 시장이다. 조선시대의 문헌 자료에 '파시'라는 용어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전부터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파시는 대상 어종에 따라 구분이 가능한데 조기파시와 민어파시, 고등어파시 등이 그것이다. 파시가 열리는 지역에는 이 기간 동안 임시 촌락인 파시촌이 형성된다. 파시촌은 밤만 되면 불이 꺼지지 않았는데 어부들을 상대로 여러 상업시설이 불야성을 이뤘기 때문이다.
  • 전남 >보성군

    뻘배 타고 갯벌을 미끄러지며 꼬막잡기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장암리 일원에서는 갯벌 위를 뻘배를 타고 다니며 꼬막을 채취한다. 부드러운 펄에서 꼬막 채취가 쉽도록 뻘배를 사용한다. 수십 개의 종류 중 참꼬막은 제사상에 오른다고 하여 ‘제사꼬막’이라 부르며 고급 조개로 간주한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가 좌우로 감싸고 있는 보성군 벌교 앞바다인 여자만(汝子灣)의 넓은 갯벌에 대포마을과 장암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1962년에 어촌계가 조직으로 그동안 어업 활동에 면허제도가 도입되어 마을 공동어장 관리를 시작하면서 양식 꼬막 생산이 시작되었고, 집중적으로 생산된 꼬막 작업에 뻘배가 중요한 도구로 자리잡았다. 그 결과 2016년에 '국가중요어업유산 제2호’로 지정되었다.
  • 충남 >보령시

    보령 오천항, 잠수부가 키조개를 캐는 유일한 항구
    오천항은 백제와 신라시대에 회이포라는 항구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 고려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어지자 군선을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충청수영을 설치했다. 천수만의 깊숙한 곳에 있어 피항시설이 없어도 안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도 방파제 없이 선착장에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오천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령시의 중심 장시인 광천장이 위치해 있다. 광천장을 오가는 배들이 물때가 맞지 않으면 이 곳에 배를 두고, 걸어가야 했던 마지막 기항지이기도 했다.
  • 경기 >화성시

    어촌마을에서 즐기는 바다 체험, 화성 국화도
    국화도는 경기도 소속이지만 충청남도 당진 장고항에 더 가까운 서해의 작은 섬이다. 국화도에는 두 개의 부속 섬이 있는데 이들 섬은 물때에 따라 국화도와 연결된다. 작은 섬이라 많은 주민들이 살지 않고 분교로 있던 학교도 폐교된 지 오래되었다. 선착장 주변과 완만한 경사의 국화도 해수욕장 주변에 펜션과 같은 숙박시설이 여럿 있다. 접근성이 좋고 조용한 섬으로 간단한 트래킹을 즐기러 오거나 낚시를 하러 오는 섬이다.
  • 부산 >사하구

    부산 을숙도, 다시 살아난 생태계의 섬
    부산 사하구에 위치한 을숙도는 새가 많고 물이 맑다고 해서 '을숙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과거에는 갈대와 수초가 무성하고 어패류가 풍부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까지 했던 동양 최대의 철새 도래지였으나, 산업화와 난개발 때문에 자연환경과 생태계가 훼손되었다. 이후 각종 오염을 감내해야 했던 을숙도는 1996년부터 생태계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2012년 완료하였고, 현재는 을숙도 철새공원, 낙동강하구에코센터, 생태공원과 메모리얼파크 등의 명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서울 >마포구

    일반인도 쉽게 짜릿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해루질
    해루질은 물이 빠진 바다에서 어패류를 채취하는 행위를 말한다. 최근 해루질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를 하고 있다. 바다를 무대로 생활하는 어민들과 단순히 해루질 체험활동을 즐기기 위한 체험객들의 주된 목적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민들의 해루질은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부분이 강하지만 체험객들에겐 하나의 유희에 불과하다. 다만 다양한 목적으로 해루질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어족 자원을 외지에서 온 체험객들에 모두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서울 >마포구

    조선 후기 어업의 발달과 관련이 깊은 지토선
    지토선(地土船)은 지방에 소재한 배라는 뜻으로,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방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배를 말한다. 이 배의 또 다른 명칭은 어염상선(魚鹽商船)이다. 지토선은 지방을 기반으로 한 선박으로 용도적인 부분에서나 지역적인 부분에서 볼 때 매우 다양한 형태의 선박이 존재하였다. 지토선은 고기를 잡는 것보다는 물건을 싣고 강과 바다를 자유롭게 오가는 선박이었는데 주로 취급하던 품목으로는 나무와 소금, 물고기 등이었다.
  • 강원 >삼척시

    수심과 어기(漁)에 따라 다양한 어종을 어획하는 동해안의 자망
    강원도 삼척시와 동해시 어민들은 바다를 수심에 따라 구분한다. 수심 20~40m는 가까운 바다라고 부르고, 수심 100m 이상은 먼 바다라고 부른다. 수심에 따라 어구를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다. 고기를 잡는 그물인 자망(刺網)은 수심의 깊이에 따라 그 종류가 다르다. 자망은 울타리처럼 생긴 그물과 고정형 그물로 나뉜다. 그물의 용도에 따라 저자장, 유자망, 부자망, 선자망 등으로 구분된다. 설치 수심에 따라 표층자망, 중층자망, 저층자망으로도 구분한다. 동해안에서는 어류의 서식지에 따라 자망을 달리 사용하는데, 어종의 크기에 따라 자망의 그물코와 그물 겹수가 다르다. 가지미를 잡을 때는 저자망을 사용하고, 오징어를 잡을 때는 중층자망을 사용한다. 오랜 전통을 지닌 어법으로, 시기에 따라 어종의 변화와 수심에 대응해 다양한 어종을 어획할 수 있다.
  • 경북 >울진군

    바다의 길잡이 역할을 한 후포 등대
    후포리는 경상북도 울진군 최남단에 속해있는 마을로 800여명의 주민이 거주 중이다. 마을에는 해발 60m의 등기산이 자리 잡고 있고, 등기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바닷가의 산정에는 후포 등대가 자리하고 있다. 후포 등대는 1968년 1월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밤이 되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의 표지 역할과 후포항을 진출입하는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등대는 백색의 팔각형으로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높이 11m의 등대는 35km의 불빛이 뻗어나가 바다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으며, 현재는 후포항과 동해를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의 역할도 하고 있다.
  • 경북 >울릉군

    아름다운 우리 땅 국토지킴이 독도 등대
    아름다운 우리 땅, 대한민국 최동단 독도에는 국토를 지키는 독도 등대가 우두커니 서 있다. 독도 등대의 역사는 1954년 8월 처음으로 불을 밝히며 시작되었다. 독도 등대의 첫 번째 임무는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알리고 우리의 땅과 선박을 지키는 것이다. 독도 등대는 백색 원형 콘크리트 구조로 15m의 높이를 자랑하고, 최대 46km의 거리까지 빛을 전달하고 있다. 독도 동도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등대 주변에는 통신 시설과 경비 시설이 함께 하고 있다.

과거 아이들의 옷차림

아이들의 몸에 맞춰 제작된 작고 앙증맞은 옷을 보다 보면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렇게 유아옷을 보고 있으니 문득 드는 의문이 있는데요! 과거 아이들은 어떤 옷을 입고 생활했을지말이에요~ 궁금하다면 알아봐야겠죠! 지금부터 과거 속으로 떠나 아이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새곤새곤 자고 있는 아기의 저고리를 유심히 살펴보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배냇저고리를 입고 있네요. 배냇저고리는 아이가 태어나 처음 입는 옷으로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는 옷이랍니다! 추운 날씨지만 조잘조잘 떠들며 놀고 있는 아이를 보니 귀까지 덮어주는 모자를 쓰고 있네요. 저 모자는 굴레로 추위를 막기 위해 안감은 비단이나 융을 사용하였으며 화려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까치까치 설날은♬ 까치설날이네요! 저기 누가 봐도 눈에 띄는 두루마기를 입은 아이가 있는데요. 무슨 옷을 입은걸까요? 아~ 까치두루마기네요.까치 두루마기는 오색 옷감으로 지은 두루마기로 설 전날 입혔으며 현재는 돌옷으로 많이 입힌다고 합니다~ 옛 시절 아이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지 궁금했는데 궁금증이 해결되는 유익한 시간이었네요~ 다음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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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이천시

    아이들의 장수를 바라는 이천 거북놀이
    이천 거북놀이는 청소년들이 거북이 형상을 뒤집어쓰고 노는 놀이로 추석날 벌인다. 거북이를 수수 잎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밭농사와 관련이 깊다. 아이들이 남의 집 마당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나면 집주인이 떡과 음식을 내어주는 풍습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이들이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 전국

    뒤쪽이 트이게 만든 아이용 바지, 풍차바지
    풍차바지는 바지 마루폭에 바람을 막아주는 풍차(風遮)를 달고 뒤가 길게 트인 아이용 바지이다. 풍차바지라는 이름은 바지 엉덩이 부분에 헝겊 조각인 ‘풍차’를 달아서 붙여졌다. 풍차바지의 형태는 큰사폭, 작은사폭, 마루폭, 조끼허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풍차바지의 앞은 보통 남자 바지와 같다. 마루폭에 순서대로 큰사폭과 작은사폭을 꿰매어 붙인다. 그리고 바지 뒤쪽의 트인 부분에 풍차를 대어 겹치게 하였다. 풍차바지는 성인의 바지와 구성은 비슷하지만, 뒤와 밑이 트여 아이들이 입기에 적합한 의복이었다. 풍차바지를 입고 어린아이들이 배변훈련을 하기도 하였고, 색상으로 남아와 여아를 구별하기도 했던 풍차바지는 아동들이 착용했던 옷 중에서도 가장 기능적인 옷이었다.
  • 전국

