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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화성

"혼란을 잠재우고, 왕권을 드높여라." 정조가 신도시 수원화성을 설계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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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심지역 경기 >수원시

    수원화성, 화성의 도시 기반시설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제2 도시로 조성하고자 여러 가지 행정적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는데 수원부사 조심태는 새 고을에 점포를 설치하는 일에 대해 본고장 백성들 중 살림밑천이 있고 장사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읍 부근에 자리 잡고 살게 하면서 이자 없는 돈 6만 냥을 빌려주자는 상업진흥책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이제는 수원을 ‘상왕의 도시’, ‘조선조 제2의 도시’를 건설하려는 준비작업을 착착 진행하게 된다. 1793년 1월에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좌의정을 역임한 채제공을 초대 화성유수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 사이 행궁을 둘러싸는 5.7km에 달하는 성곽이 건설되고 도시기반 시설도 새롭게 조성되었다. 먼저 성안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남북대로와 행궁을 중심으로 동쪽을 향하여 사거리를 만들고 이를 ‘십자로’라 불렀다. 이곳에는 상가가 들어서고 민가들이 주변에 조성되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관청, 도로, 다리, 상가 등의 도시기반 시설은 물론 저수지와 둔전을 만들어 생산기반 시설도 완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조경도 중요시 여겨 도로변에 수많은 나무를 심었다.
  • 경기 >화성시

