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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계양지역의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와 민속신앙을 기록한 책자이다. 계양지역 여러 마을에서 행해진 마을 공동제례, 부평 사직단 의례, 향료 의례 등 전통 제례들의 이야기를 조사하여 기록했다.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10호인 계양산성은 축조 시기가 정확하지 않지만, 다년간의 발굴조사와 연구로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계양산성은 계양산이 아닌 고성산에 축조되어 경기만 방어체계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삼국시대의 계양산성은 군사적 방어시설과 더불어 지방행정과 통치의 중심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인천 계양구의 계양산은 시대에 따라 수주악, 안남산, 아남산, 경명산이라고도 하였다. 한강 서부지역에서 가장 높은 계양산은 예로부터 계양산 자락의 마을에서 산신제나 마을 제례를 하며 신성시되었다.
최근까지 지역의 촌로들은 병방동을 ‘됭면’으로 불러왔는데, 이는 동면을 ‘됭면’으로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병방동을 동면으로 대신불려진 이유는 병방리에 동면(東面)의 면소재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면은 부평도호부 관아가 있었던 부내면(府內面)의 동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임학동은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동면(東面)의 이막리(伊莫里), 혹은 임학리(林鶴里)였다. 1895년 지도에 이막리(伊莫里)가 보이는데, 이는 임학리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임학리는 도호부의 중심인 부내면의 바로 옆 동리로가 동면의 중심지인 병방리를 거쳐 박촌과 황어면을 거쳐 김포로 가는 길목이었다. 1914년 일제가 부천군을 신설하면서 동면·당산면·황어면을 계양면으로 통합하여 부천군 계양면 임학리가 되어, 해방 후에도 1973년까지 지속되었다. 이곳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산 아랫마을까지 수백 년 된 노송(老松)이 줄을 이었고 김포가도의 서쪽에도 늘어설 정도였다고 한다. 노송의 아름다운 가지에는 학(鶴)이 즐겨 깃들였고, 마을을 병풍처럼 둘렀던 소나무 숲은 백로의 서식지가 되었다.
계양1동에 속한 귤현동은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 당산면에 속한 굴현리(屈峴里)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부천군이 신설될 때 계양면 귤현리(橘峴里)가 되면서 오늘날의 지명으로 굳어졌다.마을 이름이 굴현리였던 이유는 길이 구부러졌다는 고갯길 ‘굴재’를 지나는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굴재는 계양산 동북쪽 능선이 시루지고개(현 신의주고개)로 내려와 동쪽으로 일으킨 형제봉 동쪽의 고갯길이다.
벌말은 상야동, 하야동, 평동, 그리고 김포시 고촌면 전호리 일부를 포함해서 부르는 이름으로 벌판 가운데 마을이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벌말은 북쪽이 아랫말이고 남쪽이 윗말이다. 이는 굴포천을 중심으로 상류인 내륙쪽을 윗말로 하류인 한강쪽을 아랫말로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이화동은 본래 부평군 황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김포군 검단면 당하리와 합쳐 이화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속하게 되었고, 1973년에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김포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에 인천시 관할이 되면서 이화동이 되었다. 이화동은 1동과 2동으로 나뉘며 1동은 배고지, 2동은 신촌으로 불린다.
용종동은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 동면에 속한 용종리(龍宗里)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부천군이 신설될 때 동면·당산면·황어면이 계양면으로 통합되면서 부천군 계양면 용종리가 되었다. 용종동 일대는 ‘용마루’라고 불린 곳이다. 계양산의 동쪽 능선은 고성산을 일으키고, 해발 73m의 독산을 거치면서 완만하게 동남방향으로 두 줄기로 가라앉게 되는데, 한 줄기는 병방동의 구릉을 거쳐 동남쪽으로 넓은 들판의 평지와 만나게 된다. 또 한줄기는 독산을 머리로 하면서 임학굴(임학동)을 서쪽으로 감싸 골짜기를 만들면서 남진하다가 평지를 만나면 얇은 구릉으로 마을까지 이어져 내려 오게 되는데, 이 모습이 용의 모습 같다고 해서 이 언덕을 용마루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양동은 본래 부평군 당산면 지역으로 동녘말, 서녘말, 모퉁이말, 양지편말 등의 마을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녘말과 양지편말을 따서 동양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속하게 되었다. 1973년에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김포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에 인천시 관할이 되면서 동양동으로 바뀌었다. 동양동은 당산(堂山)이 있어 당뫼라고도 하는데 당뫼가 변음하여 당미가 되었다.
선주지동과 노오지동은 본래 부평군 황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천군 계양면에 속하게 되었고, 1973년에 김포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에 인천시 관할이 되었다. 선주지마을은 옛날에는 배가 많이 왕해래 배 대던 곳인 선주지(船駐地)였는데 신선이 사는 선주지(仙住地)로 바뀌었다.
박촌동은 예로부터 박씨가 살아온 집성촌이기에 생긴 지명으로 박촌말이라고 불렀으며,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동면 박촌리였다. 계양산의 북동쪽 능선은 신의주고개(시루지고개)를 지나 형제봉을 일으켜 큰 산괴를 만들고 굴재를 지나 소금뫼산·모퉁이뒷산·양지편뒷산을 거쳐 당산1)까지 걸쳐있는데, 박촌은 형제봉과 그 지봉인 금계산(金鷄山)을 의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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