    찬 기운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옷, 두렁치마
    두렁치마는 치마 모양으로 어린아이의 배와 아랫도리에 두르는 옷이다. 어린아이의 배 위에 두렁치마를 둘러 밖의 찬 기운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였다. 두렁치마의 형태는 성인의 치마와 비슷하지만 일반적인 치마와 다르게 뒤가 겹치지 않게 만들어서 아기의 뒤가 배기지 않도록 하였으며, 기저귀를 갈기에도 편리하였다. 두렁치마의 모양은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치마폭을 두고 바깥쪽에 사다리꼴의 무를 달았다. 치마의 주름은 듬성듬성 잡거나 가장자리 양쪽으로 두세 개씩 주름을 잡기도 하였다. 두렁치마의 소재는 무명, 광목(廣木), 명주를 사용해서 만들었으며 자주 세탁해야 하는 아이들의 옷이라 대체로 흰색이다. 두렁치마는 배냇저고리, 풍차바지와 더불어 외형적 디자인보다 아동의 위생과 성장에 맞춘 실용성을 고려한 유아기의 대표적인 복식이다.
  • 전국

    방한과 장식을 겸한 어린아이용 쓰개, 굴레
    굴레는 조선시대 후기 방한과 장식을 겸한 어린아이용 쓰개로 상류층 가정에서 돌쟁이부터 4~5세까지의 남녀 아이가 착용하였다. 굴레는 돌을 맞이한 아기들이 많이 써 ‘돌모’라고도 불리며, 아이의 건강에 대한 염원을 담은 다섯 가지 색의 비단에 화려한 장식을 덧붙여 아이의 쓰개로는 가장 화려하다. 굴레의 형태는 세 가닥 또는 더 많은 가닥을 얽어 정수리인 모부(帽部)를 덮고, 그 밑에 여러 가닥의 드림댕기가 드리워진다. 굴레는 어린이의 쓰개였지만 성인이 착용할 때도 있었다. 딸이 회갑을 맞을 때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딸이 색동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고 어머니의 무릎에 안기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때 굴레를 함께 썼다.
  • 서울 >용산구

    평생 '어린이'를 위해 살았던 아동문학가 방정환
    '어린이'라는 말은 1920년 전까지 우리나라에 없던 말이다. 아동문학가 방정환이 1920년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월간지 『개벽』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면서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방정환은 안데르센과 그림 동화를 번역 소개했고, 한국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아동문제연구회인 색동회를 창립하고 어린이날을 만들었으며, 동화회를 열었다. 『신청년』 , 『신여성』 , 『학생』 등의 잡지를 발간하고, 『칠칠단의 비밀』, 『사랑의 선물』 등의 동화를 썼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방정환의 동상이 서 있다.
  • 전국

    아이의 첫 생일, 돌
    아이의 첫 번째 생일을 ‘돌’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태어나 1년이 되기 전에 죽는 아이들이 많아서 돌의 통과의례적인 의미가 컸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일에 예쁜 돌복을 입히고, 음식을 풍성히 차려 잔치를 했다. 잔치 중에는 아이의 장래를 예측해보는 돌잡이도 했고, 이웃들에게 돌떡을 돌리기도 했다. 현재에도 돌은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돌잔치 문화도 전승되고 있다. 
  • 전국

    삼칠일 동안 걸어두는 금줄
    금줄은 부정을 막기 위해서 집 대문이나 길 어귀에 걸어두는, 공간을 구분하는 새끼줄이다. 일반적으로 집안에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거나 중요한 제의를 준비할 때 집 대문의 양쪽 기둥 사이에 걸어둔다. 금줄을 걸어두는 기간은 삼칠일(21일) 정도이다. 금줄은 왼 새끼를 사용하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숯과 종이, 성별에 따라 남자아이는 빨간 고추를 여자아이는 솔가지를 함께 엮어 걸어둔다.
  • 전국

    은으로 배씨(梨種子) 모양을 만든 댕기, 배씨댕기
    배씨댕기는 여자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사용한 댕기이며, 은으로 배씨(梨種子) 모양을 만들고 그 위를 칠보로 장식한다. 주로 3~4세의 어린아이가 머리장식으로 사용한 댕기로 머리카락이 아직 한 줌이 채 되지 않는 어린아이들이 착용하였다. 배씨댕기는 댕기 위에 사각형이나 마름모, 또는 원형의 비단·전(氈)·융 같은 천 위에 은이나 유리로 여러 모양을 만든 장식을 얹은 것이다. 그리고 양편에 가늘게 보조댕기를 달아 중앙에 배씨를 놓는다. 그런 다음에 양편으로 가른 머리를 배씨댕기와 바둑판처럼 나누어가면 같이 연결한다. 이렇게 배씨댕기로 짧은 머리를 고정하고 앞가르마를 장식하였다. 배씨댕기는 생애 첫 장신구로 아이의 건강과 행운을 빌어 병마를 피하고, 액운을 막기 위한 주술적 의미도 포함되었다.
  • 전국

    깃이 달리지 않은 아기 저고리, 배냇저고리
    배냇저고리는 태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갓난아이를 씻기고 입히는 옷으로 깃과 섶을 달지 않은 아기의 저고리를 말한다. 배냇옷 또는 깃저고리라고도 한다. 배냇저고리의 형태는 우리나라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일반 저고리와 달리 길과 소매, 옷고름뿐이며 색이나 재료와 바느질도 매우 단순하며 엉성하지만, 실용과 과학, 합리성을 담고 있다. 또한, 배냇저고리는 많은 의미와 상징을 지니고 있어 옛 우리 가정에서는 이를 귀히 여겨 보관하는 습속이 있었다.
  • 전국

    까치설빔으로 어린이가 입는 오방장두루마기
    까치두루마기는 까치설날 아이들이 까치설빔으로 입는 옷으로 오색 옷감으로 지은 두루마기를 말하며 오방장(五方丈)두루마기라고도 한다. 까치두루마기의 형태는 다섯가지 색으로 만들어졌으며, 섶이나 길과 무는 같거나 다른 색으로 하였으나 대부분 오방색 중앙을 차지하는 황색으로 겉섶을 만들고, 길은 연두색으로 만든다. 남자아이는 깃과 옷고름인 돌띠, 남자아이는 깃과 옷고름인 돌띠와 끝동의 색은 남색, 무는 자색으로 하였다. 반대로 여자아이는 깃과 옷고름인 돌띠, 끝동의 색을 홍색·자색으로, 무는 남색으로 하였다. 이처럼 까치두루마기는 검은색을 제외한 고운 색으로 소매와 길을 만들었다. 이는 오방색을 통해 길상(吉祥)의 기(氣)를 받아 부귀영화와 장수를 누리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부패정치와 외세에 맞서다

조선을 뒤흔들었던 사건 중 하나인 동학농민혁명, 포악한 관리와 외세의 수탈에 맞서 봉기한 농민들의 함성은 한반도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포악한 관리와 외세의 극악무도한 횡포에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 조직을 이용해 부대를 편성하였고 봉기를 촉구하였으며 그 결과 농민군들은 파죽지세로 전라도 일대를 누비며 북상하였습니다. 그 기세는 진압군들조차 겪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였고 이에 조선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들어주겠다 약속하였고 농민군은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허나 그 약속은 일본군에 의해 짓밟히게 되었고 또다시 농민들은 들끓는 마음으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나 신식 무기 앞에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패하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꺾이지 않은 마음이었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불합리함에 맞서 싸우는 용기, 그 용기와 희망이 조선의 개혁과 의병 전쟁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의로운 깃발을 들고 여기에 이른 것은 안으로는 못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외적을 내쫓고자 함이라."