    아버지 사도세자를 찾아 정조가 다니던 화성효행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로 옮기고 매년 능을 찾았다. 도성에서 무덤이 있는 현륭원까지 이르는 길은 정조효행길 또는 화성효행길이라는 이름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배다리를 이용해 한강을 건넌 후 과천에서 수원으로 이동했지만, 1795년부터는 한강을 건넌 후 시흥(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을 지나 수원으로 향했다. 과천길을 버리고 시흥길을 택한 것이다. 시흥행궁에서 머무른 뒤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화성에 도착했으며, 화성행궁을 출발해 대황교를 지나 현륭원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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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대왕 능행차를 시연하는 '수원화성문화제'
    수원화성문화제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수원화성에서 개최되는 종합축제 성격의 향토문화제이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그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옮긴 이후 축조한 성곽이다. 정조대왕의 지극했던 효심을 기리는 뜻도 담겨 있다. 수원화성문화제의 대표 행사는 ‘정조대왕 능행차 시연’으로 수 천명이 참가하여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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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의 생산과 유통 기반시설
    정조는 화성을 자급자족적인 도시로 성장시키고자 농업생산기반 시설을 건설하였다. 제일 먼저 1795년에는 만석거를 조성하고 이 저수지를 활용하여 대유둔을 조성하였다. 1798년 4월에는 현륭원 남쪽에 만년제를 완성하였고 1799년에는 만석거보다 규모가 3배 정도 더 큰 축만제를 건설하였다. 정조는 상업발전을 위해 종로를 중심으로 한 북수동 일대에 상설 점포인 시전상가를 조성하였고 이후 이를 바탕으로 ‘성내 시장’과 팔달문 밖에 성외 시장’이 형성되었다.더 나아가 화성은 삼남으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정조는 1796년 화성 성역이 마무리되는 즈음에 양재역을 영화역으로 고치고 역참(郵治)을 화성 북문 밖에 옮겨 설치하였다. 이는 수백 년 이상 삼남지방으로 물자와 사람들이 오가던 ‘길’에 대한 혁명적 변화였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 ‘1번 국도’로 불리는 도로의 원형이 탄생된 것이다. 이에 따라 수원은 삼남은 물론 서울, 광주, 용인, 안산, 남양, 안성 등으로 사방팔방 뻗어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물산이 모여드는 상업의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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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는?
    정조는 1793년 12월 6일에 영의정을 역임한 채제공(蔡濟恭)을 총리대신으로, 훈련대장을 역임한 조심태(趙心泰)를 감동당상으로 임명하면서 화성건설을 본격화하였다. 이어 12월 8일에 화성성역소를 설치하고 낭관(郎官)의 우두머리인 도청에 이유경(李儒敬)을 임명하였다. 그 하위 단위는 작업관리 및 현장감독 분야와 사무관리 및 지원부서로 나누었다.화성 성역에 동원된 기술자는 석수, 목수, 미장이, 와벽장이, 대장장이, 개와장이, 수레장이, 화공, 가칠장이, 큰끌톱장이, 작은끌톱장이, 기거장이, 걸톱장이, 조각장이, 마조장이, 선장, 나막신장이, 안자장이, 병풍장이, 박배장이, 부계장이, 회장이 등 549명이었다.기술자를 제외한 모군(품팔이)은 화성 성역 현장에서는 자재를 운반하는 담군과 허드렛일을 하는 모군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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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축조를 위한 재료는 어디서 왔을까?
    화성 건설에서 돌은 숙지산과 여기산 두 산에 각각 2곳, 권동에 1곳 그리고 팔달산 등 모두 여섯 군데에서 채취하였다. 모두 28만 7,600여 덩이가 축성에 소요되었다. 목재는 국가에서 관리하던 재목을 베어 오거나 사오는 두 가지 방식으로 조달하였다. 먼저 국가에서 관리하던 안면도 · 장산곶 · 강원도 지역에서의 조달은 직접 베어내어 운반하였다. 화성 성역에서 기와와 벽돌은 왕륜면 백운동 성역소에서 땔나무를 마련하여 조달하였다. 기와가마는 왕륜과 서봉동에 설치하였다. 화성 성역에서 철물은 그 사용 용도가 다양하였다. 철물은 해서(황해도), 호서(전라도), 관동(강원도), 서울, 수원부 등 각처에서 사왔다. 다산 정약용의 발명품인 거중기는 왕실에서 1부를 내려주었다. 유형거는 왕실에서 1량을 내려주고 10량을 새로 만들었다. 이 외에도 숯, 석회, 장기산 뇌록, 종이, 붓, 먹, 벼룻돌, 숙마, 느릅나무 껍질인 유피, 쇠가죽, 빈 가마니, 숫돌 등이 조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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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건설 비용
    정조는 1789년 7월 11일 장헌세자의 원침을 이전하기로 하고, 4일 만인 15일에 수원의 읍(邑) 소재지를 전격적으로 팔달산 동쪽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구읍치에 있던 주민들의 주택과 전답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졌다. 보상과 원침 조성 비용은 모두 돈으로 환산하면 총 24만 5,500냥이 지출되었다.그리하여 총체적인 화성 건설에는 1789년 원침 이전과 구읍치 보상비용에 약 24만 5,500냥 이외에도 1790년 용주사 창건에 8만 7,505냥 1전,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위한 1795년(을묘)의 원행에 지출된 10만 38냥 6전 8푼, 화성 건설에 약 93만 4,028냥 등 총 136만 7,071냥 7전 8푼이 지출되었다. 이러한 공사비는 호조 1년 수입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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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의 화성 기본설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인재양성과 연구사업의 기초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특히 즉위 1년 후인 1777년 2월에 백과전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중 5,020권을 은 2,150냥을 지급하고 사 오도록 명하였다.다산 정약용은 1789년(정조 13) 배다리〔舟橋〕를 만드는데 그 규모와 제도를 올려 성공한 바가 있어 주상께서 성제(城制)에 대해 조목조목 올릴 것을 명하여 본인이 화성을 기본 설계하였다고 회고하였다.그리하여 정약용은 여러 책들을 참고하여 8가지 원칙을 담은 『성설』을 지어 정조에게 올렸다. 위의 8가지 원칙이 임금이 지은 『어제성화주략』으로 채택되었다. 성역(城役)을 마친 뒤에 정조는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며 다산을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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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한만큼 받는 화성건설의 성과급제
    화성 건설에서 특별히 강조해야 할 사항은 임금 지불 방식에서 날품팔이들에게 짐을 옮긴 거리와 크기 그리고 회수에 따라 차등 지급한 성과급제를 시행한 것이다.그러나 대부분 하루에 2전 5푼 정도 일당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불하였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는 사람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조선 초기 강제로 동원되어 일을 하던 방식에서 화성 건설 시 돈을 주는 방식으로 변화된 것은 보다 세상이 발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본주의적’인 사회로 변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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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화성을 거쳐 안성까지 가던 영화도(迎華道)
    영화도는 조선 시대에 경기도에 있던 역도 가운데 하나이며, 경기도 수원의 영화역(迎華驛)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본래 양재도에 속해 있었던 것이 수원 화성 축조 이후 개편되어 영화도가 되었다. 영화도의 전신인 양재도는 고려 시대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던 광주도(廣州道)에 속한 역들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1796년 충청도 정역찰방이 관할하던 역과 동화도가 영화도로 개편되면서 과천역과 영화역이 새롭게 설치되었으며, 중심역은 양재역에서 영화역으로 바뀌었다.

천의 얼굴 고창

우리나라 고인돌 최대 밀집지역인 고창의 역사는 청동기 시대인 2천 년 전부터 시작됩니다. 삼국시대·조선·근대 유물까지 모두 보유한 고창을 둘러보면서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을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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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고창군

    술에 취하면 잠드는 바위, 고창 취석정
    취석정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노동로 191-9(화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3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경희(金景熹:1515~1575)가 사화(士禍)를 피해 고향으로 낙향하여 1546년(명종 1)에 건립하였다. 파괴되어 빈터로 남아 있다가 후손들이 1871년(고종 8)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취석정이라는 정자명은 도연명이 한가로이 세상을 살 때 술에 취하면 집 앞 바위 위에 잠들기도 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으며, 사람이 욕심 없이 한가롭게 생활한다는 도가적 뜻이 담겨 있다.
  • 전북 >고창군

    성을 밟으면 병에 안걸리는 고창읍성
    1453년(단종 1)에 반등산을 바라보며 남쪽에서 뻗어 내린 산 위에 완만한 곡선으로 두른 원형이며 돌로 쌓은 평산성형이다. 총 길이 1,680m, 높이 4m, 면적은 50,172평에 이른다. 고창의 읍성으로 세워진 것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데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왜적으로부터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이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읍성이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석축 성곽이다.
  • 전북 >고창군

