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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로 일본군을 몰아낸 행주대첩
    1593년 1월 9일 평양성이 탈환되자 여러 장수들이 경성으로 모여들었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그의 군사 4천 명을 반으로 갈라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양천강(陽川江) 언덕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정병 2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으로부터 고양군(高陽郡) 행주(幸州)의 성산(城山)으로 옮겨 진을 쳤다.2월 12일 5리쯤 떨어진 들판에 적의 무리 약 3만이 가득했다. 선봉 1백여 기가 점점 접근해 오더니 조금 있자 1만여 기병이 들을 뒤덮고 와서 일시에 포위하고 바로 돌격해 왔다. 우리 군사들은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크고 작은 승자총통(勝字銃筒) 및 진천뢰(震天雷)·등 각종 화기를 연달아 쏘았는데도 물러가지 않고,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진격했다.지역은 높고 험준한 데다가 뒤로는 강벽(江壁)에 막혀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각오를 하였다. 화살을 비 오듯 퍼붓거나 특히 행주산성에는 돌이 많았기 때문에 모든 군사들이 다투어 돌을 던져 싸움을 도왔다.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크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유리한 조건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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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전투를 이끈 권율의 행주대첩
    행주대첩은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여겨질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다. 행주대첩의 승전이 있었기에 왜군은 한양 도성 함락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행주산성을 지킨 군사들은 7부대로 나누어 끊임없이 진격해오는 왜군의 공격에 끝까지 맞섰다. 선조에게 승전보를 전한 신경희는 계속해 진격해오는 왜군을 마지막까지 방어한 것은 칼과 화살이 아니라 권율 장군의 독전이었다고 아뢰었다. 조선의 군사들은 권율의 독려에 힘입어 의지 하나로 10배가 넘는 왜군을 물리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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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큰 구렁이가 살았다는 권율의 승전비
    행주서원에는 행주대첩비 2기가 있다. 하나는 행주대첩의 승전을 기리는 권율의 승전비이고 다른 하나는 기공사의 건립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고양군지』의 기록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권율의 승전비에 금이 가 벌어지더니 그 안에 큰 구렁이가 살았다고 한다. 해방된 후에 틈이 다시 좁아졌고 장군의 신위를 모신 곳에서는 밤마다 이상한 소리와 현상들이 있었다고 한다. 권율 장군의 영혼이 살아 나라를 지킨다는 민간의 염원이 담긴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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