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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이자 문인 조헌을 다룬 온라인 총서이다. 그의 저작물, 관련 유적의 사진·영상 자료, 관련 학술 연구 자료, 기록 원문 자료, 그 밖에 조헌을 대상으로 한 문학·에세이·칼럼을 찾아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이자 문인 조헌을 다룬 전자책이다. 그와 관련된 모든 기록물, 유적, 유물, 인물은 물론 설화까지 키워드별로 묶어 알기 쉽게 자료화했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이자 문인 조헌을 다룬 웹툰이다. 그의 삶을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으며, 총 20화에 달하는 웹툰을 통해 나라에 충성하는 위인의 인물상을 접할 수 있다.
경기도 김포시 김포성당은 북변동 언덕 위에 있다. 김포성당 언덕에 올라서면 한강과 김포 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화강암으로 지어진 구 김포성당은 1955년부터 1년간 신도들이 직접 돌을 캐고 날라 지었다. 김포성당은 1960년대 들어 장애인을 위한 편물학원을 운영하고,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등 지역민과 함께 하는 성당으로서 소임을 다하고자 힘썼다. 1999년 새 성당이 석조 성당 옆으로 건축되어, 신·구 성당이 조화를 이룬다. 1만 평에 이르는 김포성당의 정원은 잣나무 숲과 장미가 만발하는 도심의 쉼터로 사랑받는다. 석조 성당이 등록문화재인 김포성당은 2015년 한국 최초로 ‘성체 성지’로 지정되었다.
조헌은 붕당 정치가 처음 시작된 선조 시기,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명에 다녀와 토지제도, 교육제도, 군사제도 등의 개혁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났다. 학문적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파에 속했으며, 이지함(李之菡)을 스승으로 모시고 두류산 등지를 유람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맞서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주자성리학의 다른 이름은 도학(道學)이다. 성리학의 가르침이 ‘인간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깨우치고 실천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조선의 도학은 여기에 의리와 절의, 그리고 실천이 더 강조된다. 의리를 위해 죽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의’만을 생각하며 전장에 나선 중봉은 유학자들 사이에서 도의를 실천한 ‘진유(眞儒)’로 평가되었다.
우저서원은 중봉 조헌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조헌이 살던 집터에 세워진 것이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군에 맞선 의병장이다. 왜란이 일어날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봉은 “오직 의(義) 한 자만을 끝까지 생각하라.”라는 말로 의병들을 설득해 한 사람도 도주하지 않고 싸움에 임하도록 이끌었고 그 역시 ‘오직 의’를 위해 싸우다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유식은 충청북도 옥천 출신으로 김장생 문하에서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과 함께 공부한 대유학자이다. 또한 유식은 조헌 의병장의 업적 선양과 충렬을 세상에 밝히고 후세에 전달하고자 임금에게 조헌에게 벼슬과 명예를 수여하자는 추증상소문(追增上疏文)을 써 올렸다. 그리고 광해군 시절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에 관한 논의가 있었을 때, 삼각산에서 책을 읽던 유식은 흉도(과격분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곧장 귀향하여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옥천 이지당(沃川二止堂)은 보물제2107호로 2020년 12월에 지정되었다. 이 건물의 위치는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에 있다. 원래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조헌(趙憲)이 지방의 사람들을 모아 가르치던 서당이었다. 각신동이란 마을이름에서 처음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 했는데, 훗날 송시열이 『시경』의 문구를 따서 이지당으로 바꾸었다. 1901년 이 지역의 네 문중에서 중건하였다. 이지당 옆의 누정은 김만균이 지었다.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다.
충청도에서는 공주목 제독관이었던 조헌과 갑사의 승려 영규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점령당했던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등 호서지역에 침입했던 일본군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충청도 의병도 많은 희생을 당하며 금산성 싸움에서 패하기는 하였지만, 일본군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함에 따라, 호서·호남지방은 온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옥천 가산사 영정각 및 산신각은 임진왜란 때 승병과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영규대사와 중봉 조헌을 모신 곳이다. 금산전투에서는 승병과 의병 모두 전사하였는데, 가산사에서 영규대사와 중봉 조헌의 영정을 모셔왔다. 그러나 영정은 일제가 탈취해 갔으며, 훗날 위패만 모셨다. 지금은 두 분의 영정도 새로 만들어서 봉안하고 있다. 2000년 12월 충청북도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하였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4호 옥천 조헌 묘소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헌의 묘이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 당시 조헌이 이끈 의병은 700명인데 금산전투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승병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의 승병도 모두 전사하였다. 이때 죽은 의병 700명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일명 '칠백의총'이라 한다. 그때 700의총을 만들면서 의병장의 무덤은 따로 했는데, 그 무덤이 현재 옥천으로 이장해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6년 12월 충청북도에서는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옥천 후율당은 충청북도 기념물로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도이길 42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공조좌랑, 전라도도사, 보은현감 등을 지낸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었던 조헌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후율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건물로 보은현감을 사직하고 옥천에 있을 때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지은 후율정사를 조헌이 순국한 뒤 사당으로 만든 것이다.
보은 윤여익 충신각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한중리 402-3에 위치하고 있다. 윤여익은 조헌 의병장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따라 의병에 참여하여 청주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금산전투에서 순국하였다. 칠백의총에 함께 장사되었고, 후율사에 제향되었다. 1883년에 윤여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를 하사하고 충신각을 건립하였다.
전승업은 충청북도 옥천 출신의 선비로 과거시험에 몇 번이나 실패하자, 관직을 포기하고 자신의 인격을 닦는 학문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나서 청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전승업은 금산에서 조헌과 의병이 몰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전투에 참여한 열사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조헌의 시신을 수습하여 옥천에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조헌이 나라에 올린 글과 여러 저서를 모아 유고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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