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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수영 승전무 검무를 계승하여 공연하기까지의 과정과 공연 장면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승전무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전승과 인품을 기리고 군사의 사기를 북돋던 의식무로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자 삼도수군통제영인 전남 여수를 대표하는 전통문화이다.
문경 모산굴 기세배는 임진왜란 때 모산굴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제 성격의 놀이다. 마을별로 풍물패와 농기를 앞세워 모산굴 앞에 모인 후, 성저마을 농기에 기세배를 한다. 그런 후 굴 안으로 들어가 풍물을 울리고 나온다. 굴 밖에서는 풍물자랑과 깃대 뺏기를 하는데 상당히 치열하게 벌어진다.
수운정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45-20(양동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80호이다. 청허재(淸虛齋) 손엽(孫曄:1544~1600)이 벼슬의 뜻을 접고 학문 연구를 위하여 1582년(선조 15)에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집경전에 보관되어 있던 태조의 어영을 잠시 보관하기도 한 곳이었다. 수운정의 정자의 의미는 ‘동도(東都)의 산수가 맑고 운연(雲煙)이 허공에 떠 있다[水淸而雲虛]’라는 의미이다.
행주서원은 권율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임진왜란의 승전지인 행주산성에 세워졌다. 해전을 제외하고 임진왜란의 승전지는 많지 않다. 선조도 명나라의 도움으로 전쟁이 끝이 났다고 여기고 있었다. 내륙에서는 권율의 행주산성 전투만이 유일한 승전지였다. 헌종이 고양에 능행을 가게 된 것을 계기로 행주산성에 권율을 배향하는 서원이 세워질 수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 각 지역의 유학자나 승려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의병은 임진왜란 초기에 관군이 재정비하여 일본을 물리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2만 2,600여 명에 달하였으며 이들은 일본군에 비해 무기나 전술적인 면에서 열세를 면할 수 없었지만, 지리에 익숙하고 적절한 전술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김면의병장의 유적은 경상북도기념물 제76호로 김면의병장을 기리기위해 1666년 건립된 도암서원과 사당, 신도비, 묘소로 조성되어 있다. 김면은 1541년(중종 36)에 태어난 학자로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경상우도 3대의병장 중 한 사람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의병의 선봉에서 30여 차례 전투를 치르며 큰 공을 세우고 1593년 금산 의병진에서 전투준비 중 순국하였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오산과 수원, 화성에 걸쳐 평쳐진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독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때 권율장군의 승전으로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여주 파사성, 용진 토성 등과 함게 도성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134-2 번지에는 옥천 송우암 유허비가 건립되어 있다. 비는 우암 송시열의 생가 터를 가리키기 위한 목적에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암 송시열은 조선 후기 기호 사림의 큰 선비이다. 정치가이자, 철학자이며, 대문호이기도 한 그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이러한 송시열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8세기 문중과 지역 유림들의 협심으로 비석이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송공단에는 의로운 기녀 금섬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금섬 순난비가 있다. 금섬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기녀로 송상현의 첩이 되어 동래부사로 부임하는 송상현을 따라 부산에 갔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송상현은 맞서 싸우다 순절하였다. 금섬이 송상현을 찾아 동래성을 갔을 때 이미 송상현은 순절한 후였다. 금섬도 왜군에게 잡혔으나 사흘을 꾸짖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되고 그 의로움을 기특하게 여긴 한 왜적 장수에 의해 송상현과 함께 묻히게 되었다. 이러한 금섬의 의로움이 오늘날까지 잊혀지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에 위치한 중앙공원에는 중봉(重峯) 조헌(趙憲) 전장기적비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은 왜적의 침입으로 함락되었다. 하지만 이튿날 중봉 조헌 선생을 필두로 영규대사(靈圭大師)와 박춘무(朴春茂)가 이끄는 의병이 합심하여 수복하였다. 조헌 선생은 이에 그치지 않고 금산에서 왜적과 재차 싸웠지만 전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조헌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36년인 1710년 비를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선동 진주성에는 진주 의암 사적비가 있다. 진주 의암 사적비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를 끌어안고 함께 남강에 빠져 죽은 논개의 사연이 새겨져 있다. 진주 선비 정식이 어우야담의 기사와 시를 지어 새겼다. 당시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의로운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수차례 건의하여 진주 의암 사적비와 의기사가 세워지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진주논개제가 개최되면서 논개의 희생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양리 비슬산 중턱의 한 굴에는 사효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 때 곽재훈과 그의 네 아들은 비슬산의 한 굴에 숨어 있다가 곽재훈의 기침 소리 때문에 지나가는 왜군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네 아들이 차례로 나와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죽임을 당했다. 왜군은 네 아들의 효성에 감동하여 곽재훈을 살려주었고 이 일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네 효자의 정려각이 세워졌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에 ‘곤지암(昆池岩)’이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곤지암이라는 바위가 위치해 있기에 ‘곤지암’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다가 전투에서 패하고 달천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신립의 시신을 광주시로 옮겨 장사를 지낸 후, 신립의 묘소 근처에 있던 바위를 지날 때면 말굽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 앞을 지나던 한 장군이 신립 묘소를 향해 호통을 친 이후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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