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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하구 주민들의 생계 수단이자 사상공단 노동자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대표적인 향토음식인 재첩국을 소재로 1970~1980년대 생활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재첩 재취, 유통, 판매 등에 종사했던 '재첩 아지매'들과 사상공단 노동자들의 애환을 생생히 담았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02호로 지정된 수산제는 낙동강을 끼고 축조되었던 수리시설이다. 김제의 벽골제와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를 우리나라의 농경문화를 개척해온 삼한 시대의 3대 수리시설이라 일컬어 왔다. 제천의 의림지는 처음부터 물을 담았다가 농사에 필요한 시기마다 사용할 수 있는 저수지였지만, 김제의 ‘벽골제’와 밀양의 ‘수산제’는 물길을 잘 다스리는 제방을 인력으로 쌓아서 만든 시설이라 그 축조시대가 궁금한데, 김제의 벽골제 보다 그 흔적이 늦게 발견된 ‘수산제’는 학자들이 수문 하층에서 출토된 유구를 비교했을 때, 유구의 재질이나 제작기술이 벽골제 보다 뒤떨어진 것으로 보아, ‘수산제’ 가 벽골제보다 앞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문경새재는 조선 시대에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오가던 사람들의 주요 통행로였던 영남대로에 있는 고개이다. 새재는 예로부터 백두대간 북쪽의 한강과 백두대간 남쪽의 낙동강을 연결하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고개로 알려져 있으며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넘나들던 길이었다. 지금 우리가 걸을 수 있는 고갯길은 자동차의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폭이 넓지만, 조선 시대에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가면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넘었던 과거 길도 일부 남아 있다. 새재에 설치된 3개의 관문을 비롯해 고갯길 주변에는 옛날의 모습이 잘 간직되고 있다.
유곡도는 조선시대 경상도 문경에 있던 유곡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역로이다. 경상북도의 문경시, 예천군, 상주시 등지를 통과하던 역로이며, 조선시대에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던 영남대로의 일부 구간에 해당한다. 유곡도를 통과하던 영남대로는 문경새재를 사이에 두고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시켜주는 최단 구간이었기에,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이동하던 조세의 육로 이동 구간이었다. 또한 유곡도는 일본과 교역하던 항구인 부산포를 드나들던 물자가 한양으로 이동할 때에도 통과하던 구간이었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발원한 금강은 전라북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등지를 거쳐 서해로 흘러든다. 서해에서 진입한 선박은 금강 하구에서 110㎞ 떨어진 부강 포구까지 항해가 가능했으며, 부강에서 하역된 수산물은 멀리 충청북도 및 경상북도, 강원도의 내륙지방으로까지 육로를 따라 운송되었다. 내륙지방에서 특히 필요로 했던 소금이 운송되던 소금길은 강원도 영월까지 이어지기도 했고 경상북도 상주까지 펼쳐지기도 했다. 금강의 소금길은 육지의 육상 교통로를 따라 사방으로 형성되었다. 소백산맥을 넘은 내륙지방으로까지 금강을 통해 소금이 운송되었다.
경상북도 봉화군과 안동시의 낙동강변에 걸쳐 있는 예던길은 이황이 학문을 배우기 위해 숙부가 청량산 중턱에 지은 오산당(지금의 청량정사)까지 낙동강변을 오르내리던 길이다. ‘퇴계오솔길’로 불리기도 한다. 퇴계 이황이 안동에서 봉화의 청량산까지 50리 길을 거닐었기 때문에, 예던길의 구간은 안동에서부터 낙동강을 따라 봉화의 청량산 자락까지 이어진다. 봉화군 명호면의 구간이 보통 낙동강 예던길로 알려져 있으며, 그보다 남쪽의 안동시 도산면 구간은 퇴계오솔길로 나뉘어 불리기도 한다. 경상북도에서는 낙동강 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을 따라 옛 선비들이 걷던 예던길을 복원하여 낙동강의 생태경관 자원과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체험 코스를 조성했다.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피재는 삼수령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동해안의 삼척에서 난리가 나면 삼척에 살던 사람들이 이상향으로 인식하던 황지 연못 방향으로 피난 가는 길에 이용했던 고개라는 데에서 피재라 부른다. 이 고개는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물줄기가 시작하는 곳이라는 데에서 삼수령이라 불린다. 삼수령 터널이 개통하면서 삼수령을 넘어가는 길은 옛길이 되어 버렸다.
김해평야(金海平野)는 낙동강 하류의 낙동강과 서낙동강 사이의 삼각주와 그 인근의 평야지대를 가리킨다. 낙동강 삼각주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삼각주이다. 퇴적이 계속되어 삼각주는 매년 바다로 향해 늘어 가고 있다. 기후는 해양성 기후로서 온난하며, 남해산맥(南海山脈)을 등지고 바다에 면한 배산임해지(背山臨海地)는 동난하량(冬暖夏凉)하여 뛰어난 보양지대를 이룬다. 평야의 대부분은 벼농사지대이나 북부에서는 과수, 중남부에서는 채소 재배지로 이용된다.