    조선시대 개설된 고창읍내장을 계승한 고창상설시장
    '고창상설시장'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개설된 '고창읍내장'을 계승한 시장으로 상설시장과 오일장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 주로 고창의 특산품을 비롯하여 다양한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 전북 >고창군

    고창읍성을 밟고 무병장수하세! '고창 모양성제'
    고창모양성제는 애국심을 고취하고 향토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며 고창군민의 긍지와 애향심을 높이기 위해 1973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지역축제이다. 왜구를 막기 위해 전라도민들이 축성한 모양성(고창읍성)을 밟는 답성놀이와 강강술래 재연이 주효 행사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9월 9일(중양절)에 축제를 개최하여 답성놀이를 한다.
  • 전북 >고창군

    책을 읽고 책을 만드는 고창 책마을해리
    전라북도 고창 해리면 월봉마을의 '고창 책마을해리'는 출판계에 몸 담았던 이대건 촌장이 나성초등학교를 개조하여 만든 곳이다. 나성초등학교는 1933년 광승 간이학교로 문을 열어 2001년에 폐교가 된 이후 2006년에 '고창 책마을 해리'로 다시 문을 열었다. 바람언덕(야외강연장), 암벽타기벽이 있는 동학평화도서관, 책숲 시간숲(마을신문과 지역책 도서관), 버들눈 도서관(어린이청소년 도서관), 직접 책을 찍어낼 수 있는 누리책공방 등 볼거리와 할거리가 넘치는 곳이다.
  • 전북 >고창군

    판소리 명창들을 교육했다는 고창 신재효 고택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고창읍성 입구에 있는 신재효 고택은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가 1850년 경에 지은 집이다. 이 집에서 판소리 명창을 모아 이론을 강론하고 판소리 사설을 편술하였다. 그러나 수리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1899년에 건축했다고 되어 있어, 신재효 사후에 그 아들이 중수한 것으로 추정한다. 중요민속자료를 지정되기 이전까지는 고창경찰서 관사로 이용되었다. 대지 3천평 규모에 사랑채로 보이는 건물 한 동과 연못, 우물만이 남아 있다. 「동리가」에는 집안에 정자가 있고, 그 아래로 시냇물이 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연못은 과거의 화려했던 신재효 가옥의 영광을 보여주며, 초가를 얹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 전북 >고창군

    긴 토담길을 따라 들어가는 고창의 김정회 가옥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는 안동 김씨와 청도 김씨의 세거지로 여러 채의 고가가 있지만 김정회 가옥은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가이다. 1862년에 건립한 전형적인 상류가옥으로, 서예가이자 학자인 보정 김정회(1903~1970)가 태어난 집이다. 고가로 이어지는 긴 토담길은 소박하지만 전통한옥의 멋스러움도 갖추고 있다. 대문을 통해 들어서면 넓게 트인 사랑마당과 사랑채가 있는데, 최근에 초가를 기와로 바꾸었다. 안채와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남녀가 유별한 조선시대의 유교적 이념이 잘 투영되어 있다.
  • 전북 >고창군

    요정의 시대는 갔어도 - 고창 조양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조양관’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여관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한국전쟁 후 전라북도 전주의 요정 ‘행원’에서 주방 일을 하던 사람이 ‘국일여관’을 인수해 ‘조양관’이라는 음식점을 열었다. ‘조양관’은 일반 음식점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유행했던 요정으로 영업을 했다. 요정은 요리가 주목적이 아니라 술과 여흥을 파는 업태로서, 기생제도의 변화와 함께 전국적으로 곳곳에 생겨났던 업태다. 조양관은 1970년대까지 고창의 손꼽아주는 요정이었으나, 이후 고급 한정식 음식점으로 전환했다. 조양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주거시설의 특징을 간직한 건물로 평가받아 2007년 등록문화재 제32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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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 오산, 남 고창”의 민족 교육 – 고창 구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
    “북 오산, 남 고창”은 일제강점기 초기 대표적인 민족교육 학교 두 곳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와 전라남도 고창의 고창고보다. 흥미롭게도 고창고보의 전신은 일본인 마스도미가 1919년 세운 오산학교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교육자였던 마스도미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사죄하는 심정으로 학교를 설립했다. 재정난으로 오산고보가 폐쇄 위기에 몰리자 고창군민들이 나섰다. 천석꾼 지주들을 중심으로 5,500명의 기부금을 모아 오산고보를 잇는 고창고보가 1922년 설립되었다. 고창고보는 새로운 교육을 실천했으며, 1937년 전주 신흥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자 고등과 전체 학생을 받아들였다. 고창고보 강당은 1939년 지어졌으며,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고창고보 건물 가운데 당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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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고 밟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고창 답성놀이
    고창 답성놀이는 윤년 윤달에 부녀자들이 돌을 머리위에 이고 모양성(고창읍성) 성곽 위로 올라가 성 줄기를 따라 열을 지어 도는 민속놀이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성곽을 3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무병장수하고, 극락왕생 한다고 믿었다. 답성놀이는 원래 오래된 성이 있는 곳에서 두루 행해졌지만 현재는 고창지역에서만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