우리 모두 그 용기를 이어받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성공으로 가는 과정과 마음만을 생각하며 희망찬 앞날을 꿈꿔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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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군산시

    1927년 전북 옥구 이엽사농장 소작농의 농민 항일항쟁과 시위지
    옥구소작쟁의(沃溝小作爭議)는 전라북도 옥구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의 소작 농민들이 일본인 지주의 살인적인 소작료 수탈에 대항하여 일으킨 1920년대 대표적인 피식민지 농민항쟁이다. 소작쟁의는 소작농이 결성한 옥구농민조합을 중심으로 일본인 식민농업회사인 이엽사와 이를 감싸는 일제의 공권력에 항의하여 1927년 8월부터 11월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 경북 >구미시

    두 개의 큰 바위가 있었던 구미 쌍암 고택
    구미 쌍암고택은 조선 영조시대 진사 최광익(1731~1795)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반가이다. 쌍암고택은 고택 부근에 큰 바위 2개가 있어서 이름 붙여졌다. 쌍암고택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사당의 차례로 자리하고 있다. 쌍암고택은 유일하게 남향으로 자리 잡은 사랑채를 빼고 모두 동향으로 지어졌다. 또한 쌍암고택을 통해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과학성과 실용성을 엿볼 수 있다.
  • 전북 >정읍시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라북도 정읍하면 ‘동학농민혁명’이 떠오른다. 당대 부조리한 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 노력한 농민들의 함성을 정읍에서 생생하게 들어보자.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부 만석보’, 황토현전투의 장소 ‘황토현’, 전봉준 고택 ‘녹두장군 옛집’ 등 동학농민혁명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 흔적을 기념관에 담아내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역사적 사건을 상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관람객에게 전시, 교육, 유적지 답사 등을 제공하고 있다.
  • 경남 >양산시

    윤복이, 양산농민시위 중 총을 맞다
    윤복이는 일본 지주, 동양척식회사들이 소작인을 착취하는 것에 항거해 농민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인물이다. 그는 1931년 양산농민조합이 결성되자 농민의 권익을 위해 조합원으로 가입한다. 그는 소작료를 4할로 낮추고, 마름 제도를 없애고 소작권을 지주나 마름이 횡포를 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합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경찰이 이유 없이 조합 간부 17명을 검거하고 양산농민조합을 탄압하자, 조합원 300 명과 함께 양산경찰서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 전북 >정읍시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김개남
    김개남은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주역이지만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에서 활약한 공적과는 별개로 탐관오리들을 잔혹하게 죽이거나 처벌한 잔인한 사람,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청주성을 공격하는 개별행동을 해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게 한 사람 등의 부정적 평가에 가려져 있다.
  • 경기 >파주시

    동학농민군이었다가 농민의병으로도 항쟁한 김수민
    김수민은 한말 후기 의병기에 경기도 동북부 지역의 항일의병투쟁을 주도한 의병장이다. 그는 동학농민항쟁에 참여한 바도 있는 농민으로서 의병전쟁에 농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었으며, 무기를 제조하거나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일본군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1908년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도 참여하였으며 경기도와 강원도, 황해도 일대를 옮겨다니며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 전북 >정읍시

    동학농민군이 첫 승리한 정읍 황토현 전적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는 황토현이라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1894년 고부군수의 학정에 대항한 동학농민군들이 전라감영군과 맞서 싸운 곳이다. 전라감영군과 접전을 벌이던 동학농민군은 거짓 패한 척하며 황토현에 진을 쳤고, 뒤따라와 황토현 인근에 진을 친 전라감영군을 기습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동학농민군은 호남지방을 석권하게 되고 동학농민운동도 확대되었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정읍 황토현 전적은 1981년 사적 제295호로 지정되었다.
  • 충남 >논산시

    동학농민군의 피로 물들었던 충남 논산의 황화산성
    충청남도 논산시 강화동과 등화동 경계에 있는 황화산에 황화산성이 있다. 황화산성은 백제 때 만들어진 토성으로 당시 사비성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이었고, 조선 시대에 이르러 봉수대로 이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현재는 이곳에서 매년 ‘황화산성 봉화제’가 개최되어 마을주민의 화합과 논산시민들의 건강을 기원하고 있다.
  • 경남 >하동군

    동학농민군의 항일전쟁 유적지인 경남 하동의 고성산성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의 고성산에 고성산성이 있다. 고성산성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동학혁명 때 진주를 중심으로 모여든 경남 서부지역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95년 고성산성에 동학농민군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학혁명위령탑이 건립되었고, 이 위령탑에서 매년 11월 11일 11시가 되면 동학혁명군 위령제가 열린다.
  • 충남 >공주시

    동학의 우금치 전투를 기리는 공주 우금치전적 동학혁명군 위령탑
    공주 우금치 전적 동학혁명군위렵탑은 충청남도 공주 금학동에 위치하고 있고 사적387호로 지정됐다. 전봉준은 일본의 만행을 두고보지 못해 2차 봉기를 일으켰고, 1894년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죽검으로 대항한 농민들은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에게 전멸당했다. 1973년 동학혁명군 위령탑 건립위원회에서 동학혁명군 전적비를 세웠고, 동학농민혁명 100년이 지난 1994년에야 우금치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참 맛있는 여행, 거제

푸르른 5월, 날이 좋은만큼 콧바람을 쐬러 어디든 떠나고 싶어집니다. 날이 좋은데 집에만 있기엔 심심하신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저와 함께 거제로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수많은 여행지 중 왜 거제인지 물으신다면 응당 답해드리는 게 맞겠죠! 지금부터 거제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말씀드릴 테니 하나도 놓치지 마세요!

밥심으로 살아가는 민족에게 있어 맛집 탐방은 빼놓을 수 있는 취미생활 중 하나입니다. 맛집 탐방에 진심인 분들에게 거제는 흥미진진한 여행지가 될 텐데요. 풍부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췄으며 오직 거제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향토 음식이 즐비해 있기 때문이죠!

거제 9미라 불리며 입맛을 사로잡는 음식들은 맑은 해산물을 가미하여 소박하지만, 그 참 맛은 제일이랍니다.

거제 9미에 대해 살짝 살펴본다면 거제의 특색이라 해도 손색없을 성게, 멍게 비빔밥인데요. 청정지역인 거제에서만 해녀들이 직접 잡은 성게로 만들기 때문에 특유의 향과 맛이 일품이랍니다. 다음으로는 봄의 나른함을 쫓아줄 도다리쑥국입니다. 담백한 맛의 도다리와 향긋한 향의 봄 제철 식품인 쑥의 조합으로 한번 먹으면 잊지 못할 맛을 선사해줍니다~ 맛있는 여행 거제에서 바로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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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거제시

    겨울 남해의 방파제 낚시로 맛보는 호래기(꼴뚜기)회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 이 말은 꼴뚜기가 얼마나 볼품없는 생선으로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명백히 드러내는 속담이다. 그러나 꼴뚜기는 그런 취급을 받을 생선이 아니다. 남해안에서는 통칭 ‘호래기’라고 부르는 꼴뚜기는 아직 양식이 안 되기에, 가격이 비싼 고급어종에 속한다. ‘경남의 진주’라고도 불리는 꼴뚜기는 경상남도의 초겨울, 통영과 거제의 방파제 및 수산시장에서 맛볼 수 있다. 아는 사람들만 즐긴다는 호래기 낚시와 호래기 회는 재미와 별미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 경남 >거제시

    자연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거제 장승포항
    경상남도 거제시 장승포동에는 국제 개항장인 장승포항이 있다. 장승포는 거제도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날이 맑으면 바다 건너 일본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 1889년(고종 26년)에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으로 일본 어민이 대거 이주해와 마을을 형성했다. 1930년에 방파제를 쌓으면서 어항과 무역항으로 발전했다. 1965년 6월 개항장이 된 후 인근에 대우조선공업의 옥포조선소가 만들어지면서 크게 발전했다. 부산과 장승포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장승포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연륙되면서 지금은 여객선이 한려수도 해상 관광 유람선을 운행하여 해상 관광 도시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 경남 >거제시

    바다의 맛과 향을 비벼보자, 거제도 멍게비빔밥
    멍게비빔밥은 살짝 얼린 멍게젓갈에 밥과 함께 김 가루, 참기름, 야채 등을 넣어 비빈 요리로 경상남도 거제도의 향토음식이다. 주재료인 멍게젓은 멍게의 살로만 만드는데, 멍게 특유의 향과 단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멍게비빔밥을 먹을 때는 일반적으로 고추장을 첨가하지 않는다. 멍게젓 자체에 양념이 배어 있기도 하고 고추장이 멍게 특유의 향과 맛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경남 >거제시

    조개를 회로 먹는다고? 왕우럭조개
    이름에 접두어 ‘왕’이 붙을 때에는 유별나게 크거나 특출난 것을 표현한다. 뚜껑이 유별나게 커서 왕뚜껑, 중국집의 왕짬뽕, 어린시절 추억의 간식 왕밤빵까지... 개체중에 특출나게 큰 것은 왕건이 잡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크기 자랑은 거제도 앞바다에도 있으니, 그 이름 왕우럭조개다. 못해도 성인 주먹보다 크고, 특출나게 큰 녀석은 사람 얼굴만 한다고 하니, 과연 ‘왕’의 자리에 오를 만하다. 커서 회로 먹어도 충분한 살이 나오는 조개. 거제도의 명물 왕우럭조개를 만나보자.
  • 경남 >거제시

    수정같이 솟아있는 거제 옥산성
    거제 옥산성은 경상남도 시도기념물 제10호로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수정봉 정상 부분에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수정봉성이라고 불리는 옥산성은 게제도의 옛 치소 뒷산에 있는 산성으로 거제도에서 제일 높은 계룡산에서 거제면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 부분에 있다. 그리하여 옥산성에 오르면 멀리 한산도가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서쪽 방향이 트여있어 산성지로 적합한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 경남 >거제시

    일제강점기 대량생산된 마른멸치
    조선시대부터 멸치는 삶은 것을 말려서 유통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어민들이 한반도 해안가에 이주하고 개량된 장비로 많은 멸치를 잡으면서 마른멸치는 대량생산되었다. 경남의 멸치어장은 거제도, 욕지도, 진해만, 남해도, 사랑도, 울산만 등이고, 전남의 멸치어장은 거문도, 추자도, 제주도, 태랑도, 소안도, 흑산도 등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어장은 경남 거제도, 진해만, 욕지도, 사랑도, 거문도, 제주도 등이다. 통영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마른멸치를 일본이나 중국으로 유통시키는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 경남 >거제시

