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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경남지역 구포국수의 시작과 이면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교육용 애니메이션이다. 서민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구포국수의 역사적 가치와 위상을 알 수 있다.
부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17세기 백자철화용문호는 2012년 5월 17일에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38.4㎝로 몸체의 윤곽선이 풍만하면서도 원형에 가까운 이른바 '달 항아리'의 모습이다. 대형 항아리는 몸통의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 접합하였는데, 이 항아리 역시 커다란 발(鉢) 두 개를 구연끼리 맞붙이는 방식으로 제작하여 동체 중앙부에 깎아 다듬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문양은 항아리를 휘감은 용과 풀처럼 보이는 구름이며, 얼굴이 해체된 듯한 용의 모습은 파격미가 돋보이는 지방 가마의 작품임을 추정하게 한다.
동래 별장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일본인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가 지은 근대 일본식 정원건축이다. 동래 별장이 위치한 동래 온천은 옛날부터 다친 곳을 치유해 주는 효험이 있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동래 온천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어 일본인들의 휴양을 담당한 관광지로 변모했다. 동래 별장도 휴양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원래 있던 건물을 허물고 증축하여 완성되었다. 동래 별장은 오랜 세월 다양하게 용도가 변경되어 오다가 현재는 대중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송상현은 1551년(명종 6) 1월에 태어났다.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본관은 여산이고, 아버지는 송복흥, 어머니는 안동 김씨이다. 아버지 송복흥, 어머니는 안동 김씨이다. 1576년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승정원 정자, 박사, 경성판관, 3조 정랑, 종계변무사 질정관(質正官), 지평(持平), 백천군수, 충훈부경력, 사헌부집의, 사간원사간, 사재군자감정을 역임했다. 1591년 동래부사로 부임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왜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충신이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의 생가가 있다. 박차정은 아버지와 오빠들의 영향을 받아 강한 민족의식을 품게 되었다. 근우회, 의열단 등 민족운동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박차정 의사 생가는 거의 허물어져 있다가 박차정의사숭모회의 노력으로 2005년 복원되었다. 최근 박차정의 오빠인 박문희와 박문호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면서 삼남매의 업적이 생가 및 생가 입구에 전시되었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시량리 동암마을에서는 대왕문어와 돌문어 잡이를 한다. 문어는 크기에 따라 왜문어, 대왕문어로 구분하는데, 대왕문어는 20~50㎏의 큰 문어이다. 왜문어는 참문어와 돌문어를 나뉘는데, 동암마을에서는 돌문어와 대왕문어를 잡는다. 돌문어는 외줄낚시, 주낙, 문어단지로 잡는다. 비린 것을 좋아하는 문어를 잡기 위해 민물게나 비린 생선을 잘라 미끼로 사용한다. 문어단지는 문어는 어둡고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성질을 이용하는 어로방식이다. 서유구의 『난호어목지』 전어지에 “노끈으로 단지를 옳아 매어 물속에 던지면 문어가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에 반해 대왕문어를 잡는 통발조업을 시작한지는 3~4년 전으로 연원이 짧다. 대한해협 인근에 대왕문어가 많이 서식하므로 8t 이상의 선박으로 조업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일대의 해안마을들에서는 붕장어잡이를 한다. 그중 학리포구는 붕장어잡이의 중심 포구이다. 붕장어는 먹붕장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로 일명 ‘아나고’라고 불린다. 『자산어보』에 눈이 크고 배 안이 묵색(墨色)으로 맛이 더욱 좋은데, 이를 붕장어라고 표현했다. 남해안에서 특히 많이 어획되는 붕장어는 일제강점기부터 식용이 본격화되었다. 난류의 종착점에 위치해 있어 붕장어를 비롯해 복어, 갈치, 가자미 등도 많이 어획되었다. 주낙과 통발을 이용해 붕장어를 어획하고 있으나 주낙은 작업 방식이 번거롭고 들어가는 비용 대비 소득이 좋지 않아 줄고 있다. 한때 저인망으로 어획하기도 했지만 어족자원 고갈의 이유로 붕장어잡이는 주낙만을 허용한다. 붕장어가 낚싯바늘을 물면 줄만을 끊어내므로 상품성이 떨어져 점차 쇠퇴하는 어법으로 간주한다.
