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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의 전통 제례 문화와 역사를 기록한 콘텐츠이며. 새해 첫날 진행되는 동해신묘제와 석전제, 양양문화제를 기원하는 성황제와 고치물제 등 양양의 대표 제례의 축문과 분방 및 제례 의식을 기록하고 있다. 양양 제례의 우수성과 원형을 담아 발전 방향을 연구한 책자.
김알지 설화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1, 「신라본기 1」과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1, 「기이 1」에 전한다. 김알지는 탈해왕 때에 대보(大輔)의 직에 있었고 태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파사왕에게 태자 자리를 물려주고 왕위에는 오르지 않았던 인물이다. 김알지의 신이한 탄생담이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알지의 7대손인 미추가 김씨 최초로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의 일일 것이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 한식 같은 절기에 조상의 묘를 찾아뵙고 살피고 손질하는 일을 성묘라고 한다. 조상의 육신이 매장되어 있는 묘를 관리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조상의 영혼을 모셔놓고 지내는 제사만큼이나 중요했다. 원래 설날, 한식, 추석 등의 절기에 했던 성묘를 198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추석에 하게 되었다. 그 형식이 간소화되고 시기가 변화했지만 조상님을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은 남아있다.
서로의 자녀를 교환하는 방식의 혼인형태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하층계급에서 드물게 있었던 혼례방식이다. 경기도 김포에서는 물레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혼인 방식이 있었던 이유는 혼례비용을 절약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로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던 혼인이다.
소금장수가 길을 가다가 쌍분묘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마침 무덤 혼령들의 제삿날이라 제사음식을 먹으러 간다. 며느리가 추운 날에 돌아가셔서 고생이라는 말을 들은 시어머니가 손주를 불에 떠밀어 버린다. 시아버지는 불에 덴 손주의 치료에는 무슨 약이 좋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소금장수가 제사를 부정하게 지낸 집을 찾아가서 자신이 무덤가에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며느리가 다시 제사음식을 차려 시부모께 잘못을 빌고, 불에 덴 자식을 치료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오죽헌의 권 노인이 서울에서 죽었다. 권 노인이 죽던 날, 한 동네에 살던 최 씨의 아버지도 죽었다. 최 씨가 진부에서 장사를 하다가 아버지의 제사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죽은 권 노인의 혼령과 동행한다. 권 노인은 자식들이 제사를 늦게 지내는 바람에 집 근처에 오면 닭이 울어서 제사 음식을 받아먹지 못한다고 말했다. 권 노인은 최 씨를 통해 자식들에게 닭이 두 번 운 다음에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천서씨가 이천을 본관으로 한 성씨로,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귀족이었다. 양경공 종가가 경주로 내려온 것은 서유의 증손자인 서석손 때이다. 양경공 종가에서는 서유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다. 서유는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양경공 종가의 불천위 제사는 고위와 비위를 합설해서 지내며 제기의 숫자는 40개이나 떡과 나물은 1개의 제기에 담기 때문에 제물의 종류는 그보다 훨씬 더 많다. 음력 6월 3일 자정에 제사를 지내며, 지금도 삼일재계를 지키고 있다.
진성이씨의 시조인 이석은 대대로 진보현에서 살던 토착 호족의 후예이다. 진성이씨의 안동 거주가 시작된 것은 이자수 때이다. 퇴계 이황은 이석의 7세손으로 성인이 종택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어머니가 노송정종택 안채 퇴계 태실에서 퇴계를 낳았다. 퇴계는 50세 때 토계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후 퇴계의 집터는 경작지로 사용되었는데, 1715년 권두경 등이 주축이 되어 추월한수정을 건립한다. 추월한수정은 일제의 방화로 소실되고 1926년 13대 종손이 종택을 조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퇴계 종가에서 모시는 퇴계의 불천위 제례음식은 근검절약했던 퇴계의 가르침에 따라 제물 수량이 매우 소박한 편이다.
의성김씨는 김석을 시조로, 김용비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세거하던 성씨이다. 김성일이 세거한 금계리는 ‘천 년 동안 패하지 않는 땅’으로, 김성일이 안동의 검제마을을 세거지로 삼은 이후 15대에 걸쳐 종가가 이어오고 있으며,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김성일 불천위 제례에는 송기송편과 마를 올리며, ‘치’자가 들어가는 생선과 마늘 및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는다. 학봉종택 내에 있는 운장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문서 등을 보관․전시하고 있다.
노송정 이계양 종가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위치해 있다. 온계의 수려한 경치에 감탄한 이계양은 스님이 잡아준 집터에 종택을 건립하여 집성촌을 형성하게 된다. 이계양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에 뜻을 접고 예안으로 귀향하여 은둔처사의 삶을 살았다. 이계양은 단종이 승하한 10월 24일 산에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곡을 하고 절을 했다고 한다. 노송정 불천위 제사는 음력 5월 16일 저녁 8시경에 지낸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사 시간과 제수 장만에 있어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1974년 안동댐 건설과 함께 농암종택이 있던 분천마을이 수몰되었다. 2005년 종가와 문중의 노력으로 가송마을에 새로운 터전을 잡게 되었다. 농암 종가에서는 음력 6월 12일에 농암 이현보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현보는 조선시대 전기 안동 출신 문신이자 강호문학의 창시자이다. 농암 종가에서 제례음식을 장만할 때 중요시하는 것은 제물의 간을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농암 종가에서는 불천위 제사는 4대조 기제사와 비교하여 엄격한 격식과 절차를 준수하고 있다.
여희림의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자는 천지(天之)이며, 호는 원정(圓亭)이다. 1507년(중종 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조광조·김정 등 기묘사림과 인연을 맺었다. 1538년 지평을 역임하였다. 원종 종가에서는 음력 6월 12일 저녁 8시경에 여희림의 불천위 제사를 모신다. 제물 차림과 진설은 홀기에 근거해서 준비하고, 제사 당일에 종손은 “주인급중장부목욕갱의음주부득지란 식육여훈조상청악범흉예지사부득예”라는 홀기의 내용을 준수하고 있다.
광산김씨 의정공 김국광 종가와 김국광을 모신 사당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자리하고 있다. 1404년 연산면 일대에 정착한 광산김씨는 김국광 때부터 ‘연산광김(連山光金)’의 부흥기를 맞는다. 고정리에는 양천허씨 부인 정려를 비롯한 광산김씨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의정공 종가에서는 의정공 김국광 불천위를 비롯하여 매년 36차례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전반적으로 제례는 예전에 비해 간소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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