    진해만의 대구 잡이
    대구포는 대구를 말린 것으로 밑반찬이나 제사음식으로 쓰였다. 대구포를 만드는 대구어는 경남 창원 인근의 진해만이 최대 어장이다. 진해만에 있는 대구어장의 중심은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이다. 1979년 무렵에는 어민 450여명이 60여척의 배로 대구를 잡을 정도였다. 한반도의 대구어는 동해 계통 대구어와 서부 황해계통의 대구어로 나뉜다. 황해방면의 대구어는 체형이 왜소하고 동해계통 대구어보다 맛이 떨어진다. 진해만의 대구어는 동해 계통 대구어가 산란을 위해 왔다가 잡히는 것이다.
  • 경남 >거제시

    잠수복을 입고 전복을 캐는 거제의 ‘모구리어업’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장동마을에는 모구리가 많다. 모구리는 잠수부를 일컫는 말로, ‘머구리’라고도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어패류를 채취하기 위해 조선으로 밀려 들어온 잠수기 업자들이 침탈적으로 어로행위를 이어 나갔다. 급기야 남획으로 인해 수산자원을 보호하려 어업을 통제해야 했다. 해방 이후 일본인 소유였던 잠수기어선이 귀속재산으로 처리되면서 초기 잠수기어업이 시작되었다. 전국에서 잠수기어업이 이루어지지만 그중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거제 장목항이다. 장목항 주변의 저도 어장은 천혜의 자원 보고로 많은 잠수기어선이 모여든다. 거제 어장에서는 개조개, 바지락, 왕우럭 등을 주로 채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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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타고 함흥에서 흥남으로, 흥남에서 뱃길로 거제도까지
    이장영(남·1940년생)현 거제도민회회장이다. 유서깊은 개신교 목사 집안 출신으로, 목사였던 부친이 흥남철수 작전을 기획하고 준비한 현봉학(의사)을 도와 당시 미사령관이었던 알몬드 장군을 강하게 설득했다고 한다. 교인인 가족들은 남은 사람 없이 피난을 나와 함흥에서 흥남으로 기차를 타고 왔고 부두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까지 와서 피난살이를 하였다.
  • 경남 >거제시

    경남 거제의 삼 삼으며 부르는 줌치타령
    경남 거제시에는 삼을 삼으며 부르던 노래로 줌치타령이 전승되고 있다. 삼삼기는 여성들의 노동이었기 때문에 「삼삼는소리」 또한 여성노동요라고 할 수 있다. 본디 줌치타령은 노래 자체를 즐기는 가창유희요이나 삼삼기의 고됨과 지루함을 잊기 위해서도 불렀다. 줌치 즉 주머니를 짓는 재료부터 주머니를 지은 방법, 주머니를 매개로 한 남녀 간의 구애 행동을 가사에 담아내고 있다.

땅끝마을에서 즐기는 진미

전라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해남은 해양도시로 대표적인 관광지로 손꼽히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해남은 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있어 낙조와 일출이 매우 아름다우며 풍부한 먹거리와 볼거리로서 여행객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볼거리도 중요하지만 먹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데요. 해남은 해남 8미로 해남을 대표하는 맛인 음식들이 있으며 보리쌈밥, 떡갈비, 삼치회, 생고기 한정식, 황칠오리백숙 등으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어 맛여행을 즐기기에도 손색이 없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해남 8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해남 8미 중 봄철 가장 사랑받는 음식은 봄 산행 후 먹는 보리밥과 산채정식, 닭 한마리로 몸을 보양하는 닭오리코스요리입니다. 날 좋은 봄에 산행하고 내려와서 먹는 보리밥과 떨어진 체력을 올려줄 닭오리 코스라니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네요~ 사시사철 풍성한 먹거리가 생산되는 해남에서 육해공을 맛보지 못한다면 후회할지도 모르니 해남 8미를 맛보며 새로운 맛과 여행의 즐거움을 함께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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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해남군

    '제국의 불빛'에서 희망으로, 해남 구 목포구 등대
    해남 구 목포구등대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을 돕는 ‘제국의 불빛’으로 건립되었다. 원통형 콘크리트로 지어진 구 목포구등대는 비례 균형이 뛰어나 후대 등대 건축의 표본이 되었다. 목포항~다도해를 항해하는 선박들은 1세기가량 구 목포구등대의 안내를 받아 거센 바닷길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 전남 >해남군

    봉황의 왼쪽 날개를 닮은, 해남 주작산의 작천소령
    작천소령은 일명 쉬양릿재라고도 한다. 작천소령은 강진군 신전면 수양리와 해남군 옥천면 용동리에 걸쳐 있는, 주작산(朱雀山, 428m)에 있는 고개이다. 산의 형상이 봉황이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주작산이라 한다. 작천소령은 주작의 좌측 날개에 해당한다. 그 의미는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쉬양릿재는 수양리에 있는 재라는 뜻이다. 산이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을 형성하고 있어서 암릉(巖陵)이란 표현을 쓰는데, 산 능선마다 모양이 다르고 기암이 있으며, 그 사이로 피어나는 꽃은 바위와 조화를 이루어 더 멋진 고개를 만든다. 작천소령은 기온이 따뜻해 주변에 양란을 재배하는 사람들이 많아 비닐하우스가 죽 이어져있다.
  • 전남 >해남군

    이광사의 필체로 다시 걸린 전남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 자락에는 대흥사라는 사찰이 있다.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쓴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렀다가 대웅보전의 글씨를 보고 못마땅해 하며 이광사의 현판을 내리고 자신이 쓴 글씨로 걸게 하였다. 후에 유배를 마치고 많은 깨우침을 얻은 김정희는 지난날을 후회하며 자신이 쓴 현판을 내리고 원래 있던 이광사가 쓴 현판을 걸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 전남 >해남군

    넉넉한 보물창고 3칸 곳간이 있는 해남 민정기 가옥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민정기 가옥은 민정기의 6대조인 민형현(閔亨顯)이 1807년(순조 7) 건축한 가옥이다. '청사정'이라 이름 붙은 사랑채는 여흥 민씨가 1670년대 지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의 사랑채는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민정기 가옥에는 곳간이 초가 3칸인데 벽면과 문짝을 판자로 붙여 놓았다. 곳간의 규모로 보아 중요 보관물품이나 식량이 꽤 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크기이다. 민정기 가옥은 1992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 전남 >해남군

    미황사의 풍경소리 들리는 해남의 달마산
    달마산(達摩山)은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에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해발 489m 높이의 명승 제59호로 지정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이 곳에는 신라시대 의조(義照) 화상이 창건한 천년 고찰 미황사(美黃寺)가 있고,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도솔암(兜率庵)이 있다. 땅끝마을에서 사자봉을 지나 도솔산으로 이르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경관을 목격할 수 있다. 귀래봉(471m)과 도솔봉(421m) 등이 모두 절경이다.
  • 전남 >해남군

    국토최남단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땅끝해넘이해맞이 축제'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의 땅끝마을은 한반도의 최서남단으로, 삐죽하게 바다로 내민 땅끝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동시에 할 수 있다. 땅끝전망대 및 땅끝탑은 국토의 끝이자 한반도의 땅끝이므로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최적의 장소로 손꼽힌다. 땅끝마을은 한해를 보내는 해넘이와 새해를 보내는 해맞이 축제를 통해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고자 축제를 벌인다. 해를 보며 기올리기, 달집태우기, 소원탑쌓기, 소원띠, 해맞이제 등을 통해 한 해를 의미있게 시작할 수 있다.
  • 전남 >해남군

    공룡, 익룡, 새발자국이 한 지층에서 만난 해남 우항리의 ‘해남공룡박물관’
    벽을 뚫고 공룡 두 마리가 나타났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빠진다.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487호로 지정된 ‘해남 우항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에 위치하고 있는 전라남도 해남의 핫플레이스 '해남공룡박물관'이다. 2007년 4월에 문을 연 박물관은 세계 최초로 같은 지층에서 공룡, 익룡, 새 발자국이 발견된 곳을 보존하고 연구, 전시 교육하고 있다. 또한 국내 최대 규모의 공룡테마파크를 조성해 생생한 공룡의 세계로 관람객을 안내하고 있다.
  • 전남 >해남군

    역사와 문화를 품은 백 년 술도가, 해남 해창주조장
    ‘해창주조장’은 1927년 시바다 히코헤이(柴田彦平)라는 일본인 사업가가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해창리 6-2에 정착한 이후 건축한 일본식 정원을 갖춘 주택에 거주하면서 일본식 청주인 정종(正宗)을 빚으면서 시작한 양조장이다. 해방 이후 직원이었던 장남문 씨가 불하받아 거주하면서 1961년부터 집 옆에 양조장 시설을 하여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강진군에서 양조장을 하는 황의권 씨가 인수하여 30여 년간 운영하다가 2008년 현재 해창주조장의 4대 주인이 되는 오병인 씨가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해창주조장은 각종 일본식 건축물과 정원을 갖춘 근대 문화유산이자 오병인 씨가 개발한 ‘프리미엄 막걸리’로 소문난 관광명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 전남 >해남군

