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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명재상 고형산에 대한 책이다. 강원도 횡성 출신인 고형산(高荊山)은 성종 14년(1483) 과거에 합격하고 무려 46년간 관료로 활동했으나 행적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고형산의 발자취를 조사하여 그의 생애와 관료 활동, 관련 유적과 설화를 수록했다.
횡성군 서운면 유현리 풍수원 성당은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자 전국에서 7번째로 지어진 서양식 성당이다. 벽돌을 쌓아 건축한 서양식 성당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됐다. 로마네스크 양식인 풍수원 성당 건물은 단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힌다. 정규하 신부는 성당에 이어 1912년 사제관을 지었다. 정규하 신부는 50년 가까이 풍수원성당에서 사목하면서, 강원도 내 주요 공소들을 본당으로 승격하도록 도왔다. 정규하 신부는 한국인으로는 4번째 서품을 받은 사제다. 풍수원성당 건물은 강원도 지방 유형문화재이며, 사제관은 등록문화재 제163호다.
요즘에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많아지고, 그 음식도 다양해져서 언제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간편한 식품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1971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과 강릉을 오가던 사람들의 허기를 채우던 것은 휴게소 핫바나 옥수수도 아니오, 찐빵이었다. 밀가루 반죽에 이스트를 넣어 부풀려서 속을 팥으로 채운 안흥찐빵은 그 쫄깃하고도 보드라운 맛 때문에 서울과 강릉을 오가던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기나긴 영동고속도로의 여정에서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별미로 자리잡아갔다.
강원도 횡성지역에서는 1995년부터 한우의 명품화 작업을 시작하여, 횡성한우는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우 브랜드가 되었다. 횡성한우축제는 횡성한우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 2004년부터 기존의 ‘횡성태풍문화제’의 명칭을 변경하여 새로운 목표와 주제를 가지고 개최되고 있다. 횡성한우축제의 주요행사는 크게 ‘먹을거리마당, 즐길 거리마당, 볼거리마당, 지역홍보마당’ 등으로 나뉘는데, 핵심은 ‘먹을거리마당’이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입석리(立石里)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옛날 박수인이라는 큰 부자가 살았다. 그런데 손님이 너무 많아 며느리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낯선 스님이 손님으로 오자 며느리는 손님이 적게 오는 방도를 구하였다. 스님은 망설이다가 며느리가 하도 졸라대 마을 앞에 있는 선돌에 갓을 해 씌우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했더니 손님이 안 드는 것은 물론 재산도 없어져서 망했다.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중금리 대문동(大門洞)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옛날에 진앙이라는 큰 부자가 살았다. 그는 놀잇배를 띄우고 밤낮 주연을 베풀었고, 복성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힘써 공부를 하였다. 어느 날 어떤 관리가 이를 시기하여 진앙을 진왕으로 부르며 이름으로 무고하여 죽었다. 그 부자가 살던 곳을 큰 부자가 살던 곳이라 하여 대문동이라 불렀다.
횡성읍 모평리 앞뜰의 밤나무 숲과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들어차 있었다. 언제부턴가 이 숲에 많은 황새와 왜가리들이 둥지를 짓고 번식을 하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둥지를 튼 새들을 아끼고 보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개혁이 일기 시작했고, 일제에 의해 숲들이 하루 아침에 잘리우고, 보금자리를 잃은 황새와 왜가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후 마을에는 불미스러운 일들과 열병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 회관에 모여 동네 굿을 한 달 반 동안이나 벌였고, 오늘날까지도 그루터기만 남은 이곳을 신성히 여기고 있다.
횡성읍 마산리 쇠절이에는 구씨성을 가진 중년 사내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내가 행방을 감추었고, 온 마을 사람이 구씨를 찾으러 다녔다. 구씨를 찾기 위해 송하석이라 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낯익은 구씨의 목소리가 들렸고, 구씨는 도리깨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씨름을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여럿이 합세하여 구씨 손에서 도리깨 장치를 떼어놓고 집으로 데리고 왔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구씨는 밖에서 웬 덩치가 큰 거인이 부르길래 따라나섰는데, 자기를 놔주지 않더라고 얘기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큰 거인은 사라지고, 자기는 집에 있던 도리깨 장치를 붙들고 있었다고 한다.
태종대왕이 와서 쉬어 갔다고 하는 자리로 그 자리를 아주 대단히 기념하기 위해 세워 놓은 태종대가 있었다. 태종대왕은 그곳에 자신에게 글을 가르치던 원천석 선생님을 만나러 왔다. 그러나,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았던 고려 충신 원천석 선생님은 숨기로 했다. 미리 태종이 올 것을 알았던 선생님은 노고소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자신이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을 알려주라고 이야기한다. 이후 할머니는 임금의 행차가 왔을 때 선생님이 시킨대로 방향을 반대로 알려주고, 임금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자신 스스로 큰 죄라고 생각해 물에 빠져 죽었다.
냉동 기술 같은 것이 없던 겨울에 자신의 어머니가 병환에 홍시를 찾았다. 그래서 효자는 감나무밭에 가서 감을 찾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호랑이를 타고 한 산골 집에 갔는데, 그 집이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그 집에서 마침 제사음식을 내왔는데 거기에 감이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께 홍시를 갖다 드릴 수 있었다. 홍시는 효자의 효성이 지극해 한 겨울에도 찾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고 모두들 말한다.
옛날에 임금이 효자, 효녀에게 교지라는 벼슬을 주었다. 한 아버지가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 아버지가 아파서 헐었는데, 약이 없어서 자식은 그 종기를 자기 입으로 빨아서 빼냈다.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후 장사를 지내려고 죽은 사람을 싣고서 떠나려는데 호랑이가 와서 등에 타라고 했다. 이후 장사를 모두 지내고 나서 호랑이와 자식은 3년을 같이 살았다. 이 이야기는 임금님 귀에 들어가서 그 아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한 마을에 고을 영감이 있었는데, 잔소리가 심하고 욕심이 많아 가난한 사람이 있어도 도와주지 않았다. 하루는 스님이 나타나 시주를 하라고 했는데, 고을 영감은 시주를 하지 않았다. 영감은 모래를 한 바가지 퍼다 주었고, 스님은 그것을 받아서 절에 갔다. 스님은 시주받은 모래 한 바구니를 부처님께 시주했다. 이를 받은 부처님은 이후 죽은 영감을 혼을 내었고, 영감은 살려달라고 빌었다. 스님은 영감에게 좋은 곳으로 보내줄테니 앞으로 잘하라고 했다.
한 노부부가 있었다. 노부부는 너무나 가난해서 나무를 해서 팔아서 살아나갔다. 어느 날 두 노인이 누워 있으니 까치가 깍깍 울더니 갑자기 노루가 한 마리 나타났다. 노루를 따라가 보니 노루가 한 골짜기에서 땅을 파라고 알려주었다. 그 안에서는 구슬같은 주머니가 하나 나왔다. 열어보니 패철 같은게 하나 있었다. 집으로 그 패철을 들고오니 쌀도 나오고, 돈이 오고 했다. 하루짝 꿈을 꾸니 패철을 절대 남에게 빌려주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마음 좋은 노부부는 이웃에게 패철을 빌려줬고, 하루 아침에 재산은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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