백두대간의 말단 부근에 자리한 여원재는 오래전부터 고개의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전라도 남원에서 경상도 함양으로 이어지는 주요 통로로 기능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연결하는 간선도로 가운데 통영로가 통과하던 구간이며, 공공업무를 수행하러 다니던 사람들이 이용했던 역로인 오수도의 한 구간이었다.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이 경상도로 진출하기 위해 여원재를 넘다가 관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여원재의 서쪽을 흐르는 물은 섬진강으로 흐르고, 고개의 동쪽을 흐르는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낙동강의 동편 하구에 속하는 명지, 하단, 엄궁 마을에서는 1970년대까지 재첩을 잡아 재첩국을 만들어 행상을 하러 다니며 팔았다. 낙동강 하구의 재첩은 섬진강과 재첩의 종류가 다르고, 재첩을 잡는 방법도 다르다. 어덕치기와 쩍밭치기의 방식으로 대나무를 쪼개어 만든 '거리'를 이용해 재첩을 잡았다. 재첩은 번식력이 좋아 하룻밤에 삼대를 본다고 하여 ‘재첩’이라 부른다. 재첩은 1940년대 이후 낙동강 하구에서 행상으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낙동강 치수사업 이전에는 서낙동강에서도 재첩이 있었으나 치수사업 이후로는 동낙동강에서만 난다. 재첩잡이는 전문 어부가 아니어도 행할 수 있었고, 수익성도 낮아 생계수단으로 몇몇 주민이 잡기 시작했고 그들이 유지해왔다.
낙동강 하구와 남해가 만나는 곳인 부산시 사상구 엄궁동은 을숙도 부근이고, 구포는 낙동강 하구로 이 두 마을 앞에서 해수와 담수가 만난다. 이 두 마을은 예전부터 민물장어를 비롯해 재첩, 참게 등의 내수면 어종이 많이 서식했다. 민물장어는 뱀장어과에 속하는 민물고기로, 장어류 중 유일하게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올라와 성장하는 회유성 어종으로 낙동강 하구에서 많이 잡혔다. 5~12년간 담수에서 성장해 성어가 되면 산란하러 바다로 나가는 것을 주로 어획했다. 바다에서 산란한 치어가 낙동강으로 회유해 오면 치어를 잡아 양식하면서 장어마을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87년 낙동강 하굿둑이 생기면서 장어의 출입이 제한되자 어획량이 급감하였고, 4대강 준설사업으로 다른 어종은 나지 않지만 민물장어는 소량 생산되고 있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咸白山, 1,573m)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영남지방 전역을 유역권으로 중앙 저지대를 통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이며, 한반도 내에서는 압록강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길다. 발원지가 강원도에 있을 뿐 강 유역 대부분이 영남을 관통하므로 ‘영남의 젖줄’이라 부른다. 경사도가 완만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해 오랜 역사적 발자취가 남아 있다. 경북 칠곡군 석적면 중동 일원은 구석기 유물로부터 수십 개의 부족국가와 가야와 신라가 터를 잡았던 역사적 공간이다. 상류 지역인 안동까지 고도가 완만해서 수운이 발달했으며, 고려와 조선에는 일본과의 교통무역 요충지였다. 홍수가 나면 냇물이 주변으로 넘쳐 강 주변에 습지가 발달해 있고, 하류에는 넓게 펼쳐진 삼각주에 한반도에서 가장 기름진 김해평야가 자리하고 있다.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에는 응천강(凝川江)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나루가 있다. 아침에 물이 밀려드는 조수(潮水)와 저녁에 밀려드는 석수(汐水), 응천강의 세 물결이 만나는 곳이라 하여 삼랑(三浪)이라 부른다. 삼랑진은 응천강이 합류해 수심이 깊고, 바닷물이 역류해 들어와 강물이 얼지 않아 대형선박이 연중 운행할 수 있어 대포구로 발달했다. 삼랑진은 밀양과 청도를 연결하는 육로 교통의 요지로, 낙동강 수로의 요지이다. 이에 1756년에 삼랑진에 후조창(後漕倉)을 설치했다. 1770년에 편찬한 『동국문헌비고』 에 삼랑장이 언급되어 있는데, 상장시(上場市)와 하장시(下場市)가 개설되어 있었다. 후조창 설치 이후 삼랑진이 낙동강 하구의 중심 상업포구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1905년 경부선이 개설되면서 강항이 쇠락해졌고, 상랑진도 몰락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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