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 색
고급검색
관리번호
발행년도
시 대
연 대
선택조건
지역N문화 포털은 콘텐츠 생산자 및 연구자들을 위해 서지정보 내보내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서지관리 프로그램은 문헌 및 온라인 콘텐츠 등 자료를 관리하고 공유하는데 사용됩니다.
※ 해당 프로그램은 소속기관 또는 개인 가입이 필요할 수 있으며, 지역N문화 포털은 링크만 제공하고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관심지역 :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지역N문화 시작하기
마지막으로 로그인한 계정입니다.
지역N문화는 별도의 회원가입 없이 사용중인 SNS로로그인하여 간편하게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방문화원이 기획하고 제작한 지역문화콘텐츠 이미지, 동영상, 오디오, 전자책 제공
장홍자 박진주 부부 조도성당 이야기를 채록해 대중적으로 스토리텔링한 영상 콘텐츠이다. 지역민들에 삶의 터전인 마을의 생애사, 옛 노래, 옛 모습이 어르신들의 입말로 기록되어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원형을 보존했다. 그리고 섬 사람들의 민속과 향토적 문화도 엿볼 수 있다.
대구 최대의 공구거리인 ‘북성로 공구거리’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폐공구를 수집하던 주민 몇몇이 이곳에서 공구를 판매하며 시작되었다. 1950~60년대 철물과 기계를 취급하는 공구 상점들이 하나둘 모여 들더니 1970~80년대는 점포 수가 600여 개에 이르며 전국의 모든 공구가 이곳에 있다 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IMF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쇠락했고, 수십 개의 공구 상가들이 남아 ‘북성로 공구거리’라는 이름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 순종황제 어가길이 조성되면서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는데, 특색 있는 카페, 갤러리, 독립서점 등이 들어섰다. 그 중에서도 북성로 공구박물관과 모루는 장인 작업장과 수많은 공구를 볼 수 있고, 직접 체험도 해볼 수 있는 특색있는 공간이다.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총 1,023일간 피란 내려온 대한민국 정부의 청사로 쓰였다. 원래 1925년 경상남도 도청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경상남도 도청의 체육관 격인 무덕관은 임시수도의 국회로 사용되었다. 피란 수도 부산은 급격히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나 임시수도 정부청사와 국회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둘러싼 정치 소용돌이[부산 정치파동]로 들끓었다. 임시수도 정부청사는 현재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쓰인다.
딱지치기는 종이를 접어서 만드는 종이접이 딱지나 인쇄된 종이를 오려서 노는 인쇄그림 딱지를 가지고 노는 놀이다. 어떤 딱지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놀이 방법이 다르다. 종이접이 딱지는 바닥에 딱지를 놓고 다른 딱지로 내려쳐서 뒤집는 놀이고, 인쇄그림 딱지는 딱지에 그려진 계급, 숫자, 별의 개수 등을 겨루는 놀이다. 한국전쟁 이후 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 내대리 사이로 흐르는 한탄강에는 승일교라는 다리가 있다. 승일교는 남과 북이 절반씩 지은 남북합작품이다. 철원군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 지역이었다가 전쟁 이후에 대한민국의 땅이 된 수복지구다. 승일교는 철원이 북한의 관할이던 1948년 공사가 시작되어 절반쯤 지었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고 10년이 지난 1958년 남한 정부가 못 다 지었던 다리의 반쪽을 완공했다.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라는 별명을 가진 120m, 높이 35m, 너비 8m의 철근콘크리트 다리이다. 다리의 명칭은 당시 남과 북의 최고지도자 이승만(李承晩)과 김일성(金日成)의 가운데 자인 ‘승(承)’과 ‘일(日)’을 따와서 지었다고도 하고, 후일 한국전쟁의 영웅 박승일(朴昇日) 대령을 기리기 위해 승일교(昇日橋)로 바꿨다고도 한다.
