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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거수마을의 성황재를 재연한 영상이다. 성황제란 마을을 지키는 성황신에게 올리는 제의를 말하며, 주로 풍년, 무병장수 같은 마을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했다. 토템 신앙을 간직한 거수마을의 거북바위 서낭당에서 성황제 제의를 재연했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거수마을에 있는 거북바위에 대한 영상이다. 거수는 광산 김씨의 집성촌으로, 거북이를 닮은 바위를 수호신으로 삼아 당제를 지냈다. 거북바위는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 모양 바위를 신성시한 토템 신앙을 보여주는 향토유물이다.
경북 봉화군에 산재한 보부상의 흔적을 찾아가는 다큐멘터리이다. 보부상은 전통사회에서 시장을 중심으로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행상을 하던 상인을 말한다. 천민이라는 신분적 제약에도 궂은 일을 마다치 않으며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를 이루는 중간자 역할을 했던 보부상의 변모 양상을 다룬다.
경북 봉화지역의 전통적인 벌목 과정, 도구 등을 설명하고 목도소리를 재연한 영상이다. 경북 봉화지역의 전통적인 벌목 과정, 도구 등을 설명하고 목도소리를 재연한 영상이다.
죽방울놀이란 장구 모양의 방물을 던져 올렸다가 받는 놀이다. ‘죽방울(竹-)’이라고 불리지만, 대나무로 만들면 쉽게 깨지기 때문에 밤나무, 은행나무, 박달나무 등으로 만든다. 죽방울을 손으로 던져 받거나, 끈의 탄력을 이용해 죽방울을 이리저리 놀린다. 연원은 중국의 쿵주 놀이며, 주로 유랑 연희패와 보부상들에 의해 행해졌다.
최도환의병장은 강원도 화천 출신으로 을사늑약이후 의병투쟁에 참여하여 강원도 서북부지역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1906년 의병을 일으킨 그는 2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주로 양구를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이 점차 어려워지자 최도환은 한때 중국 간도지역으로 이동하여 의병의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병이 들어 귀국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보부상은 조선 후기에 조직화 된 전문 상인 조직이다. 시장은 항상 치열한 경쟁이 있는 곳이기에 보부상들은 시장 내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속력을 다지고, 지역 상권을 장악하였다. 엄격한 규율을 만들어 어겼을 때는 엄하게 다스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결속력과 엄격한 규율은 보부상 서로 간에 동무의식은 물론 국가에 대한 믿음과 신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 제산(弟山) 남쪽 기슭에는 ‘좌상대도접장김공이형유공비(在商隊都接長金公以亨有功碑’가 있다. 이 유공비는 ‘부조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보부상 김이형을 기리기 위해 1864년(고종1)에 건립되었다. 김이형은 보부상들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인물로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였다고 한다.
'보부상'은 조선 시대부터 지방의 정기시장을 장악했던 전문적인 상인 집단으로 취급 물품에 따라 '보상'과 '부상'으로 나뉜다. 보부상은 전국의 다니는 행상에서 비롯됐으며, 부상의 경우는 조선 초 부상청이 만들어지면서 조직화 되었고, 보상은 1879년 조직화 되었다. 이후 1883년 혜상공국이 만들어지면서 하나로 합쳐졌다.
예덕상무사는 충청남도 예산과 덕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보부상단을 관리하던 기관으로 현재는 덕산면사무소 뒤편에 전시관과 사우가 남아있다. 전시관과 사우는 1970년대 당시 접장을 맡았던 윤규상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1976년 5월 21일 중요민속자료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창녕상무사'는 경상남도 창녕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보부상단이었다. 창녕상무사에서 부상은 행상에 주력하고, 보상은 점포를 차리고 상품을 판매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창녕상무사의 관할 지역은 초기에는 창녕과 밀양 지역이었다가 1885년 창녕, 영산, 현풍 지역으로 바꿨고, 이후 1990년 창녕과 영산 두 지역만 관할에 두었다. 창녕상무사는 부상과 보상의 역할이 구분되었다고 한다.
원홍주육군상무사는 홍성, 광천, 보령, 청양, 대흥, 결성 지역 등 6개의 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상무사이다. 1851년 임인손이 접장이 되면서 상단이 조직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상인들에 의해 유지되고,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상무사이다.
부상들은 전문 상인집단으로 엄격한 규율을 정하고,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했다. 특히 보부상의 인사법과 말투는 그들이 사용한 언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요소이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말과 속담을 통해 보부상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보부상의 상징물은 패랭이와 물미장(勿尾杖)이다. 보부상들은 목화 솜뭉치를 양쪽에 단 패랭이를 쓰고, 한 손에는 지게작대기인 물미장을 들고 조선 팔도를 다녔다. 패랭이와 물미장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보부상들이 갖는 자긍심과 실용적인 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보부상이 퇴조하자,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그 역할을 대신한 대표적 행상단이 ‘선질꾼’이었다. 선질꾼은 동해안 일대에서 생산한 미역·각종 어물·소금 등과 경상북도나 강웓도 내륙 지역에서 생산한 쌀·보리·대추·담배·옷감 등을 교류하였다. 해방과 한국전쟁, 산간 지역 사람들의 소개, 도록 교통의 발달 등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부상청’은 ‘등짐장수’라고도 불리는 부상들이 만든 행상 조합이다. 부상청에서는 부상들을 위해 임방을 설치하였고, 보부상들의 침식, 질병의 치료, 장례 등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부상청이 만들어진 배경은 대체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다. 당시 부상들은 이성계가 조선의 창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부상청을 설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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