    왜군 장수의 애인이었던 어란이 묻힌 전남 해남의 여낭터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는 여낭터가 있다. 여낭터는 어란이라는 여인과 관련된 지명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수군이 어란리에 주둔할 때 왜군 대장은 어란이라는 기생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왜군 대장이 명량으로 출발할 날짜를 어란에게 누설하게 되고, 어란은 잡혀 와 있던 포로 김중걸에게 이를 알렸다. 김중걸이 이순신에게 이 정보를 전해 명량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어란은 왜군 대장이 죽게 되자 자신도 따라 죽었고, 어부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었다. 어란의 시신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에 묻혔는데 이곳을 마을 사람들은 ‘여낭터’라 부른다고 한다.
  • 전남 >해남군

    춤과 노래가 다양하게 어우러진 연희, 해남강강술래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서 전승되는 강강술래는 여성들의 놀이로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 그리고 여타의 지역, 가령 완도와 무안 등의 강강술래와 달리 다양한 놀이가 체계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활발하게 전승 중이다. 해남강강술래는 중강강술래를 비롯해 진강강술래, 자진강강술래, 남생아 놀아라, 고사리 껑자, 청어엮지, 청애풀지, 지와밟기, 덕석몰기와 풀기, 진주새끼와 꼬리따기, 문지기놀이, 가마타기놀이, 끝내기강강술래, 손잡기강강술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 과정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춤과 노래는 해남강강술래의 또 다른 매력이라 할 수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힐링 되는 양평

산과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 양평, 양평은 서울 근교에 위치해있어 힐링다운 힐링 여행을 즐기기에 편한 여행지입니다. 양평 하면 먼저 떠오르는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자 한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와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자아내는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으며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남한강 자전거길에서 자연의 향기를 느껴봅시다. 햇살이 일렁이는 날,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함께 자유로움을 느껴보세요~ 한껏 신나게 자전거를 탔다며 용문산 자락에 자리 잡은 쉬자파크에서 휴식을 누리세요, 깨끗한 숲과 맑은 공기, 체험과 교육이 함께하는 전국 최초 산림문화 휴양단지랍니다. 정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암벽등반 시설, 카페 등 다양한 공간이 즐비해 있으며, 독특한 테마로 꾸며진 산책로는 이목을 끄는 데 한몫합니다. 자연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양평에서 진정한 힐링을 경험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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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양평군

    양평출신 의병장들의 묘역
    양평의병장들의 묘역은 모두 양동면 출신으로서 이른바‘지평의병’을 대표하는 안승우, 이춘영, 김백선등이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킨 후, 원주‧충주성 등을 점령하며 위세를 떨치고 장렬히 최후를 맞이한 의병장들의 묘소이다. 묘역 내에는 묘비 및 을미의병추모비, 그리고 의병장들의 어록비가 조성되어 있다.
  • 경기 >양평군

    양평의병을 기리는 양평 을미의병기념비
    양평 을미의병기념비는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화서학파의 문인인 이춘영·안승우 등과 김백선을 주축으로한 포수 400여명이 의병을 일으킨 것을 기념하는 비이다. 이들은 1896년 1월 12일 원주의 안창리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이 비는 양평의병이 일어난지 100주년을 기념하고 의병들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양평문화원을 중심으로 1996년에 세웠다.
  • 경기 >양평군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 양평 ‘두물머리나루’
    경기도 양평군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한강이 되는 곳이다. 두 개의 물줄기로부터 많은 물산이 두물머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곳을 거쳐 서울 뚝섬나루와 마포나루로 옮겨 갔기에, 두물머리는 한강으로 들어가는 물산의 집산지였다. 조선시대 정조가 화성행궁으로 갈 때면 세미원과 두물머리에 배다리를 만들어 건넜다고 하는데, 이 배다리는 두물머리 인근에 묘소를 쓴 다산 정약용이 설계했다. 1973년 팔당댐이 건립되어 강항(江港)의 물류가 줄고, 나루터 주변은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어로와 선박 건조와 운행 등의 행위 등이 모두 중단되었다. 1990년대까지 간혹 나루가 운행되었으나 그 후로 나루터 기능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풍광이 좋은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양평군 양수역에서 출발해 두물머리 나루 주변을 돌아본다 하여 ‘두물머리 물래길’이라 이름 붙인 산책길로 유명세를 얻고 있다.
  • 경기 >양평군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 5리 두물머리 도당제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5리 두물머리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 두물머리 나루터의 느티나무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것을 두물머리 도당제라고 하였다. 도당제는 음력 9월1일에서 3일 중에서 좋은 날에 지냈으나 현재는 9월2일로 날짜를 정했다.
  • 경기 >양평군

    양평군 참전비
    지평리 전투에서 미 2사단 23연대와 배속된 프랑스 대대는 중공군 4차공세 때인 1951년 2월 중공군 3개 사단 규모의 집중공격을 16:1의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막아 내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UN군에게 안겨준 최초의 전투이다. 그리고 UN군이 결정적으로 2차 반격작전의 토대가 되는 계기가 되었고, 대표적인 ‘사주방어(All Around Defence)' 전투로 2차 세계대전의 ‘벌지전투’와 함께 평가 받고 있다.
  • 경기 >양평군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
    과거에는 용문사의 은행나무에는 은행이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의 원님이 용문사 주지승에게 은행을 납세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은행은 은행나무 앞 연못에 다 빠져 스님들은 동냥을 하러 다녔다. 달밤에 주지승이 바람을 쐬러 나왔다 초립을 쓴 어린아이를 만나 고민을 말했다. 어린아이는 고민을 듣고 은행나무에 은행이 안 열리게 해주겠다고 하고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다음 해부터 은행이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은행이 열리고 있다고 한다.
  • 경기 >양평군

    조계종 사찰로 정각사로 개조된 양평 창대리 고가
    경기도 양평 창대리 고가는 일명 ‘김정식 고가’라고도 하며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뒤는 숲, 앞은 넓은 농지로 동남향의 이상적인 방위를 택해 집을 건축했으며, 전체적으로 튼‘ㅁ’자 형태를 이룬다. 1995년 사찰로 개조된 이래 현재까지 대한불교 조계종의 정각사(正覺寺)로 이용되고 있다.
  • 경기 >양평군

    고종의 하사금으로 지은 양평 김병호 고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오촌리에 있는 양평 김병호 고가는 고종 때 내시였던 김병호가 임금이 하사한 돈으로 지은 집이다. 본래 99칸이었다고 하나 일제강점기 때 지금의 안채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용문사를 지은 대목수가 지었다고 하며,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한옥의 모습이지만, 사당방이 안채에 부설된 특이한 집이기도 하다.
  • 경기 >양평군

    프랑스군 본부가 되었던 100년 술도가, 양평 지평양조장
    경기도 양평 지평양조장은 1925년 설립되었고, 양조장 건물은 1939년 지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환기를 위해 지붕에 높은 창을 낸 지평양조장은 1951년 2월 프랑스군의 지휘 본부의 역할을 잠시 해야 했다. 근방에서 지평양조장보다 나은 지휘소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화약 연기가 사라지고 다시 술을 빚기 시작한 지평양조장은 100년 된 옛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로, 전통방식을 이어가려 애쓰며 막걸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평양조장의 지평막걸리는 전국적으로 애주가들이 찾는 막걸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경기 >양평군

    바위틈에서 흘러 나온 지장수, 양평군 단월면의 석간수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석산리에 석간약수터가 소재해 있다. 일반인들은 석간수라고 부른다. 석간수는 소리산과 봉미산의 능선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나는 약수다. 바위 사이에서 흐르는 석간수이며, 바위 사이에 꽉 찬 ‘진찰흙’을 통과해서 흐르기에 지장수이기도 하다. 석간약수터는 양평 소리산 들머리를 가는 큰길 옆에 위치해 있어서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 석간수는 장기간 보관해도 이끼가 끼지 않으며, 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멀리서도 석간약수터를 찾기도 한다.