부산광역시 낙동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는 민물장어잡이가 한창이다. 장어는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올라가 성장하는데, 약 5~10년간 강에서 살다가 성어가 되면 산란을 하러 바다로 간다. 회유성 어종인 장어는 다시 담수로 올라오는데, 낙동강 하구의 구포와 엄궁은 장어들이 올라오는 길목으로 황금어장 중 하나이다. 낙동강 하굿둑과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변의 내수면 어업은 모두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장어잡이는 예전에는 계절별로 어구를 달리 사용했으나 동력선을 사용하면서부터는 주낙과 통발을 주로 사용한다. 장어는 활어로 거래되나 어획량이 급감해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구포와 엄궁에 있는 민물장어집은 자연산 장어 대신 양식장어를 사용해 영업을 하고 있다.
윤정은(尹正殷)은 1852년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서 태어났다. 구포 명문가인 윤씨 집안의 장남으로 본명은 윤길은(尹吉殷)이다. 그는 평소에도 일제통치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했던 인물로 1919년 서울의 3·1 운동 소식을 접하자 68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을 격려하며 아들 윤경봉과 함께 구포장터 3·1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시위과정에서 체포된 주동자를 구조하기 위해 1,2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로 진격하여 건물과 집기를 파괴하는 등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3월을 선고 받고 모진고문을 견뎌내며 복역하다 옥사했다.
최천택은 1897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20년 9월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의거에 연루, 체포되어 혹독한 고초를 받았으며, 1922~1925년 부산청년회, 부산청년연맹 등에 참여하여 조선기근구제의연회에서 연설하는 등 활동하였고, 1927~1929년 신간회 부산지회 부회장, 지회장 역임하는 등 부산지역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여 일경에 수십 차례에 걸쳐 구금되기도 했다. 정부는 2003년 최천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하였다.
장기려(張起呂)는 부산에서 의료·사회봉사활동을 한 의사이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출생으로 1932년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 평양도립병원장 및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둘째아들 장가용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했다. 서울대학교·부산대학교·가톨릭대학교·부산백병원에서 강의하며 복음병원의 원장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치료했다. 1974년 ‘한국간연구회’를 창립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진행하여 외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1976년 '청십자사회복지회’를 창설하여 취약계층 구호 활동을 전개하는 등 기독교인으로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의사로서 소명을 다하고, 1995년 북에 남은 이산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박차정은 부산 동래 복천동 출신으로 박용한(朴容翰)과 김맹련(金孟蓮) 사이의 3남 2녀 중 넷째이다. 1925년 동래 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박차정은 근우회 활동을 통해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1929년에 광주항일운동, 1930년에는 서울 여학생 시위사건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같은 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고 김원봉과 결혼하였다. 그 후 1936년에는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였고,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당하여 후유증으로 1944년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차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건상은 경상북도 칠곡 출신으로 어려서 부산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장건상은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하였으나 1년 만에 자퇴하고, 1908년 미국 인디애나 발파라이소대학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1916년 상해에서 신규식의 동제사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7년부터는 만주 안동에서 국내 망명객의 길 안내를 맡았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외무부 위원이 되었다. 1920년 임시정부 활동에 회의를 느낀 장건상은 의열단, 고려공산당, 국민대표회의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45년 장건상은 임시정부대표로 연안에 파견되었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중경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1945년 임시정부 2진으로 환국하여 여운형(呂運亨)과 진보 진영과 혁신계열에서 활동하며 극좌·극우 편향성을 극복하고 중간좌파 노선을 지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86년 장건상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종교와 문화 / 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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