경기도 여주시에는 일제강점기 금광의 흔적이 두 군데 남아 있다. 이포나루 근처인 금사면과 옥녀봉 금광이 그곳이다. 지질학상으로 강원도 홍천군, 횡성군, 경기도 양평군과 함께 홍천지구 금광상에 속하는 두 금광은 일제강점기부터 금을 캐내기 시작하여 1970년대까지 흥성했던 금광이었다. 1989년 판 <여주군지>에 따르면 ‘옥녀봉 금광’의 금 매장량은 한반도 전체에서 8위에 이를 정도로 큰 광산이었다고 한다. 금사면 역시 금모래가 많아 사금업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기에 금사(金沙)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지명유래담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여주의 두 금광 자리에는 아직도 갱도의 형태가 뚜렷하며, 금 채취 시설의 흔적들이 확인된다. 이른바 ‘황금광 시대’라 불렸던 1930년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한일해방 이후에는 일제강점기에 운행되어 오던 중앙도매시장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위탁상’들도 급속도로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농수산물의 도매상권이 위탁상들에 의해 거의 장악이 되었다. 이후 합법적인 도매시장과 위탁상들 중심의 불법적인 도매시장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도 함께 공존하였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든 광업소의 생산활동은 중단됐다. 하지만 전력 공급에 필요한 화력발전소의 에너지인 석탄은 전쟁 때도 여전히 중요한 일이었다. 광업소에서는 피해 복구사업을 진행하면서 생산을 병행해 나갔다. 전쟁 중에도 광부들은 석탄을 캐기 시작했다. 은성광업소는 1951년 4월, 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는 9월, 영월광업소는 10월, 화순광업소는 11월부터 석탄을 생산했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정부는 산업을 건설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석탄 증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에 정부는 광부들을 산업전사로 추켜세우며 증산을 독려하며 노래까지 만들어 보급했다. 노래에는 착암기, 벨트컨베이어, 안전등 등과 같은 탄광의 주요 작업 장비가 등장하기도 하며, 광부가 국가 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노동의식 고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가 산업발전의 희생도구에 불과하던 탄광노동자들의 분노는 전국을 휩쓰는 민주화 운동, 독재타도, 인권 운동 등의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폭발했다. 시위 때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구호를 외칠 만큼 탄광노동자들의 불만은 인권문제에 집중되었다. 나아가 신분상의 불이익과 인사에 대한 불만, 임금 및 후생복지 차등 대우에 대한 불만, 어용노조 퇴진 등의 노노갈등까지 겹치면서 노동자의 투쟁은 고조되었다.
용문산 전투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 때 양평의 용문산을 방어 중이던 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의 주력인 제19병단 제63군 예하 3개 사단(제187·제188·제189사단)의 공격을 격퇴한 방어 전투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참전과 피난 속에서 사람들의 배고픔을 달래준 대표적 음식으로 주먹밥이 있다. 주먹밥이란 갖은 양념을 한 밥을 손으로 주먹 모양으로 주물러 먹기 쉽게 만든 밥으로 휴대하기 간편하여 이동할 때나 전쟁 중에 먹는 음식으로 이용되어 왔다. 주먹밥은 과거 전쟁 속 일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음식으로 아픔의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재료와 형태로 만들어져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음식으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1976년 동아흥행이 제작한 「학도의용군」은 남상선 원작, 김강윤 · 정인철 각본(각색)으로 최하원감독이 연출한 상영시간 130분의 전쟁영화이다. 학도의용군은 6·25전쟁 당시 학생 신분으로 참전한 의용병으로 후방에서의 선무활동은 물론 직접 참전하기도 하면서 구국에 앞장섰다. 특히 학도병들의 희생적인 애국정신은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요충지인 포항에서 참전한 공방전으로 대표된다. 이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이다.
종교와 문화 / 문화예술
생활과 민속 / 민속
구비전승·어문학 / 어문학
SNS에 공유해보세요.
카카오스토리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QR코드를 스캔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