횡성에서 맛보이소

예쁘게 핀 꽃들과 포근한 햇살이 내리쬐는 이 계절, 봄의 에너지가 넘쳐나는데요.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설레이는 기분이 느껴지는 나날들! 이 설렘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면, 팔색조의 매력으로 오랜 기억이 될 여행지인 횡성으로 떠나보세요~ 횡성은 소들을 방목하며 키울 수 있는 자연조건을 통해 맛 좋고 품질 좋은 한우를 생산해내어 명품 한우의 고장으로 불리고 있는데요. 한우가 유명한 특산물인 만큼, 한우체험관을 개관하여 한우에 대해 알아볼 수 있으며, VR 체험까지 가능해 아이들과도 함께 가기 좋은 여행지입니다. 또한 산간지방으로 청정자연을 보여주는 횡성에서는 보다 짙은 향은 물론 아삭아삭한 식감으로 입맛을 살리는 더덕까지 맛볼 수 있답니다~ 한우와 더덕만으로도 이미 맛있지만, 밥과 함께 먹으면 더욱 궁합이 잘 맞죠! 밥의 경우 어떤 쌀을 이용하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데요. 횡성의 쌀은 임금님께 진상할 정도로 맛과 품질이 매우 뛰어나 윤기가 흐르고 차진 맛이 특징이랍니다~ 맛있는 음식+ 맛있는 음식의 조합, 안 먹어볼 수가 없겠죠! 지금 당장 횡성으로 떠나 맛여행을 즐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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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장수군

    빨간 컬러푸드의 건강함을 담은 '장수 한우랑사과랑축제'
    장수한우랑사과랑축제는 한우, 사과, 오미자, 토마토 등 빨간색(red color) 농산물을 특성화한 차별화된 축제이다. 장수군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장수한우랑사과랑축제는 2007년 처음 시작되었으며, 매년 9월에 장수군 의암공원과 누리파크 일원에서 개최된다. 한국 최대 규모의 한우 셀프시식 프로그램 장수한우마당이 운영되며, 적과의 동침, 레드조각 맞취기, 레드푸드 릴레이 등 색깔을 주제로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 강원 >횡성군

    명품 횡성한우 먹으러 오세요~ '횡성한우축제'
    강원도 횡성지역에서는 1995년부터 한우의 명품화 작업을 시작하여, 횡성한우는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우 브랜드가 되었다. 횡성한우축제는 횡성한우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 2004년부터 기존의 ‘횡성태풍문화제’의 명칭을 변경하여 새로운 목표와 주제를 가지고 개최되고 있다. 횡성한우축제의 주요행사는 크게 ‘먹을거리마당, 즐길 거리마당, 볼거리마당, 지역홍보마당’ 등으로 나뉘는데, 핵심은 ‘먹을거리마당’이다.
  • 강원 >횡성군

    선돌에 갓을 씌워 부자가 망한 횡성군 입석리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입석리(立石里)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옛날 박수인이라는 큰 부자가 살았다. 그런데 손님이 너무 많아 며느리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낯선 스님이 손님으로 오자 며느리는 손님이 적게 오는 방도를 구하였다. 스님은 망설이다가 며느리가 하도 졸라대 마을 앞에 있는 선돌에 갓을 해 씌우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했더니 손님이 안 드는 것은 물론 재산도 없어져서 망했다.
  • 대구 > 달성군

    소고기 느낌을 주는 현풍시장 수구레국밥
    쇠가죽에서 벗겨 낸 질긴 고기를 ‘수구레’라고 한다.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위치한 현풍시장이 수구레국밥으로 유명하다. 수구레는 서민들에게 소고기 느낌을 주는 최고의 영양공급원이다. 고기 값이 비싸던 시절 서민들은 상대적으로 값이 싼 수구레로 단백질 보충을 하기도 하였다. 수구레는 잘 끓이지 않으면 질겨서 먹기가 어렵기에 오랫동안 수구레를 다룬 경험이 있어야 음식을 제대로 할 수 있다.
  • 강원 >횡성군

    동대문 밖 가장 큰 시장이라 불리던 횡성장
    횡성장은 강원도 서남부 지역에 있는 횡성군 읍소재지에서 열리며, 횡성시장과 5일장으로 구분된다. 횡성시장은 상설시장이고, 횡성5일장은 매월 1일과 6일 열리는 정기시장이다. 횡성장 가운데 ‘신토불이장’은 횡성군 관내의 농민들이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팔거나 살 수 있는 공간이다.
  • 대구 >달서구

    소고기로 끓인 보신탕, 대구 육개장
    대구 육개장은 소의 양지머리나 사태 등을 큼직하게 썰어서 고사리, 대파, 토란 대 등과 함께 고추기름, 마늘, 후추 간장 등 갖은 양념을 하여 얼큰하게 끓여낸 여름철 보양식이자 대구광역시의 향토음식이다.
  • 강원 >횡성군

    7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는 횡성 칠우고개
    칠우고개는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반곡리 무리개에서 원주시 호저면 광격리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옛날에는 고개를 홀로 넘으면 도적이 나타나 물건을 빼앗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관아에서는 고개 아래에서 7명이 모인 후에 고개를 넘도록 했다. 그렇게 7명이 모여서 고개를 넘으니 도적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마을에서는 7명이 함께 넘는 고개라 해서 칠우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 경기 >광명시

    광명 새서울정육점, 2대째 고기 명가(名家)의 꿈을 이루어 가는 가게
    새서울정육점은 경기도 광명시 광명3동 광명 전통시장 내에 있는 41년의 역사를 지닌 오래된 가게이다. 1980년 창업주 강연형 씨가 개업한 이래 서울로 출퇴근하는 지역주민의 편의를 고려하여 새벽 5시부터 자정까지 영업하였다. 손님들에게 좋은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의 우시장을 발품을 팔며 찾아다니기도 했다. 지금은 창업주의 아들 강호진 씨가 3대 대표로 가업을 계승하여 최상급의 한우와 돼지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애썼던 부친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 광주 >서구

    청정 한우의 본연의 맛을 그대로 즐긴다, 광주 생고기
    광주 생고기는 신선한 한우의 우둔살을 곱게 썰어 기름장 등에 찍어 먹는 광주광역시의 향토음식이다. 생고기 식용의 전통은 중국의 유교경전인 『맹자(孟子)』에 '회자(膾炙)'라는 말로 언급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회자에서 ‘膾’는 생고기를 말하며 ‘炙’는 익힌 고기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광주 생고기는 육고기 회(膾)의 원형을 제대로 계승한 음식이다.
  • 울산 >울주군

    숯과 한우가 만나 탄생한 언양불고기
    언양알프스시장을 중심으로 한 대표적인 특산품이 바로 ‘언양불고기’다. 언양의 좋은 숯과 산지에서 키운 한우가 만나 언양불고기가 탄생하였다. 언양불고기가 유명해진 것은 1960년대부터다. 언양불고기는 석쇠불고기에 해당하며, 언양에서는 한두 마리 새끼를 낳은 암소를 도축한 지 24시간 이내에 조리한다. 또한 고기를 구울 동안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일산화탄소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 백탄을 사용한다.

달콤한 인생, 스윗하게 살자♬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어머, 당이 떨어져서 힘이 없다구요? 걱정하지마세요~ 오늘은 지역N문화와 함께 달달한 이야기 같이 살펴보면서 당 충전 빵빵!하게 해볼거에요. 달콤 쌉쌀한 초콜릿도 있고, 고소고소한 과자도 있고, 시원하고 달달한 아이스크림도 있어요. 아이스크림은 어떤 맛으로도 변할 수 있어 그 매력이 변화무쌍하답니다~ 잠깐! 달달구리의 원조 '설탕'이 빠질 수 없어요. 설탕은 그 형태가 다양해서 많은 분야에서 사랑받고 있어요. 달콤함의 최고봉 설탕, 이제는 입이 아니라 눈으로도 먹을 수 있다는 점, 알고 계셨나요? 슈가크래프터의 손길에서 태어나는 설탕을 활용한 아름다운 음식부터 시작해 설탕이 들어가 제맛나는 양갱과 딸기잼까지! 이야기들이 정말정말 달콤해서 글을 읽는 사람의 기분마저 행복해질 것만 같아요~ 우리 같이 달콤한 인생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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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노원구

    기찻길 옆 행복한 아이스크림 가게
    경춘선 무궁화호가 달리던 낡은 철로주변은 '경춘선 숲길'로 변해 공원이 되었고 주변은 카페거리로 유명해졌다. 철길 건너편에는 터키에서 온 메흐멧 오즈 데미르씨가 운영하는 예쁜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이곳에서는 신선한 계절과일과 재료를 사용하여 맛 좋고 건강에도 좋은 아이스크림을 맛 볼 수 있다.
  • 관심지역 서울 >종로구

    그때 거기, 고소하고 달콤한 센베이과자
    센베이(전병, 煎餠)는 중국의 과자 ‘토우가시(唐菓子)’가 일본에 전래되면서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센베이의 기본재료는 밀가루 반죽이지만 국가나 지역에 따라서 재료와 만드는 방법에 차이가 있고 모양도 제 각각이다. 한국의 센베이는 밀가루와 설탕을 반죽하여 만들고 살짝 구부려진 둥근 모양이다. 경복궁역에는 50년 넘도록 센베이를 만들고 있는 과자 전문점이 있다. 이곳에서 따끈한 땅콩 센바이를 맛볼 수 있다.
  • 광주 >광산구

    삶의 경험으로 만든 알록달록 과일 연양갱
    우뭇가사리가 원료인 한천으로 만드는 연양갱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간식이다. 원래는 양갱은 양고기와 피를 굳힌 중국의 국물음식이었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팥을 이용한 과자가 되었다. 광주의 송정시장에는 각양각색의 과일을 넣어 다양하게 만들어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영양갱을 파는 가게가 있다.
  • 제주 >제주시

    껍질째 먹는 우도땅콩과 달콤고소한 땅콩아이스크림
    1986년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우도 땅콩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리나라 땅콩 농사의 명맥을 이어왔다. 값싼 미국산 땅콩에 대항해 장점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인 결과, 화산토가 많은 제주도의 지형을 적극 활용하여 껍질째 먹어도 되는 땅콩이 탄생했다. 2010년에는 제주 동부농업 기술센터 주도로 국내 최초의 땅콩 아이스크림이 개발되었다. 오늘날 우도 땅콩은 껍질째 먹을 수 있어 맛과 건강을 챙겨주는 효자 작물이자, 우도를 찾아가면 반드시 먹어봐야하는 별미인 땅콩 아이스크림으로 사랑받고 있다.
  • 서울 >마포구

