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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경남지역 구포국수의 시작과 이면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교육용 애니메이션이다. 서민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구포국수의 역사적 가치와 위상을 알 수 있다.
부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17세기 백자철화용문호는 2012년 5월 17일에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38.4㎝로 몸체의 윤곽선이 풍만하면서도 원형에 가까운 이른바 '달 항아리'의 모습이다. 대형 항아리는 몸통의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 접합하였는데, 이 항아리 역시 커다란 발(鉢) 두 개를 구연끼리 맞붙이는 방식으로 제작하여 동체 중앙부에 깎아 다듬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문양은 항아리를 휘감은 용과 풀처럼 보이는 구름이며, 얼굴이 해체된 듯한 용의 모습은 파격미가 돋보이는 지방 가마의 작품임을 추정하게 한다.
동래 별장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일본인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가 지은 근대 일본식 정원건축이다. 동래 별장이 위치한 동래 온천은 옛날부터 다친 곳을 치유해 주는 효험이 있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동래 온천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어 일본인들의 휴양을 담당한 관광지로 변모했다. 동래 별장도 휴양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원래 있던 건물을 허물고 증축하여 완성되었다. 동래 별장은 오랜 세월 다양하게 용도가 변경되어 오다가 현재는 대중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의 생가가 있다. 박차정은 아버지와 오빠들의 영향을 받아 강한 민족의식을 품게 되었다. 근우회, 의열단 등 민족운동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박차정 의사 생가는 거의 허물어져 있다가 박차정의사숭모회의 노력으로 2005년 복원되었다. 최근 박차정의 오빠인 박문희와 박문호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면서 삼남매의 업적이 생가 및 생가 입구에 전시되었다.
장기려(張起呂)는 부산에서 의료·사회봉사활동을 한 의사이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출생으로 1932년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 평양도립병원장 및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둘째아들 장가용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했다. 서울대학교·부산대학교·가톨릭대학교·부산백병원에서 강의하며 복음병원의 원장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치료했다. 1974년 ‘한국간연구회’를 창립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진행하여 외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1976년 '청십자사회복지회’를 창설하여 취약계층 구호 활동을 전개하는 등 기독교인으로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의사로서 소명을 다하고, 1995년 북에 남은 이산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박차정은 부산 동래 복천동 출신으로 박용한(朴容翰)과 김맹련(金孟蓮) 사이의 3남 2녀 중 넷째이다. 1925년 동래 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박차정은 근우회 활동을 통해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1929년에 광주항일운동, 1930년에는 서울 여학생 시위사건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같은 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고 김원봉과 결혼하였다. 그 후 1936년에는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였고,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당하여 후유증으로 1944년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차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건상은 경상북도 칠곡 출신으로 어려서 부산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장건상은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하였으나 1년 만에 자퇴하고, 1908년 미국 인디애나 발파라이소대학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1916년 상해에서 신규식의 동제사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7년부터는 만주 안동에서 국내 망명객의 길 안내를 맡았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외무부 위원이 되었다. 1920년 임시정부 활동에 회의를 느낀 장건상은 의열단, 고려공산당, 국민대표회의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45년 장건상은 임시정부대표로 연안에 파견되었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중경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1945년 임시정부 2진으로 환국하여 여운형(呂運亨)과 진보 진영과 혁신계열에서 활동하며 극좌·극우 편향성을 극복하고 중간좌파 노선을 지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86년 장건상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백산상회(白山商會)는 경상남도 의령(宜寧)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자본가였던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가 1914년 부산광역시 동구 동광동에 세운 민족기업이다. 1919년 이후 백산상회는 사실상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락거점과 국내에서 조달한 독립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막중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였다.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은 1940년 11월 23일 일제가 주죄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대회’라는 학생경기대회에서 일본인 심판장의 편파 판정과 민족차별에 분노한 동래중학교와 부산 제2상업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이 의거를 일으킨 장소이다. 이날 양교 학생 1,000여 명은 시내로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벌였고, 경기 심판장이었던 노다이 대좌의 관사까지 습격하였다. 현재 구덕운동장 주차장 앞에는 <부산 항일학생의거 터> 표지석이 세워졌고, 2004년 11월 23일 부산학생의거를 기리기 위해 부산어린이대공원에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탑>이 건립되었다.
유엔평화기념관은 2014년도에 개관한 국가보훈처 산하의 현충 시설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UN군을 기억하고, 평화를 위해 희생한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휴전에 이르는 역사가 전시된 ‘한국전쟁실’, 한국전쟁에 참여한 UN군의 현황과 참전용사들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UN참전실’, UN의 활동과 지금도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구촌 소식을 전하는 ‘UN국제평화실’, 부산의 아동복지와 의료 여건 향상 등에 힘쓴 미국 장교 리차드 위트컴에 초점을 맞춘 ‘리차드 위트컴전’ 등을 관람할 수 있다.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30년대 후반부터 광복을 맞은 1945년까지 일제의 비인도적 강제동원의 실태를 조사하고 증거를 수집하여 전시하는 최초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때 자행된 강제동원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5년에 문을 열었다. 피해자가 직접 기증한 사진과 문서, 음성파일 등의 귀한 역사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UN기념공원, UN조각공원, 평화공원, UN평화기념관, 대학로문화거리와 함께 UN평화문화특구로 지정됐다.
한국거래소 자본시장역사박물관은 자본의 흐름을 배울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박물관이다. 증권, 선물, 파생상품 등 많이 들어는 봤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관람객에게 쉽게 전달하고, 자본시장의 어제와 오늘을 소개하며, 미래의 모습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세워졌다. 홍보관 시절부터 수집한 600여 점의 귀한 유물과 자료가 온오프라인에서 제공되는 만큼 누구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51층에서 내려다보는 부산 시내의 아름다운 풍경 또한 한국거래소 자본시장역사박물관의 매력 중 하나다.
부산 중구 남포동 건어물 도매시장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본래 건물은 1958년 건립된 수협 건어물 위판장이었다. 세월이 흘러 수협 위판장이 신축 자갈치 위판장 건물로 이전함에 따라 건물만 남게 되었고, 2019년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추진됨에 따라 남겨진 옛 건물의 외형을 살린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소포장 된 건어물과 건어물을 모티프로 한 소품 등을 판매하며, 전시회나 제품설명회, 플리마켓 등도 열리고 있다.
종교와 문화 / 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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