    초콜릿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 쇼콜라티에
    쇼콜라티에는 초콜릿을 이용하여 인형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창의적인 예술품을 만드는 직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직업이지만, 유럽에서는 400년이 넘는 오래된 직업의 하나이다. 카사노바는 ‘작업용’으로 초콜릿을 이용하였다. 초콜릿을 이용해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쇼콜라티에는 여성들에게 유리한 직업이다. 우리나라에서 디저트 문화가 활성화된다면 유망한 직업 중 하나가 될 것이다.
  • 전국

    한겨울에 추위를 달콤하게 녹이는 엿치기
    엿치기는 가락엿을 부러트려서 단면에 난 구멍의 크기(또는 개수)를 견주는 놀이다. 엿의 구멍은 갱엿을 잡아 늘이는 과정에서 공기가 들어가서 생기는데, 표면이 거칠고 엿가락 측면의 줄무늬가 선명할수록 구멍이 클 가능성이 높다. 엿이 잘 굳는 추운 계절에 즐겨 놀았다.
  • 서울 >마포구

    설탕으로 하는 예술, 슈가크래프터
    슈가크래프터는 분말로 가공한 설탕을 재료로 반죽해서 케이크, 과자, 생활 소품 등을 등을 만드는 사람 혹은 직업을 말한다. 슈가크래프터는 설탕공예가, 슈가그래프트 아티스트라고도 한다. 주로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날을 위한 장식용 케이크를 만든다. 결혼식의 케이크나 부케, 돌잔치의 케이크 및 각종 장식품 등을 들 수 있다. 슈가크래프터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결혼과 파티 문화 속에서 발전한 직업으로 우리나라에는 해방 이후 일본에서 제빵기술을 배운 제빵기술자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발전은 2000년을 전후해서 시작됐다.
  • 강원 >인제군

    양봉기술의 새로운 도약, 꿀
    양봉은 벌을 길러 벌이 모은 꿀, 꽃가루, 로열젤리 등을 사람이 이용하는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한국인들은 양봉을 했는데 속이 빈 나무에 벌집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벌집은 개항기 이후 들어왔다. 개항기에 이태리산등 외국벌도 도입되어 근대적 양봉이 시작되었다. 벌은 큰 힘과 돈을 들이지 않고도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는 부업으로 권장되었다. 오늘날에는 부업에서 나아가 전문적으로 양봉을 하기도 하는데 꽃이 피는 봄이 되면 전국의 꿀이 많은 곳을 찾아 벌집을 이동하는 식으로 운영한다. 6.25 전쟁 이후 D.D.T가 살포되면서 익충이 많이 죽었다. 정부에서는 구호자금으로 벌들을 공급했는데, 과일과 곡식이 수정을 위해서였다. 오늘날 강원도 인제군 등 산림지역은 양봉의 적지로 주목된다.
  • 북한

    설탕, 대중화가 시작되다.
    설탕은 전근대기 한국에서 중국을 통해 소량 들어오던 귀중품이었다. 1921년 평양에 제당 공장이 설립되면서 한국에도 설탕이 대중적으로 보급된다. 설탕의 제조원료는 대만에서 수입한 사탕수수와 평안도와 황해도, 함경도 등지에서 재배한 사탕무였다. 일본인이 설립한 제당 회사는 설탕 판매 이익을 위하여 한국농민이 생산한 사탕무를 헐값에 사들여 원성을 샀다.
  • 전북 >전주시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선 제과 명가, 전주 PNB 풍년제과
    전주시 완산구 경원동의 ‘PNB 풍년제과’는 1951년 고(故) 강정문 씨가 완산구 중앙동에 ‘풍년 센베 과자점’이라는 상호로 문을 연 이래 3대에 걸쳐 대를 잇는 70년 역사의 오래된 가게이다. 1978년 현재의 경원동으로 가게를 이전한 이후 창업주의 아들 강현희 씨가 2대 대표를 맡아 운영하는 기간에 IMF 외환위기,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와의 경쟁, 상표권 분쟁 등 적지 않은 곤경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과감한 투자와 신제품 개발을 통해 2010년대 이후 다시금 명실상부한 전주시의 대표 제과점이자 전국적으로 알려진 제빵 명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창업주가 개발한 ‘땅콩전병’과 2대 대표가 개발한 ‘수제 초코파이’는 PNB 풍년제과를 반석에 올려놓은 대표적인 제품이다.

이야기로 보는 한국사 (인물편)

여러분은 우리가 왜 한국사를 공부해야 하는지 알고 계시나요? 단순히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시험 준비만을 위함일까요? 오늘은 우리가 한국사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해요! 우리 이런 말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말 다들 아시지요?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배우고,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였어요. 역사는 되풀이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한국사를 배움으로써 현재를 바라보는 눈을 키우고 사고력과 문제해결력을 향상하는 동시에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요. 마치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지표처럼 말이에요! 시인 윤동주는 이렇게 말했어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서시 中)"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과 고뇌, 그리고 자아를 끊임없이 성찰했던 윤동주를 보며, 우리는 그가 느꼈던 절절함에 공감하고, 현재의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하지요. 역사란 그런 거 같아요. 담겨있는 교훈 속에 나를 돌아보게 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게끔 도와주는 멘토 말이에요! 지금까지 한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는데요. 지역N문화만의 <이야기로 보는 한국사 (인물편)>을 시작으로 우리 함께 배움의 세계로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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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아산시

    신분의 한계를 이겨낸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은 충청남도 아산이 본관이다. 세종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과학기술을 배우러 명나라로 유학을 다녀왔다. 장영실이 귀국 후 세종은 그를 노비에서 해방시키고 벼슬까지 내려 주었다. 장영실은 세종의 지원과 신뢰하에 본인의 실력과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장영실은 최고의 발명품, 물시계 자격루와 해시계 앙부일구 등을 만들어내며 조선시대 과학기술 문화의 꽃을 피웠다.
  • 충남 >천안시

    조선시대 뛰어난 과학사상가 홍대용
    홍대용은 지구가 돈다는 지전설(地轉說)과 독창적인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실학자이다. 홍대용은 아버지 홍억(洪檍)의 수행군관으로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고, 북경에서 우연히 항저우(杭州) 출신 중국 학자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접하고 필담을 나누었다. 또한 그가 남긴 『담헌서(湛軒書)』의 내용은 약간의 시·서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홍대용이 북경에서 돌아온 후 10여 년 사이에 쓴 것으로 홍대용의 북경방문은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 부산 >동구

    ‘바보 의사’ 장기려
    장기려(張起呂)는 부산에서 의료·사회봉사활동을 한 의사이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출생으로 1932년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 평양도립병원장 및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둘째아들 장가용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했다. 서울대학교·부산대학교·가톨릭대학교·부산백병원에서 강의하며 복음병원의 원장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치료했다. 1974년 ‘한국간연구회’를 창립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진행하여 외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1976년 '청십자사회복지회’를 창설하여 취약계층 구호 활동을 전개하는 등 기독교인으로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의사로서 소명을 다하고, 1995년 북에 남은 이산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 서울 >강북구

    따스한 조화를 꿈꾸다, 여운형
    여운형(呂運亨, 1886~1947년)은 경기도 양평군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의 청년들을 계몽하고 교육하는데 힘썼다. 그는 국내에서 항일결사단체인 신민회에서 활동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신한청년당의 발기인으로서 참여했던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는데, 그가 사장으로 있을 때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인해 신문이 폐간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그는 광복을 맞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47년 극우파 한지근의 총격을 받아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 부산 >부산진구

    박재혁, 의열단 항일독립운동의 신호탄을 올리다
    박재혁(朴載赫)은 1895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태어나 부산상업학교 졸업하고 무역상회에 취직하였다. 가족을 부양해야했던 그는 무역에 종사하며 1917년경부터 상해, 중국 각지, 싱가포르 등지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 1920년 의열단에 입단하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에게 폭탄을 던져 사망시켰다. 중상을 입고 체포된 그는 1921년 3월 사형을 구형받고 모진 고문과 병마의 고통을 견디며 단식하던 중 옥사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였다.
  • 경북 >울릉군

    울릉도 영유권 시비문제 중심에 어부 안용복이 나서다
    안용복(安龍福)은 국토수호와 관련한 역사적 인물로 손꼽힌다. 동래부 출신의 어부로 지금의 좌천동에 살았다. 신분은 천민으로 동래 수군에 속한 능로군(能櫓軍)이었다. 초량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 말을 잘하였지만 문맹자였다. 울릉도에 출어했다가 일본 어선을 만나자 영유권 문제로 이들을 문책하고 일본에 가서 막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두 차례에 걸친 일명 ‘안용복사건’은 울릉도·독도의 영유권 시비문제에 대하여 일본 막부가 보낸 공식문서로 울릉도가 조선의 고유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 인천 >강화군

    고려시대 용장(勇將) 김취려, 충의와 정직의 아이콘
    김취려(金就礪)의 본관은 언양(彦陽)이고, 고려 고종(高宗)대의 무신으로 거란(契丹)의 침략을 맞서 큰 전공을 세웠다. 사후 위열(威烈)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고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김취려는 무신집안에서 성장하여 음서로 선발된 뒤 전공을 쌓아 승차하며 용장으로 명성이 높았고 지덕까지 겸비하여 관료로서도 출중한 인물이었다. 훌륭한 무신집안의 혈통은 그의 13대손 영의정(贈領議政)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로 이어져 임진왜란 시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과 강화에서 항쟁하였으나,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하였다.
  • 강원 >삼척시

    남인의 영수 허목, 고학(古學)을 학문과 정치사상으로 풀어내다
    허목은 삼척의 명환(名宦)으로 본관은 양천이다.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이다. 정언눌(鄭彦訥), 문위(文緯)에게 사사하였고,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스승으로 모셨다. 자봉산에 들어가 공부에 정진하여 미수체(眉叟體)를 완성했으며, 삼척부사로 지내면서 향약을 만들었다. 또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건립하고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했다. 조선후기 예송논쟁에서 남인의 주장을 이끌다 경신환국으로 파직되어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다가 1682년 별세하였다. 관직으로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했다. 저서로 『동사(東事)』, 『경례유찬(經禮類纂)』,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경설(經說)』, 『미수기언(眉叟記言)』 이 있다.
  • 인천 >부평구

    사진신부 민함나,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함께하다
    민함나(閔함나)는 인천광역시 부평구 출생으로 1914년 민의식의 사진신부로 미국 하와이에 들어온 이민자였다. 1938년 대한부인구제회 와히아와 대표, 1939년 5월 대한부인구제회 부회장 및 힐로 지방대표, 1940년 1월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평신대 대표회 대표원, 1941년 5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준비위원회 부인구제회 대표 및 의사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독립금수봉위원, 1941~1943년까지 대한인부인구제회 중앙부장, 1944년 회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전후조선구제위원회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38~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 인천 >강화군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유갑순, ‘조선독립을 위해 청년이 나서야 한다’
    인천 강화출신의 유갑순 지사는 1920년 4월 경 서울 경신학교 재학 중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신문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보 등을 받아 배포하기 위한 자금과 동지들을 규합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3월 11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2018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생가터는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에 남아있다.

조선시대 '이런' 직업이 있었다고?

세월이 무색하게 시간이 정말 빨리 가는 요즘이에요.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기하급수적인 기술 발전 및 변화는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수많은 직업이 생겨나곤 하지요. 과거에는 주목받지 못했 던 '유튜버'가 지금은 파급력이 어마어마한 것처럼 말이에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오늘은 조선조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생겨났던 특이한 직업들을 몇 가지 살펴볼까요?

양반 대신에 매를 맞는 '매품팔이'가 있다고?"
『흥부전』에서 흥부가 돈을 받고 대신 매를 맞아주는 대목이 등장하는데요. 이처럼 조선 후기 양반을 대신해 매를 맞는 것으로 생계를 연명하며 목숨을 담보로 한 사람이 바로 매품팔이랍니다.

"장례 때 곡소리를 대신해주는 '곡비'가 있다고?"
조선시대 장례식장에서 돈을 받고 울어주는 곡비가 있었어요. 대신 울어주는 사람을 고용한 것은 통곡 소리 크기에 따라 상갓집의 수준을 평가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세월과 함께 사라져 생소한 직업이 되었지만, 조선시대에 '이런' 직업도 있었다니 참 신기하죠? 이 밖에도 조선시대의 다양한 이색직업이 있다는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우리 함께 알아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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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마포구

    물길을 이용해 떼돈을 번 사람들, 떼꾼
    떼꾼은 도로 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에 강물을 이용하여 목재를 서울로 운반해주던 사람을 가리킨다. 떼꾼들은 4월부터 10월 말까지 뗏목을 운행했는데, 강원도 정선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보통 5일 정도 걸렸다. 떼꾼은 일이 힘든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 그래서 “떼돈 번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떼꾼들의 떼돈을 보고 남한강 주변에 많은 객줏집이 있었고, 주색과 노름에 빠져 돈을 탕진한 떼꾼들도 많았다. 떼꾼은 팔당댐이 생기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서울 >마포구

    주인의 그림자 조선의 집사, 겸인(청지기)
    조선시대 주인을 대신하여 집안일을 관리하는 사람은 겸인이라 하였다. 겸인은 주인을 수행하며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챙긴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내 비서였다. 주인은 자기에게 충성한 겸인을 중앙 관청에 취직시켜주었다. 취직한 이후에도 주인과 겸인의 관계는 지속된다. 겸인에게 중요한 덕목은 주인과의 의리이다. 몰락한 주인에게 의리를 지킨 겸인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미담으로 회자하였다.
  • 서울 >마포구

    깊은 산속에서 외치는 “심봤다!”, 심마니
    조선시대 심마니는 황첩이라는 허가증이 있어야 산삼을 캘 수 있었다. 황첩이 없으면 캐낸 산삼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심마니는 산속에서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입산 전후로 여러 가지 금기를 지키고, 자신들끼리만 통하는 은어를 사용한다. 강원도 금강산, 설악산, 덕유산, 지리산 일대에서 산삼이 많이 나온다. 8월 말에서 10월 초까지가 산삼을 캐기 좋은 때이다. 캐낸 산삼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을 원앙메, 산삼을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독차지하는 것을 독메라 한다. 전국적으로 70~80여 명의 심마니가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서울 >마포구

    조선시대 사우나 관리인 한증승
    한증승이란 조선시대 때 치료목적의 사우나였던 한증소를 관리하던 승려를 말한다. 한증소는 땀을 내게 하는 공간으로 주로 오한이 있거나 미열이 있는 환자들에게 효과적이었고, 중풍이나 기혈이 막힌 환자들에게도 좋은 치료소였다. 한증소에 대한 기록은 세종 4년에 처음 나온다. 한말 화가인 기산 김준근의 그림에 한증소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까지도 한증소가 있었고, 한증승도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식 대중목욕탕이 들어오면서 한증소가 밀려난 것으로 추정한다.
  • 서울 >마포구

    조선의 스파이 체탐인
    체탐인에서 '체탐'(體探)이란 '몸소 알아본다는 뜻'이다. 체탐인이란 적진에 직접 침투하여 적의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을 말한다. 체탐인이란 조선의 스파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초 북방 영토가 확정되기 전까지 평안도 북방에서부터 압록강까지 이르던 지역에 살던 여진족들이 끊임없이 조선과 마찰을 일으켰는데, 이들의 동태를 살피는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게 체탐인이었다. 이들은 세종조에 가장 많이 활동했고, 임진왜란까지는 체탐인의 활동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체탐인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 서울 >마포구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직업, 판수
    조선시대 시각 장애인 중에서 점복과 독경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판수라 한다. 시각 장애인에 대한 시선은 오늘날과 조금 달랐다. 시각 장애인은 시각을 잃은 대신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미래를 볼 수 있다거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중국보다 뛰어난 것으로 4가지를 들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판수’였다. 조선시대에는 운수를 점치고자 했던 사람들이 판수를 많이 찾았다. 오늘날 판수는 무당의 보조자 역할에 머물러 있다.
  • 서울 >마포구

    조선시대 검시 전문가, 오작인
    조선시대에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고을 사또는 오작인을 데리고 현장에 도착해 검시를 진행하였다. 오작인은 법의학에 기초하여 사인을 밝혀내는 조선의 과학 수사관이었다. 검시는 2차례에 걸쳐 서로 다른 오작인에 의해 진행되었다. 오작인은 각종 도구와 물품을 이용하여 사인을 밝혀냈다. 당시 식초와 술지게미 등을 이용한 검시 방법은 과학적이면서 창의적인 방법이었다. 오작인은 사인을 밝혀내는 중요한 직무를 수행했으나, 사람들은 변사체를 만지는 오작인을 하찮게 여겼다.
  • 서울 >마포구

    기생의 뒤를 봐주는 조방꾼
    조선시대 여성들의 직업 중의 하나가 기생이다. 이런 기생을 뒤에서 돌봐준 보호자이자 파트너가 조방꾼이다. 당시 조방꾼은 대전별감이나 포도청 군관 등 왕실이나 권력 기관에 연결된 사람들이 주로 맡았다. 박지원의 「광문자전」과 조수삼의 『추재기이』에 의하면, 한양의 유명한 조방꾼으로 최박만과 벙어리 최씨, 이중배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들은 조방꾼의 우두머리였다. 1948년 권번의 폐지와 함께 조방꾼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 서울 >마포구

    소설의 유행과 지식의 대량 유통을 선도한 세책점주
    상업의 발달은 조선을 소설의 시대로 만들었다. 당시 세책점에서 유행하는 소설을 읽지 않으면 서로 간에 대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세책점을 운영하며 돈을 버는 사람을 세책점주라 한다. 세책점주는 좋은 작품을 보는 안목과 한 권의 책을 여러 권으로 분권하는 장사꾼 수완도 필요했다. 세책점주의 등장으로 사대부 여성들은 소설 독서라는 특유의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
  • 서울 >마포구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위조 화폐 제작업자, 도주자
    조선시대에 상평통보가 주조되면서 조선은 전면적인 화폐 경제 생활에 들어서게 된다.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자, 빠르게 위조 화폐가 만들어져 시장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 조선시대 위조 화폐 제작자를 도주자라 한다. 조정에서는 도주자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위조 화폐의 주조를 단속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도 위폐를 제작하는 것는 큰 범죄이지만 근절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